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으로 둘러싸인 도시 프로스트의 하늘은 오늘도 맑고 푸르렀다.
도시 중심부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람개비가 천천히 돌아가며 알록달록한 빛을 반사했다.
의장이었던 노인은 자기 집 창가에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살아남기에 급급했었지….”
그의 목소리에는 세월의 무게와 추억이 묻어났다.
눈을 감자 과거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쇳물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채 검은 연기를 뿜어내던 증기탑.
매캐한 공기로 가득했던 거리.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던 증기탑 광장.
프로스트는 한때 생존하기에 급급한 도시였다.
오브젝트 사태로 외부와의 왕래가 끊어지고,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던 시절.
노인은 의장으로서 도시의 미래를 걱정하며 밤잠을 설쳤던 날들을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눈을 뜨면 보이는 광경은 전혀 달랐다.
증기탑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바람개비가 서 있었고, 삭막했던 광장은 이제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던 증기탑은 검은색 바람개비로.
그리고 검은색 바람개비는 알록달록한 바람개비로 변했다.
그 일련의 변화는 도시의 급격한 변화를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곧 따뜻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바람개비에서 나타난 젤리 돼지들 덕분에 생긴 온기였다.
광장 곳곳에 있는 다양한 색깔의 젤리 돼지들은 끊임없이 따뜻한 열기를 뿜어냈다.
그 덕에 사람들은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외출을 즐길 수 있었다.
노인의 시선이 창문 너머 푸른 하늘에 닿았다.
과거 매연으로 가득했던 하늘은 이제 맑고 깨끗했다.
젤리 돼지가 제공하는 열기 때문에 푸른 석탄과 석유를 태울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덜커덕. 덜커덕.
나무 바퀴와 돌바닥이 부딪치는 소리에 시선을 내리자, 커다란 젤리 돼지가 외부에서 들여온 온갖 물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여전히 이 근처에는 정체불명의 오브젝트 현상으로 내연기관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지만, 젤리 돼지가 있으면 괜찮겠지.
고립된 도시, 프로스트는 이제 옛말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니.”
노인은 감격에 젖은 목소리를 흘렸다.
오브젝트 사태로 눈더미에 파묻혀 설원이 되어버린 고향.
이제는 그 설원 위에 희망으로 가득한 도시 프로스트가 우뚝 솟아올랐다.
달그락. 달그락.
그때,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황금 사신이 노인의 쓰디쓴 커피 속에 각설탕을 마구마구 넣고 있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앗!’
입을 크게 벌리고 놀라는 표정의 황금 사신.
황금 사신은 ‘들켰어!’라는 표정을 짓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노인은 그런 황금 사신을 보면서, 손자를 보는 것 같은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로 돌아가, 황금 사신이 설탕을 잔뜩 집어넣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맛과 함께 설탕 가루가 입안에 퍼졌다.
노인은 설탕물 같은 커피 맛에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프로스트의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르렀고, 거대한 바람개비는 계속해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공기 중에는 황금 사신의 커피처럼 희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새로운 하루, 새로운 프로스트의 시작이었다.
***
와그작, 와그작.
오랜 세월 산호빛 소녀의 안식처였던 폐기된 증기 기관실이 무너져 내렸다.
황동 파이프와 부서진 벽돌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땅으로 쏟아졌다.
산호빛 소녀는 거대한 젤리 돼지가 오래된 건물을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상하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네….”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섭섭함과 후련함이 공존했다.
애착 인간의 복잡한 심경을 감지한 붉은 태양 사신이 그녀의 정수리에 앉아 부드럽게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 따스한 위로에 소녀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고개를 돌리면, 미니 사신들이 커다란 마시멜로 벽돌을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뚜방뚜방.
미니 사신들이 네모난 마시멜로를 쌓아서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고 있었다.
마시멜로를 대충 쌓아 올린 것 같은 과자집이라서 부실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튼튼하고 따뜻한 집이었다.
요정들이 마을을 만드는 것 같은 모습에, 산호빛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소녀는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리는 옛집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 속에 새기고는 익숙한 길을 따라 내려갔다.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소녀의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묘한 감상이 남아있었다.
어른들이 아침마다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던 공터에 도착하자 여전히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한때 푸른 석탄이 타오르던 드럼통 자리에는 이제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통통한 젤리 돼지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멀건 죽 대신 맛있어 보이는 다양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전부 젤리 돼지가 만들어 준 음식이었다.
젤리 돼지 옆에는 손잡이가 달려있었는데, 그걸 잡아당기면 돼지의 몸통이 열리고 음식이 들어있는 구조였다.
소녀는 맛있어 보이는 푸딩을 받아서 붉은 사신과 나누어 먹었다.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푸딩은 신기하게도 몸 전체에 따스한 기운을 퍼뜨렸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소녀는 어른들과 정겨운 인사를 나누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걷고 있었더니, 문득 예전의 거리가 떠올랐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선전부 사람들.
날카로운 고드름들.
