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2
“페이비! 드디어 왔군요!”
조이는 페이비의 얼굴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 대한 반가움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친구가 보여 줄 여러 반응에 대한 기대감이기도 했다.
아무리 페이비라고 해도 알른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으면 흐트러질 수밖에 없겠지!
성녀님의 입에서 한탄이 나올 걸 생각하니까 너무 즐겁네.
우리를 초대할 때 알른 영애께서 느낀 기분이 이런 걸까.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웃음이 지어지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흐흥. 당장은 알른 백과의 대련부터 시작인가.
조이는 처음으로 베네딕 앞에 섰을 때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기사단에서 꾸준히 훈련하며 실전에 익숙해졌다 생각했거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든 베네딕에게 일격에 날아가버렸던 기억을 말이다.
페이비가 나보다 실전에 익숙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베네딕이란 규격 외의 상대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분명 엄청 당혹스러워 할 테지.
짓궂은 생각을 하며 페이비를 바라보던 조이였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페이비는 갑작스레 대련에 참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 보였다.
후방에 서서 전열의 지원을 잘 수행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성녀이기 이전에 뛰어난 성직자인 페이비가 제 역할을 못 할리 없으니 말이다.
조이가 놀란 부분은 페이비가 아무렇지 않게 그 이상을 해보였단 점이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위험에 빠진 전열을 보자마자 즉석에서 신성마법을 구성해 지켜낸다거나.
“허! 대비하고 계셨습니까!”
“조이! 마법!”
“…네. 넷!”
조이보다도 먼저 베네딕의 습격을 예상하고 대처해낸다거나.
“허접 성녀!”
“알겠습니다!”
루시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그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마법으로 변수를 만들어낸다거나.
베네딕과의 대련 동안 페이비가 보여 준 모습은 연약한 성녀의 모습이 아니라 전선의 한 가운데를 돌아다니는 성인에 가까웠으니.
조이는 친구가 곤란해 하는 광경을 보지 못해 시무룩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페이비가 여러 성직자들의 존경을 사는 사람인 거겠지.
조이는 자신의 옆에 페이비가 서 있단 사실에 든든함을 느끼며 이전보다도 더 공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좋군요! 더 재미있어 졌습니다!”
페이비라는 뛰어난 성직자가 추가되며 안정감을 손에 넣은 이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베네딕이란 벽은 너무도 높았다.
대륙 전체를 둘러봐도 맞상대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될 괴물을 상대하기에 루시 파티는 아직 부족했던 것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왕국의 미래는 밝군요!”
베네딕이 탈진해버린 이들을 내버려둔 채 떠나간 후 조이를 시작으로 베네딕의 맞은편에 섰던 이들이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베네딕이란 괴물을 상대로 버티느라 남은 체력을 모두 소모해버린 것이다.
이 때는 페이비라 해서 별 다를 것 없었다. 벽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그녀는 가쁜 숨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보 파파 진짜 유치해. 덩치 큰 아저씨가 자기 딸을 이겨먹겠다고 최선을 다하는 게 말이나 돼?”
유일한 예외는 루시였다. 애초부터 초월적인 체력을 지니고 있었던 그녀는 베네딕과의 대련에서 가장 힘든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딴 게 내 파파라니. 진짜 짜증나.”
루시가 진심어린 짜증을 드러낸 순간 저 멀리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커다란 소리였지만 거기에 놀란 것은 페이비 하나였다.
요 근래 알른 가문에 머물렀던 이들은 소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렵잖게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허접 성녀.”
고갤 두리번거리던 페이비는 루시의 목소리를 듣고 다급히 고갤 돌렸다.
“둔탱이처럼 생겨서는 생각보다 잘 움직이네? 지방만 가득한 건 아닌가 봐?”
루시의 어투는 여느 때처럼 도발적이었지만 페이비는 그 말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 치 어둠 없이 해맑은 웃음을 짓는 루시의 모습이 그녀에게서 생각을 빼앗아버렸으니까.
