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묵직한 진동과 함께 부스스 떨어지는 먼지들.
진동이 퍼지는 순간 셸터 내부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순간 멎었다가, 불안함이 담긴 목소리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산호빛 소녀는 불안하게 깜박거리는 전등을 올려다보며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발… 괜찮기를….’
돌과 얼음이 마구 튀는 전장을 피해서 셸터에 들어오기 직전에 보았던 장면이 불안함을 부추겼다.
증기탑이 부활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기계 거인들과 사나운 표정으로 거인들을 요격하러 나선 붉은 사신.
처음에는 기계 거인들을 손쉽게 물리칠 것만 같았다.
붉은 사신이 내뿜는 불길은 기계 거인을 순식간에 녹여버렸으니까.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도시를 포위한 전부를.
그 순간, 산호빛 소녀를 포함해서 프로스트에 사는 시민들은 모두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
하지만 탄성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기계 거인들은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순식간에 재생해 버렸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붉은 사신과 기계 거인들의 전투.
돌과 얼음이 튀고, 건물들이 마구마구 넘어지는 위험천만한 전장.
의장의 인도에 따라 증기탑 광장에 마련된 셸터에 들어갈 때까지, 산호빛 소녀는 붉은 사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힘내…!’
점점 지쳐가는 붉은 사신과 멀쩡해 보이는 기계 거인들의 모습 때문인지, 산호빛 소녀는 불안을 도무지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
붉은색 화염이 뿜어져 나와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기계 거인들을 잔뜩 녹여버렸다.
바닥에서는 지뢰처럼 불꽃이 솟아올라 기계 거인들을 녹여버렸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걸린 불꽃 거미줄에 닿은 기계 거인들은 조각조각 나서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녹아내리고 부서지고 토막 난 거인들은 마치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순식간에 재생해서 다시 전진했다.
거인들은 한결같이 인간들이 숨어든 지하 시설을 향하고 있었다.
‘안 돼….’
붉은 사신은 그 모습을 보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조그마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자, 그 반대편이 보일 정도로 흐릿해진 상태였다.
‘장작이 모자라….’
붉은 사신은 다른 미니 사신들보다 의식적으로 장작 사용을 훈련해 와서 장작 효율이 좋은 편이었지만, 적은 너무 많았고 무한히 재생하고 있어서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붉은 사신은 산호빛 소녀를 안전한 곳에 보내주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붉은 사신은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붙잡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쉬는 것처럼 헐떡였다.
하아. 하아.
더 이상 호흡을 할 수 없는 몸인데도, 습관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더니, 왼손을 뽑아버렸다.
‘으으읏.’
그러자 축 늘어진 왼손은 빨갛게 타는 거대한 불꽃의 구체가 되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장작이 없으니까, 붉은 사신은 이제 몸을 연료로 해서 장작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전부 타버려라!’
붉은 사신이 이를 악물고 의지를 뿜어내자, 조그마한 간이 태양에서 수많은 불꽃이 튀어 나가 기계 거인들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재생해도, 재생해도, 재생해도, 계속.
하지만 불꽃을 쏘아 보낼 때마다 점점 작아지던 가짜 태양은 결국, 모든 힘을 소진하고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계 거인들.
‘그렇다면…!’
그 모습을 본 붉은 사신이 양다리를 잘라버릴 각오를 하는 순간.
하늘이 뒤틀리고 소용돌이가 지면으로 뻗어져 내려오는 것처럼, 구름이 내려오더니 거인을 강타했다.
구름의 강타는 지면을 천둥처럼 울리고, 거인들을 쓰러트릴 정도로 묵직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구름 고기들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생!’
‘이제 괜찮아!’
‘우리가 왔어!’
활기로 가득한 익숙한 의지.
구름 고기들 사이에서 미니 사신들이 잔뜩 튀어나와서 거인들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황금 사신 모양 구멍이 마구 뚫리거나, 그림자가 칼날로 변해 잘라버리거나, 내부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며 갈아버리거나.
각각 황금 사신, 보라 사신, 검은 사신이었다.
물론 엄마가 소환한 것처럼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미니 사신은 장작이 부족하니까 멀리서 ‘빠른 속도’로 올 수는 없었고, 구름 고기를 타고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미니 사신이 많지는 않았으니까.
