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에서 시작한 오브젝트 사태의 거친 파도가 샌프란시스코 일부를 집어삼킨 뒤, 꽤 시간이 지났다.
샌프란시스코는 아직 상처투성이였지만, 도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거리 곳곳에서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런 오브젝트 사태를 가까스로 피해 간 지역의 아파트에 한 남자가 있었다.
“괜찮아. 아무도 모를 거야.”
건물은 오브젝트 사태에도 기적적으로 멀쩡했지만, 내부는 남자의 불안한 정신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누군가 보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창문마다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남자는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계속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마치 벽에도 눈과 귀가 달린 것처럼 주변을 경계하며 어두운 방 안을 서성였다.
그리고 가끔 떨리는 손으로 커튼의 한 귀퉁이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밖을 확인할 때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그의 삶은 평온했다.
그는 ‘알렉산더 그룹’ 본사 건물의 의료시설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비록 정직원은 아니었지만, ‘착한 기업’이라는 평판을 가진 회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밖을 확인했다.
길 건너편의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남자가 기자와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언제나 한적한 그 카페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과연 기자가 믿어줄까?’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카페를 응시했다.
그가 고발하려고 하는 것은 그 ‘알렉산더 그룹’이었으니까.
남자가 발견한 것은 그저 미심쩍은 의료 물품의 누락이었다.
인간이 하는 이상 언제나 있을법한 사소한 누락 같은 것들.
하지만 남자는 그 누락 뒤에 숨겨진 어두운 비밀을 우연히 발견하고 말았다.
실종자와 인체실험.
애써 보지 않았던 것으로 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겁이 많은 남자는 결국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기자에게 연락해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후우. 괜찮아. 괜찮아.”
남자가 생각하기에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고, 아무런 특이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겁이 많은 남자의 심장은 도무지 진정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는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30분.’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남자는 커튼을 다시 열고서 확인했지만, 기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초조함에 다리를 덜덜 떨던 남자의 시선이 문득 거리로 향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초인협회’ 소속 히어로, 프리즘 센티널이었다.
“후우.”
남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프리즘 센티널은 그 자체로 신뢰의 상징이었다.
초인협회 전체가 그랬다.
하늘에 거대한 검은 행성이 떠오른 것을 기점으로 늘어난 오브젝트 사건.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들도 더욱 늘어났다.
그때 나타난 것이 초인협회였다.
초인 범죄자들과 오브젝트로 치안이 무너진 곳을 돌아다니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임.
검은 행성으로 불안해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만화 속 히어로처럼 꾸미고 활동하는 사람들.
그들은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능력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겁이 많은 남자가 이런 내부 고발을 하려고 마음먹게 된 것도 저런 히어로들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현실을 잊고 프리즘 센티널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의상,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모든 것이 희망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프리즘 센티널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남자 쪽을 향해 다가오는 프리즘 센티널을 보면서 남자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내 쪽으로 오는 건가?’
남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어붙었다.
프리즘 센티널은 어느새 남자의 아파트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의 우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어느새 창문 근처까지 떠오른 센티널은 남자를 바라보며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마시멜로 평원.
나는 미니 사신 정원의 하늘을 날아다니던 주황 사신을 붙잡은 상태였다.
나에게 포획당한 주황 사신은 내 손아귀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다.
솜뭉치에서 뻗어 나온 손이 공중을 향해 허우적거렸다.
나는 그 무의미한 발버둥을 무시한 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융합을 해볼까 말까.’
얼마 전 패션쇼에서 문득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주황 사신과 내가 융합되면 어떻게 될까?’
그 작은 호기심이 이제는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잠시 망설임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마음을 굳혔다.
‘그래, 그냥 해보자!’
나는 그대로 융합의 헤일로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융합을 사용했다.
그리고 번쩍하는 빛과 함께, 내 손에 있던 주황 사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내 몸속에서 주황 사신의 의지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자기를 잡아먹어 버렸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성공한 건가?’
가슴이 뛰는 마음으로 나는 서둘러 내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매끈한 회색 피부, 익숙한 몸매.
심지어 주황 사신을 붙잡고 있던 손가락까지 확인해 보았지만, 모든 게 그대로였다.
실망감이 밀려왔다.
‘안 돼….’
융합의 헤일로는 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헤일로인 건가?
나는 그렇게 절망하면서 마시멜로 평원 위로 쓰러졌다.
풀썩.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부드러움이 내 몸을 받쳐주었다.
‘푹신푹신하네?’
의아함에 등 뒤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내 머리카락이 구름 같은 회색 솜뭉치로 변해 있었다.
주황 사신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아….’
융합의 결과는 내 머리카락의 변화였던 것이다.
‘하아.’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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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히히히.
멀리 구석에 숨어서 나를 보며 비웃고 있는 하얀 아귀.
나는 시간 가속 능력을 사용해 순식간에 그 하얀 아귀에게 다가가 붙잡아버렸다.
그 순간, 주황 사신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하얀 아귀끼리 싸우게 만들면 재밌을 텐데….’
‘하얀 아귀에게 핫초코를 배가 터질 때까지 먹게 명령하면 재밌을 텐데….’
