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한 조용한 카페, 늦은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한 기자가 그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자의 앞에는 텅 비어버린 커피잔이 놓여 있었고,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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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알렉산더 그룹을 조사하기 시작한 기자는 제보자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기자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약속 시간이 지나버렸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봐야겠지…?”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톡톡.
약간의 리듬이 느껴지는 소리가 카페의 조용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깨뜨렸다.
따분한 시선이 창밖의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그 순간, 기자의 눈이 프리즘 센티널과 마주쳤다.
그는 사건 관련으로 경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고, 어디선가 구해온 수건으로 손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센티널은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놀란 듯했지만, 곧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자는 그 미소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요즘 신기하게도 프리즘 센티널을 자주 보는 것 같네.
마주치기가 그리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은 건가?
사실 기자는 히어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속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센티널과 마주치는 행운 대신 제보자가 재깍재깍 나타나는 행운으로 바꿔주면 좋을 텐데….’
기자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탁자 위의 작은 친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어.”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 이마에 손을 대고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황금 사신이 그 대상이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는 황금 사신의 통통한 뱃살을 꾹꾹 누르며 작별을 고했다.
“안녕, 가볼게.”
그러자 마치 기자의 말을 알아들은 듯, 황금 사신은 조그마한 손을 들어 인사하듯이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으며 카페 밖으로 나섰다.
카페 문을 밀고 나오자, 기자는 프리즘 센티널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센티널은 귓가의 이어피스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또 뵙는군요.”
센티널이 가까이 다가와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센티널. 오늘도 바쁘신가 봐요?”
기자는 갑자기 다가온 센티널에 살짝 놀란 표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잠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날씨, 최근 도시의 상황, 그리고 센티널의 활약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인터뷰 주제로 넘어갔다.
센티널과의 인터뷰라니?
기자가 원하던 주제의 기사는 아니었지만, 대단히 큰 특종이 될 만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들뜬 마음에 당장이라도 인터뷰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려는 순간, 센티널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센티널의 시선은 기자의 뒤편, 카페 쪽이었다.
“센티널? 무슨 일인가요?”
기자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나고, 센티널은 다시 이어피스에 손을 대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고는 기자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겼어요. 인터뷰는 다음에 꼭 하도록 하죠.”
기자는 실망감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센티널이 급히 떠나자, 기자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도대체 왜 저러지? 카페 방향을 보고 표정이 굳은 것 같은데….’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페 쪽을 바라보자, 카페의 야외 탁자 위에 검은 사신 하나가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기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물을 터는 강아지처럼 세차게 고개를 젓는, 어지러워 보이는 검은 사신이었다.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검은 사신은 헤픈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그러다가 뒤로 콩하고 쓰러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웃던 기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신문사로 터덜터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허탕이네….’
언제나 똑같은 기자의 일상이었다.
***
센티널은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 으슥한 골목에 내려섰다.
주변을 살피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평소의 친근한 미소는 사라지고, 긴장감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어피스를 귀에 바짝 대고 그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실패야. 미니 사신이 근처에 있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센티널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만날 때마다 다른 미니 사신이 매번 근처에 있는 거지? 운이 지독히도 좋아.”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불만이 가득했다.
평소 대중 앞에서 보여주던 침착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어피스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사로 불러들여야겠군.]
센티널의 눈이 커졌다.
“뭐? 함부로 불러들일 수 없다며.”
[그건 인터뷰 등의 명목으로 불러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지.]
상대방이 설명했다.
[그렇게 특종을 원한다면 그걸 명목으로 불러들이는 수밖에.]
센티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의 눈빛에 이상한 광채가 어렸다.
“그러면 내가 직접 손을 쓰지 못하는 건가?”
[그래.]
상대방의 대답이 들려오자, 센티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건 좀 아쉽군.”
그 표정은 대중에게 알려진 친절하고 정의로운 히어로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욕망과 아쉬움, 그리고 폭력성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센티널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그리고 잠시 골목 벽에 기대어 서자,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센티널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그의 얼굴에는 다시 한번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친근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당한 걸음걸이로 거리로 나섰다.
***
제임스가 있던 좁고 어두운 공간.
나는 나에게 잔뜩 달라붙은 검은 솜뭉치 사신들을 죄다 떼어 내는 데 성공했다.
‘안 아픈 엄마다!’
‘이제 안 아파?’
‘엄마다!’
내가 힘들게 떼어낸 솜뭉치 같은 검은 사신들은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며 통통 뛰고 있었다.
녹아내린 휴면 상태의 검은 사신은 발견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녀석들은 다른 때와 달리 자꾸 나보고 안 아프냐고 물어보았다.
‘아픈 곳 없어.’
내가 아프지 않다고 해도 검은 사신은 기어코 다시 내 몸에 달라붙은 뒤, 작은 혓바닥을 내 몸에 가져다 대었다.
핥는다기보다는 무슨 맛인지 확인해 보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깜짝 놀란 의지를 내뱉기 시작했다.
‘진짜 안 아파!’
‘안 아픈 엄마!’
그리고 마치 축제라도 벌이는 것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 모습은 마치 ‘복슬복슬 검은 사신 축제’가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 개최된 것 같았다.