‘동생 다쳤어!’
‘동생 아파!’
몇몇 황금 사신들은 붉은 사신 곁으로 떨어져 내려, 걱정스러운 얼굴로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유독 통통한 볼을 붉은 사신의 볼에 문대기 시작했다.
말랑 볼 비비기가 이루어지자, 황금 사신의 장작 일부가 붉은 사신에게 스며들었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볼을 잔뜩 비비자 사라졌던 팔이 되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아물고 장작이 새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재생되었다.
‘이제 괜찮아!’
황금 사신은 그렇게 의지를 보내며 히히 웃었다.
그리고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의지를 내뱉었다.
‘돌격!’
그렇게 미니 사신과 기계 거인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내가 만든 거대한 장벽 너머, 황제 개구리와의 전장.
미니 사신들과 기계 거인들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었고, 황제 개구리는 얼음으로 만든 칼날을 휘두르며 날아들었다.
날아드는 황제 개구리를 바라보며, 나는 하얀 아귀 위에 앉아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그만 좀 죽어라.’
그리고 공간을 강하게 움켜쥐고 양손을 휘둘렀다.
장작을 충분히 실은 공간 절단.
거기다가 공간의 헤일로에 담긴 힘까지 실린 공간 절단.
공간은 손으로 뜯어낸 것처럼 거칠게 찢어졌고, 그 너머로 공허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몇 번이고 재현된 순간이 다시 한번 더 벌어졌다.
황제 개구리는 공간을 얼려서 막아내려고 했지만, 헤일로의 힘에는 버티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져서 공허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끄아악!]
황제 개구리의 고통에 찬 신음.
하지만 황제 개구리의 왕관만큼은 독립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고고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관 위로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 갈라진 공간이 순식간에 봉합되었다.
마치 스테이플러로 종이를 억지로 이어 붙인 것처럼, 얼음 말뚝이 공간에 박혀 공간을 강제로 이어 붙인 것이다.
갈기갈기 찢어진 황제 개구리도 다시 붙더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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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시네.’
나는 짜증을 담아, 내 의자로 변한 하얀 아귀를 거칠게 뜯어먹었다.
뀨힝힝.
황제 개구리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존재였다.
황제 개구리의 파괴 조건이 꽤 난해해서 시간 좀 걸릴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슨 공격을 가하든, 저 왕관이 공격을 무효화하고 있었다.
공간을 자르면, 조금 전처럼 얼음 말뚝이 이어 붙였다.
능력 무효화의 하얀 불길은 이상하게 저 헤일로에게 달라붙지 못했다.
환상이나 언령의 헤일로는 장작이 아까워서 쓰지 않았다.
완전 회피의 헤일로는 황제 개구리의 공격이 위협적이지 않아서 필요 없었다.
미니 사신 정원으로 공간을 지배하려고 해도, 왕관의 공간 침식이 막아섰다.
공간에 서리가 내리고 미니 사신들을 꽁꽁 얼려버리는 성가신 공간 침식.
저 왕관이 외신과의 통로인 건지, 아니면 저 왕관이 외신급인 건지, 침식 하나는 정말 강력했다.
다행인 점은 나의 승리가 확정적인 것 정도였다.
저 개구리는 뭔가 무리를 하는 건지, 왕관을 사용할 때마다 나의 몇 배는 소비가 심했으니까.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릴 테니, 나도 장기전을 대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명 ‘폭신폭신한 하얀 아귀 위에 앉아서 싸우기!’였다.
‘아무래도 개구리가 말라죽으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게다가 ‘옥’으로 된 거대 옥 개구리라서 그런지, 시간을 끌면 더욱더 성가신 외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저 왕관이 어쩌면 보라 외신의 ‘닻’ 같은 걸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황금 사신을 불러서 의지를 전달했다.
‘모든 미니 사신에게 전해.’
‘기계로 만들어진 심장, 이라고 하면 이해를 못 하려나….’
‘아무튼 금속으로 된 강력한 오브젝트를 발견하면 알려줘.’
내가 그렇게 의지를 전달하자, 황금 사신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지를 쉴 새 없이 내뿜으며 서울 쪽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가 도와달래!’
‘큰일이야!’
