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8
몸으로 직접 체감하게 된 베네딕은 눈으로 본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주먹 한 방 한 방이 내 방어를 무너트릴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초인의 육신이라는 스킬을 얻어서 비교적 스펙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종 베네딕에게 압박을 당하다가 바닥에 널부러졌다.
베네딕을 도발할 틈 따위는 없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어찌 입술을 나불거리겠는가.
그렇게 내가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탈진해버린 후 프레이와 아서가 베네딕의 앞으로 나섰다. 베네딕의 강함을 몸으로 체험해보고 싶다면서.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두 사람이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의심했다. 방금 전에 내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눈으로 봐놓고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알른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다가 피학성향에 눈을 뜬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지.
베네딕은 두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이들에게라면 얼마든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
“한 분 한 분 상대해 드려봐야 많은 것을 알려드릴 수 없을 테니 세 분이서 함께 덤비시죠.”
“…네? 알른 백. 저는 딱히 대련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알겠습니다. 알른 백.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 번이라도 닿고 말 거야.”
“아니 그러니까 전 대련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니까요?!”
“하하. 좋습니다. 덤벼보십쇼. 그 의기가 끝까지 이어지길 바랍니다.”
“저기요?! 제 목소리가 아예 안 들리시는 건가요오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 사람은 베네딕에게 박살이 나버렸다.
나조차도 버틸 수 없는 공격을 다른 셋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중간에 자칼이 합류해서 셋이 넷으로 변하고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내가 끼어들어 다섯이 되었음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베네딕은 압도적이었고 우리들은 시종 베네딕에게 가지고 놀아졌지.
그럼에도 우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죽어라고 베네딕에게 달려들었다.
육체적 정신적 한계와 압도적인 무력이 선사하는 절망 속에 기꺼이 몸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베네딕과의 대련이 많은 도움을 줬으니까.
현 대륙 최강 수준의 강자가 친히 몸을 움직이며 여러 가지를 알려준단 것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아침에는 체력단련을 하고, 점심에는 베네딕과의 대련, 그 후 잠들기 전까지 다시금 기사단에서의 훈련을 거듭하길 며칠.
영지를 뒤덮던 눈보라는 차츰차츰 기세를 줄여나갔고 결국 먹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미라. 베네딕이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여인이자 루시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 죽은 날을 기리듯이.
“허접 에린. 오늘은 이걸로 묶어줘.”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인벤토리에서 변태 사도가 준 장신구를 꺼냈다. 에린은 내 손 위에 들린 장신구를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가씨. 이것은 도대체?”
“변태 사도가 자신의 징그러운 취향을 잔뜩 담은 물건이야.”
“…네?”
내 설명을 들은 에린은 혼란스러운 듯 눈을 껌뻑였지만 난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변태 사도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더라도 저 혼란을 한층 더 키울 뿐임을 알았으니까.
에린은 내가 입을 꾹 다문 걸 확인하고는 그 이상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너무도 귀중해 보이는 장신구가 부담스러운 듯 조심스레 다룰 뿐.
“죄송합니다. 아가씨. 장신구의 대단함에 비해 제 실력이 모자란지라.”
한참 동안이나 고심하며 머리 모양을 만들어낸 에린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장신구에 비해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 이 대단함을 완벽히 다룰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나로서는 에린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변태 사도가 만들었던 머리모양이나 지금 모양이나 별 다를 게 없어보였으니까.
“이 장신구를 만들어낸 분께 배움을 청하고 싶네요. 필시 어마어마한 예술가시겠죠.”
에린의 고뇌를 거울 너머로 보던 나는 변태사도랑 에린을 한 번 만나게 해줄까하는 고민을 했다.
그 녀석이 썩을 변태 녀석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예술이라는 분야에서만큼은 압도적인 존재니까.
변태 사도가 자기 기술을 전하는 걸 꺼려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의 변태적인 취향에 한 번 맞춰주겠다 그러면 환히 웃으면서 기꺼이 전수하겠다 그럴 게 분명하잖은가.
“복장 같은 경우에는 생전 부인께서 제일 좋아하셨다던 드레스로 준비했습니다.”
“…허접 에린. 너 머리에 문제 생겼어? 그 때 입었던 옷이 지금 내 몸에 맞을 거라고 생각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으니까요.”
최소한의 재단을 하는 걸로 충분했다는 에린의 이야기에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미라가 이 세상을 떠난 후로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고? 루시의 몸이 어린아이였을 적 그대로라는 거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루시의 키는 초등학생과 비교해야 할 지경이었으니까. 놀이공원에 가면 거기 있는 것 중에 절반은 탈 수 없을 걸.