수정구 너머로 봤을 때도 감탄을 했었는데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진짜 감탄밖에 안 나오네요. 땀에 젖은 모습조차 어찌 저리 성스러워 보일 수가 있는지.
저 모습을 여태 저만 못 봤단 사실이 치사하게 느껴질 지경이에요.
약간의 질투심을 품었던 페이비는 문득 루시의 안에 머무는 신성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신성의 온기가 더 부드러워졌어요. 그리고 영애님의 안에 머무는 양도 많아진 거 같고. 뭣보다 신성이 영애님의 몸 안을 돌아다니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네요.
제가 없는 사이에 한층 더 성장을 이루신 거군요. 역시 주신의 사도다운.
“둔탱이 성녀. 귀에도 살이 붙은 거야?”
“…아. 죄송합니다. 영애님.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귀여운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야? 진짜 건방지네. 덩치 좀 크면 다라고 생각하나봐?”
입술을 삐죽이는 루시의 모습에도 페이비는 당황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주신 교회에서 속 검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루시의 투정 정도는 귀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루시는 태연한 페이비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듯 가만 내려보다가 페이비의 양볼을 잡아 당겼다.
“포동포동한 성녀주제에. 건방져.”
“제성해여. 나주세여.”
“맞아. 루시. 성녀님을 놔 줘. 대신 나랑 놀아.”
루시가 페이비와 떠드는 동안 체력을 되찾은 프레이는 쫄래쫄래 루시의 옆으로 와서는 자신의 뺨을 들이 밀었다.
그걸 본 루시는 아무 말 않고 프레이를 바라보다 프레이의 뺨을 쭈우욱 잡아당겼다.
“아퍄! 아퍄!”
“네가 하라며. 변태 검사.”
“…루시 나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페이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
페이비가 복귀한 후로 며칠이 지났을 무렵 베네딕이 더 이상 대련을 해줄 수 없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알른의 사람들을 비롯한 주변 귀족들과 일정이 있어서 말이다.”
베네딕은 자기도 가고 싶지 않다고 내게 설명했지만 난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일을 그냥 넘겨주기엔 여태까지 베네딕에게 당한 게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입술과 혀를 통해 베네딕을 쫄아서 튀는 겁쟁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 나는 지쳐서 쓰려져 있는 친구들을 끌어 모았다.
베네딕과의 대련을 할 수 없게 된 이상 굳이 알른 가문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
모두들 얼마 안 되는 휴식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투덜투덜 거렸지만 내가 다음 꺼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안색이 바뀌었다.
“던전을 공략하러 간다고?”
“다시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생긴 건가요?!”
“이번에도 내기 해?”
지난 번의 던전 공략이 비교적 여유로웠던 덕분일까. 저번에 함께했던 세 사람은 던전을 공략하러 간단 사실에 기쁨을 드러냈다.
알른 기사단의 지옥 같은 훈련을 거듭하는 것보다 실전을 경험하는 게 훨씬 더 낫다 생각한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말하지 않고 기뻐하는 저들을 구경했다.
이번에 던전을 방문하는 목적은 저번과 전혀 달라. 지난번에는 던전 공략의 실력을 늘려주기 위한 거였지만 이번엔 노가다를 하러 가는 거거든.
하루에 스무 시간 정도를 던전에 틀어박혀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나서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
<지금 네 표정이 무척이나 사악한 걸 아느냐?>
‘그래요? 사악한 생각을 해서 그런가 봐요.’
<…조금은 내숭을 부리는 게 어떠냐.>
‘굳이 그래야 해요? 어차피 저랑 할아버지 사이잖아요!’
잠시 침묵했던 할아버지는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다소 복잡미묘한 어투로 한탄했다.
<네 건방진 어투가 다행스럽단 생각이 드는 건 또 처음이구나.>
‘그건 또 뭔 소리에요?’
메스가키 스킬이 있어서 다행이라니! 이 개 같은 스킬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알른 영애. 이번에는 저도 함께할 수 있습니까?”
