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뒤덮은 잿빛 구름이 세상을 짓눌렀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로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그 한기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체의 존재를 거부하는 듯한 냉기였다.
그때.
쿵. 쿵. 쿵.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대지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거대한 기계 병사들이 눈보라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기온은 더욱 떨어져서, 공기 중의 수분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거대한 기계 병사들의 행진이었지만, 인류는 이들의 행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을 자욱하게 가리는 구름.
제대로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추위.
통신을 막는 푸른 번개.
이 세 가지 때문이었다.
이 기계 병사들의 공격 방향은 두 곳.
선발대인 초전도-개구리가 죽어버린 곳.
그리고 기계 병사에게 치명적인 열기를 뿜어내는 ‘무언가’가 있는 곳.
전자는 초전도 황제 개구리가 향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곳은 초전도-개구리가 기계 병사를 이끌고 가고 있었다.
초전도-개구리에게 주어진 미션은 간단했다.
<열원을 회수하고 끊임없이 진격하라.>
초전도-개구리가 이끄는 기계 군단의 행렬 끝에는 텅 빈 얼음 왕좌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한 자리처럼 텅 비어있는 왕좌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왕좌 밑에 초전도-개구리를 위한 조그만 의자가 붙어있었다.
초전도-개구리는 저 멀리 보이는 설원 한복판의 검은 도시를 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공격하라!]
[그리고 열원을 찾아라!]
초전도-개구리는 몸에서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며 도시, 프로스트를 노려보았다.
***
눈으로 가득한 공터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자, 공터는 금세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드럼통에 불을 땐 뒤, 그 위에 커다란 냄비를 올려 끓이는 수프.
심각한 표정의 어른들 사이에서 수프를 먹는 산호빛 소녀.
따뜻한 드럼통 근처로 모여드는 사람들.
붉은 사신은 인간들의 무리 속에 있는 애착 인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의지도 안 들려….’
붉은 사신이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미니 사신 네트워크는 침묵 중이었다.
평소에는 정말 시끄러워서 일부러 무시했는데, 지금은 그 소란스러움이 조금 그립기도 했다.
‘여기 인간 많아!’
‘커다란 빌딩!’
‘이거 맛있어!’
‘이거?’
‘우리보다 큰 풍뎅이가 있어!’
‘정말?’
‘와, 무지 커!’
‘별로 그립지는 않네….’
그때를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시끄러운 기분이라, 그리운 기분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붉은 사신은 네트워크가 막힌 점이나 차가운 눈보라 같은 것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 않았다.
‘엄마를 불러야겠어.’
만약 지금 사태가 별일이 아니라면 그걸 핑계로 엄마가 온갖 기상천외한 장난을 치겠지만, 붉은 사신은 애착 인간을 위해서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붉은 사신은 불꽃으로 나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붉은 사신의 손바닥을 두 개 합친 정도 크기에 불과한 조그마한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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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있는 미니 사신에게 닿기를.’
붉은 사신의 염원이 깃들자, 불꽃 나비는 남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올랐다.
붉은 사신은 날개를 팔랑팔랑 흔들며 날아가는 불꽃 나비를 바라보다가, 애착 인간에게로 돌아갔다.
산호빛 소녀는 수프를 천천히 먹고 있다가, 붉은 사신이 돌아오는 걸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붉은 사신도 마주 웃으며 산호빛 소녀의 볼에 달라붙었다.
“먹어볼래?”
산호빛 소녀가 멀건 수프 국물을 살짝 떠서 내밀었지만, 붉은 사신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척 보기에도 식량이 부족해 보이는 환경.
게다가 이런 추위에서는 든든히 먹어야 하니, 붉은 사신은 소녀의 음식을 차마 먹을 수 없었다.
사실 ‘애착 인간’이 주는 음식을 엄청나게 먹고 싶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정말 맛있는 미니 사신 정원 간식을 같이 먹자.’
붉은 사신은 산호빛 소녀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선전부가 안 보여.”
“노동 시작 알림도 없잖아?”
“어떻게 된 거지?”
증기탑이 심상치 않았기에 방송을 기다리며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른들은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점점 더 불안한 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삐이익!
그 순간,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그리고 스피커에서 어딘가 힘이 빠진 듯한 의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재 우리 도시의 생명줄인 증기탑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도시의 난방 시스템이 곧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모든 시민은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가능한 한 빨리 중앙에 위치한 증기탑 광장으로 집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동 시 따뜻한 옷과 담요, 그리고 비상식량을 챙겨오시기를 바랍니다.]