…뭣보다 허접 주신이 안배해 둔 곳에서 마주한 어린 루시랑 나랑 시선이 비슷했거든. 명백한 팩트를 알고 있는 데 어떻게 부정을 하겠어.
에린이 가져다 준 옷은 내가 종강 파티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하얀 색의 드레스였다.
장식을 단순하게 하는 것으로 착용자의 외모를 돋보이게 만드는 옷.
‘세상에! 루시! 너무 예쁘다!’
‘하늘에서 천사인 줄 알고 데려가면 어떡하지?! 이 엄마는 너무너무 걱정이 된단다!’
그를 본 순간 과거 루시가 겪었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하하. 젠장. 루시가 왜 쓰잘데기 없이 화려한 옷을 고집했는지 알겠어. 그런 옷을 입지 않으면 자기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서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아가씨? 괜찮으세요?”
에린의 목소리를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양 손으로 닦아냈다. 이젠 슬슬 갑작스레 찾아오는 울적함에도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다.
준비를 끝마치고 저택 바깥으로 나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베네딕이 나를 맞이해줬다.
언제나처럼 웃음을 지어 보이려던 그는 내 모습을 보고 일순 굳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급히 고개를 틀었다가 한참이 지나서 다시금 나를 마주했다.
그는 애써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물기가 서려 있는 베네딕의 눈가는 그가 지금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네가 그 옷을 입은 건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럼 안 그래도 예쁜 내가 더 예뻐 보이잖아? 징그러운 허접 변태들이 몰려드는 건 질색이야.”
“하하. 그렇긴 하겠구나. 지금도 사교계에 네 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을 지경이니.”
베네딕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손을 활짝 펼쳐도 두 손가락을 쥐기 어려울 만큼 커다랗지만 무섭기보다는 믿음직스러운 손.
아무 망설임 없이 베네딕의 손을 붙잡은 나는 그와 함께 눈길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베네딕은 자신이 기억하는 미라에 대해 늘어놓았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생겨난 우연한 만남. 그의 필사적인 구애. 평민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에 대한 집안의 반발. 베네딕의 강행.
그 모든 이야기를 귀에 새기던 나는 지금의 베네딕이 엄청나게 순해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의 그는 제멋대로에 기분파인데다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까지 지닌 트롤러였으니까. 물론 그 근본이 선하다는 부분에서 루시와의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발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알른의 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세를 기준으로도 이른 시간일 텐데 많은 사람들이 묘지 인근에 모여 있었다.
기이한 점은 그들이 묘지 바깥에 머무를 뿐 안으로 들어가진 않고 있단 것이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여러분들. 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무리 중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길을 만들어냈다.
공포가 아닌 존중에서 만들어지는 길이라니.
부럽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으려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주님.”
묘를 관리하는 역을 맡은 남자는 베네딕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다가 날 보고는 눈썹을 치떴다. 작년에 오지 않았던 내가 다시 방문했단 사실이 그렇게나 놀라운 걸까?
“…아가씨께서.”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지 않나.”
“미라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겠지.”
“들어가시죠. 저는 이 곳에서 묘지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묘지 안 쪽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다 보니 대리석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알른 가문의 인장이 박혀 있는 걸 보면 가문의 사람들이 묻히는 장소인 듯 했다.
베네딕은 그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먼저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렴. 이 아비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투정을 부려대서 할 말이 많지 않단다.”
나는 베네딕의 배려를 거부하지 않았다. 잔뜩 내리앉아 있는 나의 마음은 미라의 묘를 보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흑.”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 미라의 이름이 적힌 십자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다.
“…끄흑.”
공포가 넘실거리다 마음이 무너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두려움에 빠졌을 때는 견디다 못해 댐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그냥 자연스레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느껴졌다.
“흐아아앙!”
그래서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아서 울었다.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이 말라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
목이 쉬어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까지 울던 나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은 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미라의 이름을 다시 눈에 새긴 순간 또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그 감정을 억눌렀다. 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간 진짜 울다가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슬픔이 가라앉을 때까지 입술을 억누른 채 미라의 이름을 바라보면서 목걸이 하나를 거냈다.
루시가 간절하게 찾고자 했던 목걸이.
한 때 기적을 품었으나 이제는 모든 힘을 잃어버린 장신구.
과거의 루시가 선호하던 것과는 달리 겉으로 보기엔 수수할 뿐인 물건.
나는 그 목걸이를 루시를 대신하여 무덤 위에 올렸다.
목걸이가 내 손을 떠난 순간 거기에 신성이 깃들었다.
일반적인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신성이 아니라 주신의 따스함을 그대로 간직한 신성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