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4
아서는 상실의 감정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잃은 순간을. 장례를 치르던 때를. 비 오는 날 홀로 무덤의 옆을 지키던 때를. 홀로 남게 된 후 왕궁에서 받았던 수많은 멸시를.
극복했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상처들을 되새긴 그는 울적함을 거두어낸 후 입을 열었다.
“우선 전제로 깔아둬야 할 것은 우리가 어설프게 끼어들어봐야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란 점이다.”
부모를 잃었다는 상실의 아픔은 외부인이 어설프게 관여해선 안 된다. 그로부터 십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감정의 잔향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준이라면 더더욱.
“같잖은 동정은 마음의 상처를 키울 뿐이니까.”
스스로가 경험해봤을 때 그러했단 말을 삼킨 아서는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루시의 슬픔을 공유해 줄 수 있는 인물이 저택에 있단 거지.”
“베네딕 알른 변경백.”
“그래. 내 생각하기엔 알른 백이 루시를 위로해주는 게 최선의 해결책일 것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요…”
어미를 끌던 조이는 어제 봤던 베네딕의 표정을 떠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알른 백께서 영애를 살짝 꺼리는 듯 한지라.”
군도에서 막 복귀했을 무렵의 일이다. 루시를 비롯한 일행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은 베네딕은 당연하다는 듯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루시를 마중하기 위해 나왔다.
여기까지는 딸바보인 베네딕이 일상처럼 하던 행동이었지만 정작 루시와 다시금 만났을 때의 태도가 무척 미묘했다.
파파라 부르면서 환히 웃는 루시를 보고는 굳었다가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도주를 택한 것이다.
그 후에도 베네딕은 눈에 띌 정도로 루시를 피했다. 평소 어떻게든 딸의 옆에 붙어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이한 모습이었다.
“영애의 표정이 다양해졌기 때문이겠죠?”
“그럴 거다. 평소의 건방진 표정도 좋아 죽으려 하던 게 알른 백인데 그 녀석의 환한 미소를 어찌 버티겠느냐.”
왕국의 영웅이자 역사에 장식될 기사인 베네딕이 딸 앞에서 얼마나 바보 같아지는지 아는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해야 할 일은 정해졌군. 알른 백에게 루시 알른의 상태를 알려야 한다. 그럼 그를 움직일 수 있을 터.”
“알른 백이라면 영애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식으로 튀어나갈지 알 수 없으니 조언의 내용도 미리 정해둬야겠네요.”
조이와 아서는 베네딕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한 쪽에 앉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멍하니 듣던 프레이는 조용히 고갤 갸웃거렸다.
루시한테 항상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과연 루시가 우울해하는 걸 모를까? 알고 있지만 무슨 이유로 다가가지 못하는 거 아냐?
물론 프레이는 자신의 의문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자기보다 훨씬 더 똑똑한 두 사람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
베네딕은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이러한 날에 죽었으니까.
“미라. 당신이 죽고서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는가 보오.”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아서 멍하니 창밖을 구경하던 베네딕은 바깥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먼저 목소리를 냈다.
“들어오시지요. 어차피 쉬던 중이었습니다.”
느릿하게 열린 문 너머로 들어온 것은 파트란 가문의 영애였다. 딸인 루시가 유달리 아끼는 친구인 것을 알기에 조이를 보는 베네딕의 얼굴엔 부드러움이 깃들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훈련에 참여할 시간인 것으로 압니다만.”
“알른 백께 묻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뭐든 물어보시죠. 저희 딸의 친우이시니 어지간한 건 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영애가 우울해 하는 걸 알고 계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나온 물음에 잠시 굳었던 베네딕은 고심을 이어나가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다고요?”
“예. 알고 있었습니다.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제 귀에 들어오는 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베네딕은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았다.
혹여 루시를 미워하는 사용인 중 하나가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에, 그리고 루시가 아예 엇나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탓에 생긴 버릇이다.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해진 버릇이지만 베네딕은 여전히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알았다. 미라의 기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루시가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왜 루시를 피하시는 건가요?”
“제게는 딸아이를 위로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루시가 슬퍼한다는 이야길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린 베네딕이지만 그는 차마 루시를 위로하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 생각했기에 멀찍이서 고통을 견뎠다.
조이는 베네딕의 말에 의문을 품었지만 쉬이 말을 꺼내기엔 베네딕의 표정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보여서,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영웅이 툭 건드리는 순간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알아차린 것일까. 베네딕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딸아이의 친우 분께는 알려드려야 할 이야기겠죠.”
그리고는 고갤 들어 문 바깥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두 분도 들어오시죠.”
“…알고 계셨습니까.”
“실례합니다.”
