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끝없는 설원 한가운데, 홀로 남은 마지막 등대처럼 도시 ‘프로스트’가 우뚝 서 있었다.
도시의 중심에 솟은 거대한 증기탑이 회색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올랐고, 그 주변으로 황동과 강철로 지어진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눈처럼 머리가 센 의장은 높은 건물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해진 양복 위로 걸친 방한 장비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간신히 막아주고 있었다.
의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김이 되어 사라졌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와 절망이 섞여 있었다.
마치 끝없는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은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
프로스트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의장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프로스트의 역사, 아니 의장 자신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그것은 너무나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오브젝트 현상으로 인해 발생한 전 세계적인 대혼란, 그리고 그사이에 급작스럽게 닥친 극지방의 온도 저하.
의장이 살던 땅은 사방이 끝없는 설원으로 뒤덮였고, 그곳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다.
‘설원의 달’이 극지방의 인류를 모조리 쓸어버렸으니까.
그러나 기적적으로, 의장이 이끄는 생존자 무리가 있던 곳은 ‘설원의 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몇 안 되는 안전지대였다.
첫 번째 행운이었다.
비축된 연료가 바닥나갈 무렵, 그들은 우연히 버려진 석유 시추 시설을 발견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도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두 번째 행운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의장의 생존자 무리 속에 우연히도 관련 기술자들이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지식과 기술이 없었다면, 프로스트는 결코 지금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세 번째 행운이었다.
석유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할 즈음, 그들은 우연히 ‘푸른 석탄’이라는 오브젝트를 발견했다.
이 특별한 연료원은 프로스트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네 번째 행운이었다.
알 수 없는 오브젝트 현상이 내연기관을 망가뜨리기 시작했을 때, 의장은 또다시 우연히 ‘기계 심장’이라는 오브젝트를 손에 넣었다.
이 오브젝트를 이용해서 도시에 거대한 증기탑을 세웠고, 도시의 기계들에 다시 한번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다섯 번째 행운이었다.
의장은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프로스트는 우연과 행운의 연속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행운도 바닥을 보였다.
의장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검은 연기가 하늘을 짙은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프로스트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짙은 잿빛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잿빛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의장은 창밖으로 보이는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내 능력 부족 때문이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조와 체념이 배어 있었다.
한때 프로스트의 구원으로 여겨졌던 행운들이 이제는 도시를 서서히 좀먹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도시를 세운 근간이 이제는 도시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설원의 달’을 피했던 이곳은 이제 세상으로부터 실질적으로 고립되었다.
설원의 달 때문에 교류가 불가능했으니까.
한때 도시의 구원자로 여겨졌던 석유 기술자들은 이제 도시의 의원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의장의 눈과 귀를 막았고, 외부와의 소통도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좇아 도시의 자원을 낭비하고, 불필요한 정책들을 밀어붙였다.
의장의 권위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푸른 석탄의 발견은 처음에는 축복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저주가 되어버렸다.
도시의 주민들은 생존만을 위한 끝없는 노동의 굴레에 갇혀 광산으로 내몰렸다.
기계 심장은 도시의 생명줄이었지만, 동시에 족쇄이기도 했다.
이 오브젝트에 의존하게 된 프로스트는 더 이상의 개선이나 확장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
도시는 정체되어 있었고, 그 정체는 곧 쇠퇴를 의미했다.
의장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들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시 주변의 기온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료의 생산량은 충분했지만, 소비량의 증가 속도가 더 빨랐다.
이대로 가다간 머지않아 에너지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가장 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관측반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전례 없는 규모의 거대한 눈보라가 프로스트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이 폭풍이 도시를 덮친다면, 도시는 다시 한번 시련에 들게 될 것이다.
끔찍한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대비하려고 해도, 도시를 같이 이끌어야 할 의원들은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더 많은 생산량, 더 많은 착취, 더 많은 사치, 더 많은 권력.
그들의 관심사는 저런 것들뿐이었다.
실제로 설원의 달이 사라진 뒤, 시민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푸른 석탄’을 마구 태워서 주기적으로 밀무역을 하고 있던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우습게도 의장은 그제서야 ‘설원의 달’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없었지….’
난간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여전히 웅장해 보였다.
거대한 증기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불빛으로 가득한 건물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하지만 의장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의장의 손에는 의원들 몰래 조사를 의뢰한 쪽지가 들려 있었다.
<대규모 이송 계획, 불가능.>
<비축 중인 푸른 석탄으로는 도시 인구의 10% 남짓만 이송 가능.>
의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마치 기도하듯, 그는 속삭였다.
“제발… 한 번만 더… 우리에게 행운이 남아있기를….”
하지만 그의 기도가 닿을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프로스트의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거대한 폭풍우의 전조처럼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
잿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 도시 프로스트의 외곽은 여전히 얼어붙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거대한 증기탑에서 가장 먼, 버려진 시설들 사이로 희미한 빛줄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황폐한 풍경 속에서 활기가 조금씩 감돌고 있었다.
새벽빛에 눈을 뜬 사람들이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추위에 떨면서도, 그들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오늘도 살아남기 위한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자, 어서 불 좀 지펴봐.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춥네.”
