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설원 위에 거대한 기계 거인이 서 있었다.
거인의 금속 손아귀에는 엉망으로 찌그러진 고철 덩어리가 꽉 쥐어진 상태였다.
그것은 불과 몇 초 전, 붉은 사신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던 황동색 고철 덩어리였다.
끼이이익.
갑자기 설원에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물이 끓는 주전자에서 내는 증기 소리 같기도 했고, 쇠가 긁히는 소리 같기도 한 묘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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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거인의 손아귀 속 고철이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더니, 점점 더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광로에서 흘러나오는 쇳물처럼 붉게 빛나는 고철 덩어리가 녹아내리자, 헐거워진 틈새로 불꽃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한 줄기였다.
그러다가 두 줄기가 되고, 이내 세 줄기로 불어났다.
고철이 녹아내릴수록 불길은 더욱 거세져 갔다.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
그리고 고철 덩어리가 제대로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불길이 강해지자, 고철 덩어리는 순식간에 폭발해 버리고 주변에 강렬한 열기를 흩뿌렸다.
그 열기에 고철 덩어리를 들고 있던 기계 거인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기계 거인이 쇳물이 되어 녹아버린 자리에 붉은 불꽃들이 춤을 추듯 날아다녔다.
순백의 설원 위에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붉은 흔적들.
그리고 그 붉은 잉크가 한 점에 모여들더니, 사람 형상을 이루었다.
고철이 있던 자리에 붉은 사신이 둥실둥실 떠올라 있었다.
붉은 사신의 등 뒤에는 태양 같은 불꽃이 넘실거렸고, 노랗게 타오르는 눈동자에는 강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살아났어….’
붉은 태양 사신은 새롭게 태어난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타오르는 것 같은 머리카락과 몸.
급격한 격의 상승.
가슴 속에서 맥동하는 기계 심장.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장작.
여러 가지 변화와 문제가 있었지만, 붉은 태양 사신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애착 인간뿐이었다.
붉은 태양 사신은 하늘 높이 날아오른 뒤, 허공에 거대한 불덩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그녀의 몸처럼 위협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어리, 가짜 태양이었다.
태양처럼 보이는 불덩어리가 완성되자, 붉은 태양 사신은 눈을 감고 양손을 하늘로 향했다.
그 순간, 거대한 불덩어리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와 기계 거인들을 녹이기 시작했다.
가짜 태양에 가까운 기계 거인부터 차례차례.
기계 거인들은 온열기 앞의 아이스크림처럼 빠르게 녹아내렸다.
마치 기계 거인들만을 노리는 열기처럼 주변의 눈은 거의 녹지 않고 거인들만 녹았다.
그와 동시에 설원의 온도도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설원의 눈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눈에 계속 가려져 있던 지면이 드러났다.
온도가 높아질수록 기계 거인들의 재생 속도가 느려지고, 재생을 마친 모습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짜 태양에 의해 기온이 어느 선을 넘어가자, 재생하지 않는 기계 거인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안 돼…!]
그리고 높아진 온도로 초전도성을 잃어버린 초전도-개구리의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모든 기계 거인이 재생을 멈췄다.
숨어있던 초전도-개구리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와 동시에 웅장한 모습을 뽐내던 얼음 왕좌도 녹아내렸다.
‘이겼어!’
역할을 다한 가짜 태양을 없애버린 붉은 태양 사신은 지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셸터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장작을 거의 한계까지 사용해서 그런지, 타오르는 것 같던 붉은 태양 사신의 몸은 더 이상 밝게 빛나지 못하고 잔불만이 남아있었다.
그 순간.
쿵. 쿵. 쿵.
저 멀리 설원에서부터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평선을 가득 메운 기계 거인의 대군.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얼음 왕좌.
절망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안 돼….’
붉은 태양 사신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토록 끈질겼던 기계 거인의 군대가 겨우 선발대였다니….
그 순간, 주저앉은 붉은 태양 사신의 곁으로 보라 안대 사신과 보라 사신 다섯이 그림자 망토를 두르고 떨어져 내렸다.
붉은 태양 사신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로 만들어진 바람개비가 완성되어 있었다.
번쩍.
검게 물든 바람개비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자, 미니 사신 정원에서 붉은 사신을 도와주기 위해 기다리던 수많은 미니 사신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생!’
‘도와주러 왔어!’
‘앗! 누가 깨물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금빛 섬광이 도시의 하늘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그 빛의 근원은 황금 사신 제1 검이 들고 있는 황금색 무형 검이었다.
제1 검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도시의 지면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계 거인들을 바라보며, 검을 가로로 들어 올렸다.
황금빛 검이 허공을 갈랐다.
간결하고 평범한 속도로 자연스럽게.
그러자 지평선까지 보이는 모든 공간이 예리하게 잘린 것처럼 툭 하고 어긋나더니,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 한 번의 동작으로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기계 거인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그렇게 제1 검의 개량형 공허 베기가 기계 거인들을 토막 내는 것을 시작으로 미니 사신들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돌격!’
‘나쁜 오브젝트!’