‘하얀 아귀에게 푸딩 사신을 습격하게 만들면, 정말 재밌을 텐데….’
나는 상상도 못 할 다양한 장난들이었다.
순간, 나도 ‘재밌어 보이네?’라고 생각할 법한 생각이 꽤 많았다.
그야말로 악마의 속삭임!
아마 주황 사신은 나처럼 정원 소속 오브젝트에게 명령을 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하얀 아귀에게 선물할 처벌을 고민하던 도중, 황금 사신의 다급한 의지가 들려왔다.
‘엄마, 큰일이야!’
들뜬 것보다는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의지.
개구리 사건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새로운 문제가 생긴 건가?
나는 하얀 아귀를 풀어 준 뒤, 황금 사신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러자 생소한 공간이 나를 반겨 주었다.
동굴처럼 어둡고 좁은 공간.
옥으로 만들어진 조각이 잔뜩 새겨진 벽.
공기 중에 은은하게 느껴지는 색채 우주의 냄새.
그리고 제임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
“으아악!”
그것은 황금 사신에게 눈꺼풀을 잡아당겨지는 제임스의 비명이었다.
‘아프겠다….’
나는 불쌍한 제임스의 공간을 붙잡아서 방 밖으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방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상한 구슬이었다.
불투명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구슬.
하지만 어디선가 색채 우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통통 두들겨도 반응이 없었다.
구슬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었더니, 제임스의 황금 사신이 뚜방뚜방 방안으로 돌아왔다.
‘동생!’
그리고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가리키며 의지를 보내왔다.
나도 손가락을 따라서 시선을 내려보니,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검은 사신이네….
장작을 주변에 흩뿌리자, 잔잔한 검은 액체가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앗!’
‘잠들었어!’
‘잠들면 안 되는데….’
수많은 검은 사신들이 뭉쳐있어서 그런지, 소란스러운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옛 신 형상의 검은 사신들이 솟아오르더니, 구슬을 감싸기 시작했다.
‘봉인!’
‘숨겨야 해!’
뭔가 좀 이상한데.
이 녀석들 눈을 안 뜨네.
눈을 뜬 것을 못 봤을 리는 없었다.
검은 사신들은 눈을 뜨면 장작 색이 잘 보이는 녀석들이니까.
나는 구슬을 끌어안고 있는 옛 신 형상의 검은 사신 중 하나를 뜯어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누구? 누구야? 봉인해야 하는데….’
그리고 어리둥절한 의지를 흘리는 검은 사신의 얼굴 부분을 콕콕 찔렀다.
검은 사신은 귀찮은 것처럼 내 손가락을 밀어내다가, 내 손가락을 붙잡더니 덜컥 멈춰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더니, 깜짝 놀라 녹은 슬라임처럼 녹아내렸다.
슬라임처럼 변한 검은 사신은 굉장히 신난 것처럼 손바닥 위에서 통통 뛰었다.
그러더니 스르륵 하고 조금 기묘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마치 주황 사신처럼 솜뭉치에 둘러싸인 형태의 검은 사신이었다.
‘엄마!’
검은 사신은 정말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라고 외친 의지 때문일까?
구슬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액체 위로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잔뜩 떠올랐다.
‘엄마?’
‘엄마다.’
‘어째서?’
그리고 순식간에 검은 사신 형상을 하더니,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악, 검은 솜뭉치들의 습격이다!
그렇게 나는 검은 솜뭉치들에게 습격당해, 검은 솜뭉치 속 회색 솜뭉치가 되어버렸다.
***
기자는 길거리를 걸어서,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약속 시간까지 약 10분 정도 남아있었다.
‘흠. 제보자는 아직인가?’
기자는 시간이 조금 비자, 카페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흥미를 끄는 게시글을 하나 발견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의 특이 현상에 대한 게시글이었다.
자신을 황금 사신 연구자라고 소개한 사람이 쓴 글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 근처로 가면 황금 사신이 극심한 어지러움을 호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글은 샌프란시스코에 미니 사신이 극히 적은 이유일지도 모른다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렇긴 하네….’
샌프란시스코는 다 좋은데, 황금 사신이 너무 부족했다.
뭐, 황금 사신이 많았다면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히어로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토. 토독.
작은 동물이 나무를 딛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탁자 위에 황금 사신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 글을 본 뒤라서 그런지, 진짜로 어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정말 작아.’
보기 드문 황금 사신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기자는 호기심에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서 황금 사신의 얼굴 크기를 재보았다.
그러자, 황금 사신이 손가락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래서 다들 황금 사신을 좋아하는 건가?’
절로 웃음이 나오는 행동이었다.
황금 사신과 쿠키를 나눠 먹으며 놀던 기자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이미 지났어.’
이번에도 허탕인가.
알렉산더 그룹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제보한다고 하고는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알렉산더 그룹의 광신도들이 하는 소심한 복수이려나?
창밖을 보니 경찰들이 잔뜩 보였다.
카페 창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아파트 주변을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오.’
경찰들 사이에서 주먹이 피로 물든 히어로, 프리즘 센티널이 보였다.
‘초인 범죄자 사건이라도 터졌나 보네?’
기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