이른 아침, 해가 뜨지 않아 스산했던 거리.
지친 표정의 어른들.
매일 아침 들어가야만 했던 좁고 어두운 광산.
살을 에는 듯한 추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상하리만치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처럼.
산호빛 소녀는 자기 어깨에 앉은 붉은 태양 사신과 함께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스한 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고, 부드러운 미풍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렸다.
그 바람에는 흐릿하게 달콤한 향기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세희 연구소 안뜰.
지금 이곳은 비 오는 날 호숫가처럼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다.
개굴개굴. 개굴개굴. 개굴개굴.
‘시끄러워….’
안뜰을 개구리로 가득 채워도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을 텐데….
나는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하얀 아귀 위에 예린이랑 같이 누워 있었다.
마음 같아서 농약이라도 쳐서 조용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지금 개굴개굴하는 것은 농약에 면역인 개구리였다.
개구리 빙수를 맛있게 먹는 미니 사신들은 기본적으로 불사였으니 말이다.
설원에 있던 개구리 빙수를 어떤 미니 사신이 안뜰로 가지고 나온 상태였다.
개굴개굴.
어렸을 때 먹어 본, 먹으면 입에서 소리가 나던 아이스크림처럼 저 빙수를 먹으면 입에서 개굴개굴 소리가 났다.
그것도 꽤 크게.
딱 미니 사신이 좋아할 것 같은 오브젝트 과자.
그래서 그런지 현재 미니 사신들에게 대유행 중이었다.
안뜰에는 형형색색의 소스가 뿌려진 개구리 빙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새로 나타난 개구리 빙수를 먹기 위해 미니 사신들도 잔뜩 모여든 상태였다.
문제는 시끄럽다는 점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예린이도 싱글벙글 웃으며 개구리 빙수를 즐기고 있어서, 먹는 아이들을 댖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없었다.
내가 삐진 것처럼 미간을 좁히고 있어도, 예린이는 웃으면서 내 미간을 문질러서 펴주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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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러던 중, 한 검은 사신이 나에게 다가와 콘 아이스크림처럼 생긴 간식을 내밀었다.
2층짜리 아이스크림 같은 비주얼.
뀨힝힝한 표정의 하얀 아귀와 반항적인 표정의 개구리.
하얀 아귀 위에 빙수 개구리가 쌓인 흥미로운 간식이었다.
‘잘했어.’
나는 그 간식이 꽤 마음에 들어서 칭찬해 주며, 간식을 받았다.
그랬더니 안뜰에 있던 미니 사신들이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아귀 + 개구리 간식들이 나에게 밀려들었다.
아귀 속을 개구리 빙수로 채운 간식.
아귀 얼굴에 개구리 몸통이 달린 간식 등등.
끝도 없이 간식이 밀려들었다.
‘새로운 간식이야!’
‘엄마!’
‘엄마 어디가?’
“앗, 사신이가 도망가 버렸어!”
나는 엉겨 붙는 미니 사신들이 너무 귀찮아져서, 순간 이동으로 도망갔다.
***
태평양 사태를 간신히 피한 미국 서부의 한 신문사, 샌프란시스코 오브젝트의 사무실은 여느 때와 같이 분주했다.
키보드 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뒤섞인 소음 속에서 기자들의 온갖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임스 연구소에서 북극 탐사를 시작했대. 이번에 터진 오브젝트 사태 조사라나?”
“그거 들었어? 알렉산더 그룹에서 또 새로운 오브젝트 차단 기술을 내놨대.”
누군가 커피를 들고 지나가며 끼어들었다.
“제임스가 한국으로 본사를 옮긴다는 소문도 있던데. 알렉산더가 미국 시장을 차지하는 거 아냐?”
이런 소란 한가운데서 붉은 머리카락의 기자는 조용히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자의 눈앞에 펼쳐진 문서들은 모두 알렉산더 그룹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이 거대 기업이 비밀리에 인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제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대부분의 제보가 장난이거나 허위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기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완벽해 보이는 기업의 이면에 뭔가가 숨겨져 있다고 직감했다.
오브젝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제임스 코퍼레이션이 미국 최고의 기업으로 올라섰을 때, 알렉산더 그룹은 조용히 그 뒤를 바짝 쫓아 2위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의 성장은 눈부셨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사회적 책임과 윤리 경영은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제임스 코퍼레이션도 물론 존경받는 기업이었지만, 간혹 작은 논란들이 있었다.
특히 기업이 오브젝트 연구소를 직접 운영한다는 점에 대해 언제나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반면 알렉산더 그룹은 그런 잡음 하나 없이 완벽한 이미지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어떻게 이렇게 큰 기업이 아무런 문제 없이 운영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의심은 점차 존경으로 바뀌었다.
알렉산더 그룹은 이제 ‘착한 기업’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하아.”
기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알렉산더 그룹에서 비밀리에 오브젝트 연구소를 운영한다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제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창밖으로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샌프란시스코의 푸른 하늘 아래 알렉산더 그룹의 본사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