붉은 태양 사신은 그 모습을 보며, 안심한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
하늘을 가를 기세로 높이 솟아오른 장벽 위.
까마득한 장벽 너머, 미니 사신의 대군과 기계 거인들이 맞붙고 있었다.
무한한 재생과 무한한 부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지지부진한 싸움.
기계 거인들은 지평선 너머에서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미니 사신들은 검은 사신 발리스타로 쏘아져서 전장에 빠르게 합류하고 있었다.
그 전장의 옆에는 거대한 황제 개구리가 양손에 얼음 칼날을 든 채,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렇게 날아든 황제 개구리는 내 공간 절단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토막 나버렸다.
‘….’
황제 개구리는 거듭된 왕관 발동으로 존재감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조금만 더 토막 내면 물리칠 수 있었지만, 내 미간에는 조그맣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불안해.’
이대로 시간을 보내면 큰 고생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외신과 연관이 있어 보이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해진 걸까?
나는 괜히 짜증이 나서, 하얀 아귀에 앉아 양발을 파닥파닥 흔들었다.
그리고 장벽 위에서 뚜방뚜방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 하나를 붙잡아서, 검은 사신 발리스타로 황제 개구리를 향해 쏘아 보냈다.
‘앙대!’
조준이 조금 잘못됐는지, 황금 사신은 구름을 뚫고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히히.
황금 사신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조금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
하지만 그렇게 속으로 웃기가 무섭게,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금 사신이 구름을 뚫어버린 틈으로 굉장히 불길한 것이 보였으니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구름과 알록달록한 하늘.
그리고 그 색채 우주 너머에서 지구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는 외신.
구름의 틈은 순식간에 메워졌지만, 내 눈은 그것을 똑똑히 발견해 버렸다.
그것은 허공에 무수한 숫자의 개구리의 머리가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개구리의 머리를 정이십면체 거울 속에 넣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다가오는 외신에게 이름을 붙이자면 만화경 개구리 정도겠지.
‘역시 저 왕관은 외신을 불러들이는 닻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어.’
황금 사신들이 ‘기계로 만들어진 심장’을 제시간에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음….’
그렇게 내 미간의 작은 주름이 더 깊어진 순간, 내 발목을 누군가 붙잡고 있었다.
‘지금은 바쁘니까, 장난치면 안 돼.’
황금 사신이 또 장난치는 것 같아서, 나는 발을 마구 흔들어서 떼어내려고 했다.
‘허그으.’
그러자 파닥파닥 움직이는 발목에서 독특한 의지가 들려왔다.
발목에 매달려 어지러워하는 ‘허그 사신’의 의지였다.
‘아!’
그리고 허그 사신을 발견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잊힌 헤일로가 하나 떠올랐다.
융합의 헤일로!
***
외신의 강림이 멀지 않은지, 황제 개구리의 모습이 가끔 거울에 비친 것처럼 보였다.
주로 하반신이 사라지고, 머리가 두 개가 되는 느낌으로 거울상이 만들어지곤 했다.
‘큰일이네.’
나는 파괴 조건을 바라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기계로 만들어진 심장의 증기로 헤일로를 녹인다.>
파괴 조건은 유일하진 않다.
인간의 심장이 터지면 죽는다고 쓰여 있더라도, 목을 자르면 죽는 것처럼.
그렇다고 하더라도 ‘눈’은 가장 쉬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기계로 만들어진 심장’을 가지고 있는 미니 사신이 어딘가에 있는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젠 마냥 황금 사신을 기다리기엔 조금 불안했다.
황제 개구리는 이제 머리가 3개에 팔이 6개 달린 수리검 개구리가 되어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아직 나에겐 황금 사신이 오기 전에 시도해 볼 만한 헤일로가 하나 있었다.
‘증기니까, 열. 그러면 붉은 사신을 융합하면 되겠지.’
내가 붉은 사신을 최대한 불러들이자, 붉은 사신들이 장벽 위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혁명!’
마냥 행복한 붉은 사신 첫째.
“여기는?”
당황한 목소리를 흘리는, 나보다 큰 ‘빅 붉은 사신’.
그리고 어딘가 클론처럼 닮은 붉은 사신들.
나는 붉은 사신들을 바라보며, 머리 위에 융합의 헤일로를 썼다.
‘모두 모여!’
내가 의지를 내뿜자, 붉은 사신들은 금발 소녀를 중심으로 잔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을 한계까지 장작을 담아 융합해 버렸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거대한 붉은 구체.
손바닥만 한 붉은 사신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구체였다.
쿠웅.
그리고 붉은 구체가 깨어지며,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불길과 함께 융합 붉은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작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그런지, 노란색으로 타오르는 거대한 붉은 사신이었다.
‘혁명!’
중심을 이루는 붉은 사신이 ‘첫째’인 건지, 붉은 사신은 해맑은 의지를 뿜어냈다.
‘!’
그와 동시에 내 눈에 비치는 황제 개구리의 파괴 조건이 변화했다.
<헤일로를 녹인다.>
앞부분의 글씨가 녹아내리더니, 뒷부분만 남아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