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 프로스트.
어느새 침묵 속에 잠긴 셸터 내부.
의장이 셸터의 무거운 철문을 밀어젖히고 밖으로 나섰지만, 다른 어른들은 두려움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호빛 소녀는 어떤 직감 같은 것을 느끼고 그 뒤를 따라서 셸터의 출구를 나섰다.
‘….’
찬란한 빛이 그녀의 눈을 찌르자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멎는 듯했다.
“와아….”
언제나 짙은 구름과 검은 연기 아래에 있었던 프로스트가 이제는 푸른 하늘 아래 고요히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소녀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푸른 하늘이었다.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계 거인들.
도시가 부서지며 울려 퍼지는 섬뜩한 소리.
눈보라가 몰아친 뒤, 나타난 끔찍한 한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세상이 멈춘 듯한 적막만이 가득했다.
산호빛 소녀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자, 눈 위를 밟은 소리가 ‘뽀드득’하고 울렸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하아….”
그리고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입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여전히 추웠지만, 이상하게도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친 뒤 도시를 뒤덮은 끝없는 한기는 물론, 이제까지 느껴왔던 도시의 냉기와도 달랐다.
살짝 덜 춥고, 조금 더 상쾌한 느낌.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시의 많은 시설이 무너져 있었고, 거리는 파편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푸른 하늘 때문인지, 그 모습이 절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
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소녀는 돌아보았다.
감탄과 놀람, 경이로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셸터에서 어른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도 놀람과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산호빛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들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에 그들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정말…. 오랜만이야.”
다른 어른들도 하나둘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두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안도감, 두려움, 그리고 희망.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산호빛 소녀는 익숙하지만 조금 달라진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붉은 태양 사신이 약간 수줍은 표정으로 천천히 날아서 소녀의 손바닥 위에 착지했다.
프흣.
산호빛 소녀는 절로 웃음이 났다.
“왜? 왜 그렇게 된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붉은 태양 사신이 통통해져 버렸으니까.
소녀가 웃어버려서 붉은 태양 사신은 조금 토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산호빛 소녀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붉은 태양 사신의 통통한 뱃살은 사람을 유혹하고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는지, 산호빛 소녀는 어느새 붉은 태양 사신의 뱃살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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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증기탑이 있던 자리에 대신 생겨난 바람개비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산호빛 소녀와 시민들은 일련의 사건들 때문인지, 약간 두려운 표정으로 바람개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바람개비에서 튀어나온 것은 해맑게 웃고 있는 미니 사신들이었다.
‘인간!’
‘인간이 많아!’
‘춥지 않아?’
젤리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돼지에 타고서, 반가운 표정으로 웃는 미니 사신들.
그 미니 사신들에게서는 왠지 따스한 햇살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따뜻해….”
젤리 돼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온기가 도시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
젤리 돼지들은 은은한 열기를 뿜어내며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미니 사신들은 그 위에 앉아서 젤리 돼지를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인간들에게도 같이 먹자고 권했다.
귀여운 미니 사신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태양을 닮은 향기 때문인지.
미니 사신의 권유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따스한 온기와 맛있는 젤리.
프로스트에서 좀처럼 느끼기 힘든 온기와 배부름을 느끼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미니 사신들도 인간들과 함께 웃었다.
프로스트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차가운 바람은 이제 새로운 희망을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산호빛 소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프로스트의 봄이 오고 있었다.
***
세희 연구소 안뜰.
‘따뜻하네….’
나는 예린이랑 같이 하얀 아귀 의자에 앉아서 햇볕을 받고 있었다.
추운 곳에서 싸워서 그런지, 따뜻한 햇빛이 두 배로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귀 말랑말랑해서 푹신푹신하고 좋네.”
예린이는 하얀 아귀 위에 처음 앉아보는지, 앉는 내내 감탄하고 있었다.
쿠션 크기의 하얀 아귀도 말랑하고 좋긴 하지만, 의자 크기의 하얀 아귀가 역시 최고였다.
다만 숫자가 적어서 포획하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수급이 쉬워져서 의자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수급? 쿠션 아귀를 모아서 융합의 헤일로로 합치면 끝!
히히.
“그나저나, 사신이 점점 살이 찌는 거 같아. 이러다가 하얀 아귀보다 푹신푹신해지는 거 아냐?”
예린이는 내 정수리 위에 턱을 올려놓고는 내 팔뚝을 조물조물하면서 말했다.
‘히히, 엄마 살쪘대.’
‘히히.’
내 뱃살을 트램펄린처럼 쓰는 황금 사신들이 예린이의 의지를 듣고는 키득거렸다.
그 키득거림을 듣자마자 배에 힘을 줘서, 배 위에서 뛰어다니는 황금 사신들을 날려버렸다.
‘으앙!’
마치 황금색 팝콘처럼 의자 밖으로 날아가는 황금 사신들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고오오오!
그때 굉장히 강렬한 바람 소리가 TV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TV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거대한 융합 붉은 사신이 ‘혁명!’이라고 외치면서 풍압을 뿜어내는 장면이 보였다.
의지가 안 들리니, 흉흉한 바람 소리밖에 안 들리네.
그래서 귀여운 장면이 거인의 흉흉한 포효 장면처럼 보였다.
예린이는 TV 화면을 보더니, 내 양손을 TV에 나온 붉은 사신처럼 들어 올리며 놀고 있었다.
황금 사신들은 TV를 보면서 부러운 의지를 마구마구 흘렸다.
‘부럽다.’
‘거대 동생!’
‘거대 황금 사신 하고 싶어….’