[노약자와 어린이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서로 협력하여 안전하게 이동해 주십시오.]
[이것은 긴급 상황입니다. 우리 도시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행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추가적인 지시 사항은 증기탑 광장에 도착하신 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방송이 끝나자, 붉은 사신은 인간들 사이에서 당혹과 공포 같은 감정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떡하지? 도시가 위험하대.”
붉은 사신은 불안해 보이는 애착 인간에게 웃어주며, 마음속으로 작은 소원을 빌었다.
‘불꽃 나비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기를….’
***
뚜방뚜방.
아귀 의자에서 쉬다 보니 조금 지루해져서, 나는 세희 연구소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연구원 휴게실 앞을 지나가는 순간, 신기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한 휴게실.
이용자가 너무 많아서 새로이 개장한 세희 연구소의 휴게실은 워낙 넓어서 언제나 한산한 느낌을 주곤 했는데, 지금은 연구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구석에 설치된 작은 기계 때문으로 보였다.
이름을 붙이자면 미니 버블티 자판기쯤이 될까?
미니 사신이 다가가서 조그마한 손바닥을 대면 캡슐 형태의 버블티가 튀어나오는 구조였다.
도대체 누가 만든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더니, 웅성거리는 소리 중에서 관련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갑자기 생겼네. 누가 만든 거래?”
“누가 미니 사신용 버블티를 만든 걸 보고, 소장님이 설치한 거라던데?”
휴게실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이 수상한 자판기는 역시 세희가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 자판기는 미니 사신들에게 대인기를 끌고 있었다.
인간이 버블티를 먹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미니 사신들은 간간이 보긴 했었는데, 이렇게나 많았다니.
어찌나 버블티가 인기 있는지, 휴게실 바닥에는 마치 도미노처럼 미니 사신들의 줄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다.
몰래 다가가서 ‘톡’하고 밀어 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도미노였다.
그리고 그 행렬 주변으로 연구원들이 잔뜩 몰려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뚜방뚜방.
맨 앞줄에 선 황금 사신이 조그마한 손바닥을 기계에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찰칵’ 소리와 함께 작지만, 미니 사신에게 꽤 커다란 캡슐이 튀어나왔다.
황금 사신은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캡슐을 머리 위로 들고는 자기 애착 인간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버블티 캡슐을 애착 인간이 들고 있는 커다란 버블티 잔에 건배하듯이 부딪쳤다.
‘짠!’
황금 사신은 인간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는지, 건배를 따라 하며 히히 웃었다.
그리고 황금 사신은 드디어 먹게 된 버블티를 빨아 먹으며 행복한 감정을 마구 뿜어내었다.
‘갑자기 버블티가 맛있어 보이네.’
나도 한 잔 먹어보려고 다가서는 순간, 황금 사신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치기하지 말라는 건 줄 알았는데, 들려오는 의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엄마 큰일이야!’
‘엄청나게 큰 댖지 개구리!’
‘댖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장벽 쪽에 뭔가가 나타난 것 같았다.
‘앙대!’
나는 ‘엄마보다 댖지야. 히히.’라고 한 황금 사신을 댖지로 만들어 버린 뒤, 서둘러서 장벽 쪽으로 이동했다.
‘….’
장벽 위에 올라서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더 추워졌네.’
그리고 냉기가 불어오는 북쪽을 바라보자, 여전히 설원은 마치 순백의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점은 하나.
그 하얀 세상의 끝자락에서, 거대한 얼음 왕좌가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그 형태는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형태와 크기의 얼음 왕좌였다.
왕좌 위에는 왕관을 쓴 거대한 개구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 개구리를 보는 순간, 황금 사신들이 왜 그렇게 댖지댖지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통통하네.
저 개구리의 생김새는 사막 비 개구리와 정말 닮아 보였다.
크기는 전혀 안 닮았지만.
그리고 그 주변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갑주를 입은 기계 병사들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쿵. 쿵. 쿵.
그들의 행진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어찌나 숫자가 많은지, 묵직한 진동이 장벽 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 도봉구의 얼음 왕좌!’
그 기계 거인들을 보고 있었더니, 얼음 왕좌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초전도-개구리 친척이면 별거 아니겠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린 뒤, 거대 개구리를 향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뀩.’
하지만 내 생각처럼 공간은 우그러들지 않았다.
마치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처럼 도저히 움켜쥘 수가 없었으니까.
깜짝 놀라서 개구리를 바라보자, 개구리 머리 위에 얹어진 왕관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이상하게 생긴 왕관이 헤일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