미니 사신 네트워크에 닿을 때까지, 계속.
***
구름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전황이 뒤집혀 버렸다.
‘앙대!’
온몸에 위협적으로 빛나는 냉기를 두른 기계 거인의 일격에 황금 사신이 날아가 버렸다.
장작을 모두 소비한 황금 사신은 점점 흐릿해지더니, 황금색 불씨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미안해….’
마지막 황금 사신은 슬픈 표정으로 붉은 사신을 바라보며, 미니 사신 발할라로 사라져 버렸다.
물론 붉은 사신도 정상이 아니었다.
필요할 때마다 뜯어낸 몸은 쥐가 파먹은 것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고, 과도하게 장작을 소비한 몸은 흐릿하게 반대편이 비쳐 보였다.
‘큰일이야.’
너덜너덜한 붉은 사신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흐릿한 구름 사이로 알록달록한 밤하늘이 얼핏 보였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죽은 날에 봤던 하늘과 닮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라 사신들이 모여서 그림자로 거대한 바람개비를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수의 미니 사신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깨닫자마자, 똑똑한 보라 사신들은 바람개비부터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버틸 수 있을까?’
붉은 사신은 어두운 표정을 억지로 고치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마구 저었다.
‘아니, 버틸 수 있어!’
흐릿한 붉은 사신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사신은 온 힘을 다해 기계 거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날아오르며, 남은 힘을 모아 불꽃을 뿜어냈다.
‘으아아아!’
붉은 사신의 들리지 않는 함성과 함께, 거대한 화염이 기계 거인들을 덮쳤다.
얼음으로 뒤덮인 몸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지만, 거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한 기계 거인이 얼음 창을 만들어 붉은 사신을 향해 날렸다.
붉은 사신은 간신히 피했지만, 그 순간 다른 거인의 주먹이 날아와 정통으로 맞았다.
남아있던 오른손마저 뜯겨 날아가며, 붉은 사신은 하얀 눈밭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안 돼….’
셸터를 향해, 바람개비를 향해 다가가는 거인들을 바라보며 비틀비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붉은 사신 몸에 남아있는 한줄기 장작이 사라질 것처럼 흔들렸다.
‘안 돼!!’
붉은 사신은 다시 한번 날아올라, 거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죽어도 괜찮아.’
지금, 이 순간 붉은 사신은 미니 사신들의 이해할 수 없는 점 하나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영원히 죽어도 괜찮아.’
숨만 쉬어도 행복한 미니 사신의 영원한 삶보다 더욱 소중한 애착 인간이라는 존재를.
‘영원히 죽어도 괜찮아!!’
붉은 사신의 전신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불이 붙은 통나무처럼 활활.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막 연료를 태우며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붉은 사신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몸에 난 구멍들이 더욱 커졌고, 불꽃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렇게 붉은 혜성처럼 다시 한번 돌진하는 순간, 기계 거인의 얼음 창이 붉은 사신을 내리쳤다.
‘아….’
붉은 사신의 눈에서 마지막 불꽃이 스러지고, 몸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사신은 그렇게 떨어지며, 셸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인간….’
기계 거인들이 셸터와 바람개비를 부수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해….’
천천히 불티로 변해 흩어지는 붉은 사신.
그렇게 튕겨 나간 마지막 남은 육신이 어떤 기계 거인이 들고 있던 고철 덩어리에 닿는 순간, 불꽃으로 변하며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
끝없는 어둠.
그 속에서 붉은 사신은 눈을 떴다.
발할라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죽기 직전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온몸은 너덜너덜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해 버렸다.
‘싫어.’
하지만 포기하기 싫었다.
죽기 직전이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돌아갈 거야.’
‘애착 인간에게로.’
‘포기하지 않아!’
양손이 모두 잘린 붉은 사신은 눈을 질끈 감고 이마로 검은 공허를 내리쳤다.
쾅. 쾅. 쾅.
그리고 그때, 작은 맥동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붉은 사신이 다시 눈을 뜨자, 거대한 심장이 공허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기계 심장.
그것을 직시하는 순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고 있던 몸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으읏.’
화르륵.
그리고 사방으로 불길이 퍼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붉은 사신은 자기 가슴 속에서 이질적으로 타오르는 심장을 느끼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