부러움이 가득 담긴 의지.
황금 사신이 이런 의지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융합의 헤일로에 마약 성분이라도 들어있는 건가?
생각해 보면 융합의 헤일로가 문제라기보다는 크기의 문제 같았다.
황금 사신들은, 아니 미니 사신들은 큰 걸 좋아하곤 했으니까.
얌전한 푸른 사신부터 시작해서, 활달한 황금 사신까지 전부!
동상도 큰 걸 좋아하고, 엄마 골렘도 어떻게든 크게 만들려고 하고, 검은 사신도 크게 합체하는 등, 거대화를 좋아했다.
얘네들은 왜 이렇게 커지는 데 집착하는 거야….
뭔가 미니 사신 내부에 잠재된 충동 같은 건가?
어느새 아귀 의자 밖으로 튕겨 나간 황금 사신들이 내 배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딱히 의지를 뿜어내진 않았지만, ‘엄마! 융합의 헤일로!’라고 쓰여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배를 튕겨, 황금 사신들을 다시 한번 날려버렸다.
‘으앙!’
***
세희 연구소 휴게실.
한때는 미니 사신들에게 폭풍 같은 인기를 끌었던 버블티 자판기도 인기가 꽤 사그라들어 있었다.
미니 사신들이 휴게실에 오면 한잔씩 뽑아먹긴 하지만, 줄을 서서 먹을 정도는 아닌 수준.
뚜방뚜방.
또 다른 황금 사신이 휴게실에 들어와서, 조그마한 손으로 자판기 버튼을 꾹 눌렀다.
덜컹.
버블티 캡슐이 자판기에서 튀어나오자, 황금 사신은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며 캡슐을 꼭 끌어안고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런 자판기 옆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헬멧 연구원이 앉아 있었다.
“너무 먹었잖아….”
연구원의 앞에는 황금 사신이 배를 빵빵하게 만든 채 누워있었다.
헬멧 연구원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배가 빵빵해진 애착 사신의 뱃살을 살살 찌르며 중얼거렸다.
“다른 미니 사신들은 이 정도는 아닌데, 너무 버블티를 좋아하는 거 아냐?”
황금 사신이 이토록 버블티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이 자판기가 세희 연구소장과 헬멧 연구원의 합작이기 때문일 것이겠지.
헬멧 연구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금 사신을 내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간식 코너를 향했다.
그리고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서 자리로 돌아왔다.
헬멧 연구원이 선택한 간식은 떡 속에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꽤 유명한 아이스크림이었다.
“???”
아이스크림의 껍질을 벗겨내자, 헬멧 연구원은 의아한 목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두 개가 들어있어야 할 아이스크림의 한쪽이 텅 비어있었고, 남은 하나는 색이 까맣게 변한 상태였으니까.
썩거나 곰팡이가 생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균질한 검은색.
헬멧 연구원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동봉된 포크로 검은 떡을 ‘콕’하고 찔렀다.
‘히히, 간지러워.’
그렇게 찌르는 순간, 아이스크림에 황금색 눈과 입이 생겨버렸다.
‘뭐야, 검은 사신이었네.’
헬멧 연구원은 흠칫하고 놀랐다가, 금세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아이스크림 용기에 들어간 거지?’
딱히 틈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데….
헬멧 연구원은 아이스크림이 담긴 홈에서 검은 사신을 꺼내 떡처럼 주무르며, 새로이 생겨난 의문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송파구 외곽 제임스 타워.
제임스는 모니터가 잔뜩 늘어선 상황실에서 이번 사태를 촬영한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포착된 기계 거인.
얼음 왕좌에 앉은 황제 개구리.
평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붉은 사신.
이번 황제 개구리 사태에서 통신기기는 전부 무력화되었지만, 강철탑처럼 드론을 부수지는 않았기에 촬영 자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였다.
“시베리아 연방 관구에 21시….”
제임스 연구소 직원들이 보내온 데이터를 취합하며 제임스가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하자, 상황실 중앙 모니터의 세계 지도 위로 붉은색 점이 새로이 찍혔다.
제임스는 거대 기계 거인의 등장 위치와 시간을 세계 지도 위에 하나씩 표시하고 있었다.
기계 거인의 등장 위치와 시간, 그리고 진군 속도를 이용해서 최초 발원지를 추적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짙은 구름으로 위성 촬영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작업이었다.
“프로스트 쪽과 한반도 쪽의 등장 시기가 유난히 빨라.”
제임스는 유난히 튀는 데이터 두 개를 제거한 뒤, 예상 발원지를 지도에 표시했다.
표시된 위치는 북극점에 가까운 바다 위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제임스는 발원지를 추정해 내자마자, 연구소 직원들을 대거 이끌고 출발해서 예상 발원지에 도착해 있었다.
얼음과 추위가 가득한 곳.
이곳은 원래 얼음과 추위만이 가득한 바다였지만, 제임스 연구팀이 얼음을 깨서 확인한 결과 어느새 육지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제임스는 육지로 변한 땅 위에 서서, 황금 사신과 함께 정체불명의 유적을 관찰하고 있었다.
연구소 직원들은 이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데이터를 수집했다.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연구소 직원의 어깨 위에는 미니 사신이 하나씩 얹어져 있었다.
“0호 유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혀 다르군.”
자세한 사항은 전문가들이 살펴봐야 정확해지겠지만, 제임스가 보기에 0호 유물들과는 문화적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거대한 옥으로 만들어진 신전.
제임스는 어딘가 불길하게 느껴지는 신전을 심각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