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피부를 스치며 기자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샌프란시스코의 밤거리는 오브젝트 사태 이후 평소보다 한층 더 적막했고, 그 고요함 속에서 심장 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알렉산더 그룹 본사 건물이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을 드리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제보자의 말대로였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마지막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지만, 진실을 향한 의지가 불안함을 밀어내 버렸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CCTV를 피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제보자가 CCTV 등을 무력화하겠다고 했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될지도 모르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뒷문에 다다르자,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제보자가 말한 것처럼, 문은 쉽게 열렸다.
차가운 금속 문의 감촉이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기자는 깊은숨을 내쉬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건물 내부는 예상보다 어두웠다.
기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 손바닥으로 가리고 앞을 밝히기 시작했다.
억눌린 빛이 기자의 발밑만을 가까스로 비춰주었다.
복도는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어둠 속에서 기묘한 형상으로 일그러져 보였다.
평소 보던 착한 기업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
제보자가 알려준 루트대로 전진하던 도중, 뭔가 이상해서 걸음을 멈췄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방 너머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자는 문을 열지 않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제보자가 확보했다는 한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기자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멈춰 섰다.
시간이 1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무거운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기자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군인처럼 중무장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들의 무기가 희미한 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빨리 찾아.”
한 남자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기자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이 찾는 대상이 자신인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보자의 배신일까?
아니면 제보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확실한 건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무장한 이들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들의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 올려져 있었고, 발견 즉시 발포할 태세였다.
무기를 든 사람들이 건물 내부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잡힐 것이 분명했다.
‘움직여야 해.’
기자는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
복도의 그림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하면서, 기자는 머릿속으로 탈출 경로를 그렸다.
‘출구는 어디지?’
기자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들어왔던 뒷문으로 나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피해 어두운 곳으로 도망치기를 반복하자, 기자는 어느새 지하 깊숙한 곳에 들어와 버렸다.
어두운 건물과 달리 밝은 빛이 내리쬐는 지하에는 투명한 벽으로 구분된 격리실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오브젝트 격리시설처럼 보였다.
‘….’
각 격리실 안에는 사람들이, 아니 한때 사람이었던 존재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기자의 숨이 턱 막혔다.
공포와 경악,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몰아쳤다.
하지만 기자는 전문가다운 냉정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뒤틀린 신체를 가진 사람들.
입에서 끊임없이 지렁이를 토해내는 사람들.
뒤틀리다 못해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들.
아직도 신음을 흘리며 살아 있었지만, 마치 해부된 것처럼 오장육부가 전부 드러난 사람들.
격리실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참한 광경이 가득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기자의 마음속에서 분노와 연민이 교차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끔찍한 진실을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발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을 때마다 기자의 손은 떨렸고, 마음은 무거워졌다.
마지막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는 순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한 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격리실들과는 달리 불투명한 방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이상하게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기자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호기심에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검은 액체 속에 반쯤 잠겨 있는 불길한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는 오브젝트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매우 위험한 종류의 오브젝트인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퉁. 퉁.
그 순간, 소음기에 잠긴 묵직한 발포음이 적막을 부쉈다.
기자는 몸을 뒤흔드는 강한 충격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자, 손바닥이 순식간에 흥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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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보니, 진한 붉은색의 핏물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천히,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기자를 찾아 돌아다니던, 중무장한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과 여전히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기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기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를 꼭 쥐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지며, 기자의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천천히 다가오는 군화 소리.
시야 끝에는 찰랑거리는 검은 액체.
기자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검은 액체에 닿자, 검은 액체가 작게 꿀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사라져갔다.
***
황금 사신이 불러서 도착한 좁고 어두운 공간.
나는 검은 사신으로 봉인된 구슬을 들고 좁은 방 밖으로 나섰다.
뚜방뚜방.
기온이 상당히 낮은 곳인지 발에 닿는 옥의 감촉이 서늘했다.
짧은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자, 커다란 공간이 나를 반겨주었다.
‘외신의 신전인 건가?’
척 보기에도 외신을 그린 것 같은 의미심장한 부조들도 그랬지만, 가장 외신의 느낌을 풍기는 것은 중앙에 위치한 조각상이었다.
얼핏 보기엔 회색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색의 옥을 엮어 만든 잠들어 있는 외신 조각상.
벽면에 부조로 만들어진 수많은 외신보다 대단하게 묘사된 조각상이었다.
‘으음.’
나는 그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벽면에 조각된 외신 중에는 붉은 외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매번 난장을 피우는 붉은 외신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 있나 보네.
조각상을 지나쳐 조금 더 걸어가니, 제임스와 황금 사신이 보였다.
‘미안해….’