그때 방의 유일한 입구에서 황금 사신들이 고개를 내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동생!’
‘동생이 잔뜩 있어!’
그리고 검은 사신에게 황금 사신이 하나씩 달려들더니, 꼭 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검은 털 뭉치 속에 얼굴이 불쑥 튀어나온 솜뭉치가 잔뜩 생겨나 버렸다.
검은 사신 얼굴과 황금 사신 얼굴.
그 모습은 주황 사신과 새싹 사신이 하는 짓과 조금 닮아 보였다.
나는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라고 내버려 둔 채, 불길한 냄새가 나는 구슬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검은 사신들이 깜짝 놀라서,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리더니 구슬을 둘러싸 버렸다.
마치 고무로 코팅하는 것처럼, 구슬 주변을 균일하게.
‘봉인!’
‘봉인!’
그러자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불길한 냄새가 싹 사라져 버렸다.
음, 아무래도 검은 사신들은 이 구슬을 봉인하다가 장작이 다 떨어졌나 보네….
나는 이제 안전해진 구슬을 품에 안고, 제임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임스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겠지?
***
세희 연구소 안뜰 주변 복도.
은빛 소녀는 회색 사신과 만나기 위해서, 잠시 외출 허가를 받아서 세희 연구소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안뜰 주변을 빙 둘러서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복도에는 안뜰이 보이는 방향으로 커다란 매직미러와 다양한 휴게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과 음료수, 그리고 음식을 먹으며 앉아서 쉴 공간.
“회색 사신이 없네….”
돌아다니던 은빛 소녀가 약간 지친 목소리로 자신에게만 보이는 미니 꽃 사신에게 말을 걸었다.
미니 꽃 사신은 엄마는 곧 올 거라며, 작게 웃으며 은빛 소녀의 머리 위에서 토닥여 주었다.
세희 연구소를 너무 돌아다녀서 조금 지친 은빛 소녀는 쉴 곳을 찾아 휴게시설로 들어섰다.
휴게시설로 들어서자, 맛있는 향기가 은빛 소녀를 반겨주었다.
휴게시설 내부에는 의자에 앉아서 안뜰을 구경하는 수많은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그중 한 테이블에 이상한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황금 사신 출몰 주의!>
은빛 소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지판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짧은 한국어 실력에 문제라도 생긴 건지 잠깐 의심했다.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간단한 주의 사항이 쓰여있었다.
<이 자리에서 식사할 경우, 간식을 충분히 구입해 둘 것.>
‘?’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은빛 소녀는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간식을 잔뜩 사 들고 황금 사신 출몰 좌석에 앉아, 미니 꽃 사신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옆에서 쿠키를 먹던 미니 꽃 사신이 은빛 소녀의 손등을 콕콕 찔렀다.
“무슨 일이야?”
미니 꽃 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안뜰 방향 유리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많은 황금 사신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얼굴이 찌그러질 정도로 달라붙은 황금 사신들의 덩어리.
그 모습이 조금 귀엽고 너무 불쌍해 보여서, 은빛 소녀는 황금 사신들에게 말을 걸었다.
“와서 같이 먹을래?”
그러자 황금 사신들은 유령화로 유리창을 통과하더니 만세를 외치며, 같이 간식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쿠키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은빛 소녀에게 조금 뜯어서 나눠주기도 했다.
은빛 소녀는 그렇게 배가 가득 찰 때까지 황금 사신들과 간식을 끊임없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래서 경고문이 붙어 있었던 거구나….”
은빛 소녀는 통통해진 배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회색 사신은 어디 있는 거지?’
‘이번에 꾼 예지몽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은빛 소녀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회색 사신에게 해주기 위해 찾아온 상태였다.
회색 사신이 나오는 의미심장한 꿈.
매일매일 반복해서 꾸는 ‘예지몽’에 대한 이야기를.
***
샌프란시스코의 한 카페.
기자는 알렉산더 그룹 관련 ‘제보자’를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제보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페 천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도 있네요. 미니 사신.”
“네?”
기자가 되묻자, 제보자는 손가락으로 천장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실링팬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자, 실링팬 위로 황금색 더듬이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긴 미니 사신이 거의 없는 지역인데…. 신기하네요.”
그러고는 작게 ‘마치 미니 사신들이 기자님을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덧붙인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런지, 기자는 듣지 못했다.
“알렉산더 그룹 본사에서 인체 실험이 벌어지고 있어요.”
제보자는 어딘가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로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저는 증거를 제공하지도 않을 거고, 증언하지도 않을 거고, 인터뷰도 하지 않을 거예요.”
“네?”
기자는 황당한 소리에 표정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설마 이번에는 색다른 방식으로 허탕 치게 되는 건가?’
기자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제보자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연관될 요소는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대신 기자님을 도와드리죠.”
제보자는 아이스 커피를 한 모금 작게 마시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알렉산더 본사 건물의 뒷문을 내일 새벽 3시에 열어두겠습니다. 보안도 한 시간 동안 해제해 둘게요.”
“그러니까 직접 지하로 와서 증거를 가져가 주세요.”
제보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
제보자가 떠나간 카페 안, 기자는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어.’
그렇게 기자는 직접 건물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