중년의 남자 하나가 낡은 드럼통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푸른색 광석이 드럼통 안으로 잔뜩 들어가자, 곧 온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 열기에 이끌려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여기 콩이랑 채소 좀 가져왔어요.”
젊은 여성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눈빛만은 따뜻했다.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 굶어 죽었을 거야.”
커다란 냄비가 불 위에 올려졌고, 그 안에 콩과 채소, 그리고 얼음덩어리가 차례로 들어갔다.
토도독. 퉁.
콩과 얼음 조각이 냄비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온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한 노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그의 말뜻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스트에서 식량을 구하는 일은 나날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수프가 끓기 시작하자 은은한 향기가 주변을 감쌌다.
그때, 한 남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아직 안 나왔나? 누가 좀 가서 확인해 봐.”
이 작은 공동체는 몇몇 고아들과 그들을 돌보는 어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푸른 석탄’을 캐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음식이라도 제공하자는 취지로 모인 이들이었다.
갑자기 시설 구석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어요! 아이가 쓰러졌어요!”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 담요를 가져왔고, 다른 이는 따뜻한 음식을 그릇에 담았다.
쓰러진 소년을 조심스레 불가로 옮기는 동안, 걱정 섞인 목소리들이 오갔다.
“이럴 땐 든든하게 먹여야 할 텐데….”
“요즘 온실 사정도 좋지 않다더라. 온도 유지하는 데 푸른 석탄이 더 많이 들어가고 있대.”
소년의 창백한 얼굴에 수프를 조금씩 먹이자, 천천히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때 한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머리 벌건 녀석이 안 보이는데?”
남자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은 정말 이례적으로 추웠으니까.
“내가 가서 찾아볼게.”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더니, 산호빛 소녀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무너진 건물을 조심조심 기어 올라가서, 폐기된 증기 기관실 앞에 도착했다.
녹슨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차가워야 할 금속이 미지근했다.
문을 열자마자 남자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후끈한 열기가 그를 감쌌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따스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게 대체….”
프로스트에서는 이런 온기를 좀처럼 느낄 수 없었다.
도시는 언제나 차갑고, 삭막했다.
하지만 이곳, 이 버려진 기관실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기관실 안으로 들어선 남자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찾고 있던 산호빛 소녀는 기관실 중앙에 앉아있었지만,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산호빛 소녀의 앞에는 정체불명의 오브젝트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불꽃 같기도 했고, 요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산호빛 소녀의 얼굴에는 남자가 본 적 없는 행복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친구를 만난 것처럼 보였다.
붉은 오브젝트는 소녀의 손길을 즐기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광경이 현실인지, 아니면 프로스트의 혹한이 만들어 낸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저씨?”
그 순간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보세요! 제 새로운 친구예요. 이제 우리 모두 춥지 않을 거예요!”
소녀는 붉은 오브젝트를 손바닥 위에 올린 채, 환하게 웃었다.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황금 사신 대회의장.
나는 마시멜로 위에 앉아,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앙대!’
표결이 끝나고 자신의 안건이 폐기되자, 한 황금 사신이 슬픈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나는 쓰러진 황금 사신의 뱃살을 콕콕 찔렀다.
히히.
나는 말랑말랑한 황금 사신의 뱃살을 즐기며, 계속 진행되는 회의를 구경했다.
황금 사신이 냈던 안건은 건물만 한 거대 푸딩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많은 황금 사신이 흥미로워했지만, 결국 다른 미니 사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어 버렸다.
회의에 참여하는 검은 사신의 숫자가 늘어난 뒤, 대회의에는 실용적인 안건이 자주 올라오는 것 같았다.
미니 사신용 표지판을 제정하기도 했고, 애착 인간과 애착 사신에 대한 법률을 만들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조만간 대회의의 이름이 바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미니 사신 대회의’ 정도가 아닐까?
SDVIMVFoanVzY1YwSVhjamMzUkt1U3pnY1pRaU5OZVlrWGsxQUxDREd6ejVjVHovYm9TOFZNZ2t4R1FjL0o4aA
‘앙대! 내 쿠키가!’
‘앙대!!’
원통한 황금 사신의 의지를 충분히 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희 연구소로 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안뜰로 걸음을 옮기자, 세희 연구소 직원들이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으로 안뜰에 배치된 TV를 보고 있었다.
‘?’
내가 시선을 돌려보자, TV에서는 특별 편성으로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브젝트 뉴스입니다.]
[북극에서 발원한 강력한 눈보라가 한반도를 향해 남하 중입니다.]
TV 화면에서는 마치 하얀 아귀 옆구리살처럼 생긴 눈보라가 천천히 카메라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이번 기상 이변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닌 오브젝트 현상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따라 한국 오브젝트 협의회는 제임스 연구소와 미국 오브젝트 협회에 공조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일부 연구기관에서는 이번 한파의 강도가 일명 ‘도봉구의 얼음 왕좌’로 알려진 오브젝트와 거의 같은 수준이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자세한 대비 요령과 추가적인 정보는 이어지는 뉴스에서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드립니다.]
세희 연구소와 예린이에게 해로운 오브젝트가 다시 나타났다는 뉴스였다.
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사나운 표정으로 TV 화면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