황금 사신은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제임스에게 달라붙어 있었고, 제임스는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헬멧이 물리적으로 쪼개질 정도의 정신 오염이었으니, 당연히 고통을 줬어야 했겠지.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황금 사신을 계속 쓰다듬어 주면서 쿠키를 먹였다.
그런 제임스의 눈꺼풀이 빨개서 조금 웃겼다.
히히.
나는 제임스에게 다가가서 봉인된 구슬을 내밀었다.
그러자 제임스는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들고 있던 구슬을 다시 나에게 돌려주었다.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 같군. 특히 검은 사신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점이 더욱 위험해.”
흠, 그래?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안 해주려나?
나는 그 구슬을 다시 받아 들고는 그런 마음을 담아 제임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제임스는 내가 원하는 바를 금세 알아채더니, 이제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기계 거인들의 경로를 추적해서 알아낸, 황제 개구리 사태의 발원지라는 이야기나.
같이 일하는 연금술사가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이 ‘외신’이라는 존재는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시 이 구슬은 내 느낌대로 색채 우주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확신이 들자, 구슬을 감싼 검은 사신들을 털어내 버렸다.
그리고 공간을 강하게 붙잡고 구슬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그그극.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으스러지지 않았다.
‘!!!’
인간 시절로 치면 호두를 맨손으로 억지로 으스러트리려 하는 듯한 느낌!
그냥 물건이나 오브젝트로 보기엔 너무 단단해서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공간의 힘으로 파괴.>
음.
저 파괴 조건은 그러니까, 힘이 부족하다는 뜻이지?
나는 그대로 공간의 헤일로를 뒤집어쓰고 있는 힘껏 공간을 으스러트렸다.
으드득. 으드득.
그러자 점점 금이 생기면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부서지는 순간,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엄마 대단해!’
‘안 아픈 엄마!’
검은 사신들은 나를 올려다보며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폴짝폴짝 뛰었다.
하긴, 염원에 잠식된 옛 신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겠지.
오히려 염원의 격류에 휩쓸려 본 나로서는 검은 사신들에게 봉인하라고 시킬 수 있었던 점이 더 신기했다.
제임스를 따라다니며 외신의 신전을 관람하고 돌아와 보니, 미니 사신들이 이리저리 마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황금 사신들은 머리카락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머리카락을 복슬복슬하게 바꾼 상태였다.
검은 사신 솜뭉치가 부러웠나 보네…?
다만 머리카락 볼륨이 부족해서 그런지, 솜뭉치보다는 새우튀김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다.
검은 사신들은 솜뭉치 상태에서 팔다리를 길게 만든 뒤, 황금 사신들과 뛰어다니고 있었다.
검은 사신들이 그러고 뛰어다니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솜뭉치 상태로 움직이기 힘들어서 저렇게 변신한 것 같았다.
하긴 주황 사신처럼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면 엄청 불편하겠지.
나는 놀이터에 나온 아이들처럼 뛰어다니는 검은 사신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
‘?’
미니 사신 정원을 모르는 검은 사신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내 말대로 근처로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나는 새로 정원에 합류한 검은 사신들과 함께 미니 사신 정원으로 돌아갔다.
***
차가운 금속 벽으로 둘러싸인 소각장.
거대한 기계의 둔중한 울림만이 이 죽음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온갖 종류의 폐기물들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그중에는 평범한 쓰레기부터 의료 폐기물, 그리고 때로는 더 어두운 비밀들도 섞여 있었다.
그때, 무거운 철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자가 들어섰다.
그들은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인체의 윤곽이 뚜렷한 검은 비닐 자루.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그 자루를 폐기물 더미 위로 던졌다.
털썩.
무거운 소리와 함께 자루가 쓰레기 더미 위로 떨어졌다.
비닐이 찢어지며 그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얼마 전까지 진실을 좇던 기자의 모습이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여전히 공포와 결의가 뒤섞인 표정이 남아있었다.
꽉 쥔 주먹에서는 산산조각 난 카메라의 일부가 보였다.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진실의 파편이었다.
그때, 기자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흘러나왔다.
짙은 검은색의 액체.
그것은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천천히 움직였다.
‘인간….’
소리 없는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는 의지, 혹은 감정에 가까웠다.
‘죽으면 안 돼….’
검은 액체는 점점 뭉쳐져 하나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것은 옛 신의 형상이었다.
그 형상을 한 조그마한 검은 덩어리는 기자를 내려다보며 슬픈 의지를 내뿜었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은 형상은 다시 액체로 변하더니 천천히 기자의 품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각장의 기계들은 여전히 무심하게 돌아갔다.
소각장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기자의 손끝이 살짝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