할아버지를 추궁하려던 순간 옆에서 슬며시 자칼이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버림받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듯 내게 질문을 던지는 그의 눈가에는 간절함이 스며있었다.
“나랑 그렇게 함께 하고 싶어?”
“예! 또 다시 저 혼자 이 지옥에 남고 싶지 않습니다!”
“무~척 간절해 보이네. 유기견 같아서 참 불쌍해 보여.”
“그. 그럼.”
“근데 이걸 어쩌지? 열등공자의 자리는 이번에도 없는데. 후훟. 또 외톨이가 되어야겠네. 그게 네 운명 인가봐.”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페이비가 이 곳에 복귀한 이상 자칼의 자리는 존재치 않았다.
친분도 미묘하고 캐릭터로서의 성능도 미묘한 그는 우선순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시 버림받았단 사실에 무너져 내린 자칼이 신경 쓰였던 걸까. 페이비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어. 영애님. 그래도 일단은 함께 가면 안 되나요? 인원이 초과되더라도 중간중간에 교대를 하면.”
“허접성녀. 버림받은 개를 동정하지 마. 개가 버려진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런가요.”
나라고 해서 자칼이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저 녀석을 데려가지 못하는 이유는 효율의 문제도 있지만 저 놈을 데려갈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에 버로우 가문에 다녀왔을 때부터 카리아가 자칼을 자기가 데리고 가서 굴리겠다고 이야길 했었으니까. 그 녀석이 오면 자칼도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서 도착한 장소가 더 한 지옥일지 아니면 여기랑 비슷한 지옥일지는 모르겠지만.
“고용주님! 오랜만이야.”
공교롭게도 내가 던전에 가기로 마음먹은 날 저녁에 카리아가 알른 저택에 방문했다.
베네딕과 먼저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그녀는 내게 와서 2왕비와 헤이샨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처음에는 서로 엄청 어색해했거든? 근데 말을 트기 시작하니까 금방 다시 친해지더라.”
애초에 잘못을 저질렀던 2왕비부터가 먼저 고개 숙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데다가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던 헤이샨도 2왕비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화해라 할 것도 없이 시종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했단다.
“덕분에 2왕비님과 손쉽게 거래를 할 수 있었어.”
1왕비의 동태를 알려주는 것 말고도 이것저것을 얻어왔다는 카리아의 말에서는 약간의 음습함이 느껴졌다.
2왕비님. 호구가 되어버리셨구나.
어쩔 수 없지. 상대의 몸짓만으로 감정과 생각을 읽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호구가 되지 않겠어.
진짜 카리아가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야. 반대쪽에 카리아가 있었다면 대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게 됐을지.
“그 과정에서 얻은 정보인데 1왕비 측에 붙은 아카데미 교수들이 아카데미 내부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더라. 정확한 목적은 모르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카리아는 경고와 함께 아카데미 교수 몇의 이름이 적히 쪽지를 건네줬다. 그 안에 적힌 이름은 대부분 내 예상 속에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메인 스토리 속에서 1왕비에게 협력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거든.
루카의 이름까지도 말야.
그를 보고 키득키득 웃던 나는 종이를 다시 카리아에게 건네줬다.
“가지고 있는 게 낫지 않아?”
“아줌마. 주책이 너무 심하네. 내가 그딴 허접들한테 당할 정도로 멍청해 보여?”
이벤트가 많아지는 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진다는 거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교수들의 움직임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극복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것.
“그보다 내가 말한 던전은 알아왔지?”
“제자 녀석을 보내서 일을 처리했어. 방학 끝날 때까지는 마음대로 써도 괜찮을 거야.”
“그래?”
“근데 고용주님. 거기서 뭐 하게? 거기 마물은 더럽게 많은데 보상은 안 좋아서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라던데.”
“아줌마는 바보라서 눈앞 밖에 못 보는 구나? 허접 쓰레기 마물들이 넘쳐나는 게 좋은 거야.”
노가다를 하기에 최적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