아서와 프레이가 조이의 양쪽에 자리 잡은 걸 본 베네딕은 바깥의 시종을 불러 다과를 준비해달라 명한 후 그 반대편에 앉았다.
“자격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왕자님. 딸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아비에게 딸의 슬픔을 위로할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베네딕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냐 묻는다면 그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루시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혈기 넘치던 때도 아니고. 영웅이라 불리며 대접받던 때도 아니고. 아내를 만나 가장 행복하던 때도 아니고. 딸이 스스로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지 못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딸의 버팀목이 되고 싶노라고.
“아내를 잃었을 무렵. 저는 상실의 고통을 견디느라 다른 그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따스한 온기도. 웃음소리도. 부드러운 목소리도.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옆에서 어떤 요리를 준비했는지 설명하며 기대를 내비치고. 맛있다 이야기하면 활짝 웃던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일을 할 때에도. 저택을 돌아다닐 때에도. 바깥에 산책을 나설 때도. 마차를 타고 여행을 떠날 때에도. 항상 있었던 사람이. 언제나 머무를 것 같았던 사람이 이젠 없다.
삶의 모든 것을 채우던 사람의 상실은 베네딕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루시를 외면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딸아이를 보면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서. 자꾸만 눈물이 나서. 아내의 곁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딸을 곁에 둘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루시는 마음을 닫아버린 지 오래였죠. 당연한 일입니다. 이 쓰레기 같은 아비가 저를 먼저 버렸는데 어찌 마음을 열겠습니까.”
베네딕은 스스로의 죄를 이해했다. 그렇기에 평생을 죄인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딸을 사랑하며 딸아이가 자신을 용서해주길 비는 것 뿐이라 믿었기에 그렇게 행동했다.
“사람이란 것이 참으로 영악한 것이 말입니다.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죄책감도 서서히 무뎌지더군요.”
아내가 죽었던 날에 갇혀 세상을 향해 저주를 쏟아내던 아이가 홀로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금 발을 내딛기 시작했을 때.
멍청했던 베네딕은 아이의 변화에 올곧은 기쁨을 드러냈다.
자신의 죄를 잊고 딸아이와 함께 행복해지는 날을 상상했다.
예전의 행복했던 풍경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원했다.
염치도 모르고.
“헌데 꿈꿨던 광경이 이루어진 순간 과거의 추억과 함께 제가 저질렀던 모든 죄가 떠오르더군요.”
군도에서 돌아온 루시는 애써 짓는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먼 옛날 아내가 살아있을 때처럼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본 베네딕은 기쁨보다 더 큰 죄악감을 느꼈다.
과거의 정경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죄를 떠올렸기에.
아이를 버렸던 자신의 죄에 어느 순간 변명을 더하고 있음을 깨달았기에.
“여태 루시를 피한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지금의 루시를 보면 진심으로 기뻐하게 될 것 같으니까요.”
저는 행복해져선 안 될 사람입니다. 평생토록 죄를 끌어 안고 아파해야 할 인간입니다.
베네딕이 웃음을 짓는 법을 잊어버렸을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집사가 다과를 내려주고 다시금 바깥으로 나간 후 베네딕은 찻잔 가운데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루시를 위로할 자격이 없습니다. 루시에게 용서받을 자격도 없지요.”
그러니 자신은 루시의 슬픔을 달래줘선 안 된단 베네딕에 말에 아서와 조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모든 말들은 베네딕의 죄책감 앞에서 무력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루시네 아빠.”
허나 한 사람은 달랐다. 다른 이들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 프레이는 아서와 조이의 다급한 눈짓을 알면서도 당당히 말을 이었다.
“그건 루시 아빠가 정할 게 아니라 루시가 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예?”
“나쁜 사람의 벌은 나쁜 사람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닌 걸. 그런 게 가능했으면 내가 루시나 왕자님한테 혼날 일도 없었을 거야.”
“이봐! 프레이!”
“그러니까. 음. 음. 음.”
아서의 외침을 무시한 채 말을 고르던 프레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어. 좋은 말을 하기엔 난 너무 바보야.”
“아니 도대체 넌 왜 갑자기 난리를.”
그리곤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방 바깥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갑작스런 기행에 놀란 세 사람이 굳어 있는 동안 온갖 소란을 일으키며 어딘가에 다녀 온 프레이는 베네딕의 앞에 수정 구슬 하나를 내려놨다.
“켄트 영애. 이건?”
“연락용 구슬.”
“어디와 연결된 것입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어른스러운 사람.”
프레이는 그리 이야기하며 수정구 안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몇 번 일렁이다가 멈추더니 수정구 위에 한 사람의 형상이 떠올랐다.
– 영애님. 무슨. 어머나. 알른 백.
“성녀님?”
– 예. 페이비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것은 지금 교회의 성지에서 바쁜 일정을 수행하고 있을 성녀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