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르륵-.
갑작스러운 불길 소리에 눈을 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눈앞에는 불길은커녕 낯선 풍경만이 펼쳐져 있었다.
현실감 없는 광경에 혼란스러웠다.
‘꿈인 건가…?’
꿈속에서의 자신은 높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머리 위로는 짙은 구름이 뒤덮여 있었고, 발아래로는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검은 액체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석유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검은 액체 위로 삐죽삐죽 솟아오른 기암괴석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춥네.
절벽 위로 바람이 불어오자, 차가운 바람에 살이 에이는 듯했다.
고지대라서 그런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숨을 쉬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꿈의 시야가 탁 트인 풍경으로부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꿈속의 자신은 거대한 동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륵.
조금 특이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동굴 입구는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이상하게도 내부가 선명하게 보였다.
꿈속이라 그런 걸까?
넓지만 길고 구불구불한 동굴을 하염없이 나아가길 몇 분, 동굴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밖과 달리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공터.
그 공터 구석에는 거대한 돼지 한 마리가 자기 몸을 태우고 있었다.
붉은 불길이 돼지의 몸을 감싸며, 동굴 내부에 온기를 전해주었다.
돼지 주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마치 난민처럼 허름한 옷을 걸치고 동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엄마….’
소리처럼 들렸지만, 소리가 아닌 무언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다.
동굴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시선.
그곳에는 정말로 거대한 형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 피부에 땅에 뿌리 내린 듯한 다리, 그리고 길쭉한 양팔을 가진 존재였다.
게다가 그 옆에는 그 거대한 형체와 똑같이 생긴 검은 덩어리들이 잔뜩 있었다.
꿈속의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존재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피부, 길쭉한 팔, 그리고 조금 다친 것처럼 보이는 손톱.
한참 동안 팔을 내려보던 꿈속의 자신은 거대한 존재를 향해 꾸물꾸물 기어갔다.
그렇게 점점 거대한 존재에게 가까워질수록, 마치 마약을 먹은 것처럼 마음속이 반가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엄마…!’
그리고 거대한 존재의 피부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끔찍한 고통과 함께 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픈 엄마….’
하지만 꿈속의 자신은 손이 녹아내리는 고통보다, 가슴속에서 큰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앙대….’
‘아프지 마….’
주변에서 9개의 하얗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검은 덩어리들이 꿈속의 자신처럼 슬픈 의지를 하염없이 흘렸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꿈이 맞기는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주변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
미니 사신 정원의 마시멜로 평원.
하얀 아귀가 뀨힝힝하고, 하얀 아귀 소각로 골렘이 뛰노는 땅.
내가 새로 발견한 검은 사신들을 데리고 미니 사신 정원에 도착하자, 황금 사신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황금의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은 모습.
‘얘네들은 매번 이러네….’
황금 사신들은 새로운 동생이 생기면 언제나 우글우글 몰려들어서 축제 분위기를 조성했다.
동생들을 위한 황금 사신 나름의 배려인 걸까?
‘복슬복슬 동생!’
‘새로운 동생!’
‘엄마도 복슬복슬!’
황금 사신들은 나와 검은 사신들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행복으로 가득 찬 의지를 흘렸다.
그리고 검은 사신들에게 달려들어서 꼭 껴안은 뒤, 통통한 볼과 볼을 맞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복슬복슬한 털 속으로 황금 사신이 파고들었다.
검은 털 뭉치에서 튀어나온 검은 얼굴 아래로, 황금색 해맑은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따뜻해!’
‘복슬복슬!’
황금 사신들은 새로운 동생이 나타난 것이 마냥 즐거워 보였다.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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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사신 대회의에서 매번 슬픈 표정으로 딱딱한 쿠키를 먹길래, 동생이 늘어나는 걸 싫어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하긴 그런 걸 신경 쓰는 아이들이었다면, 동생들의 투표권을 빼앗아버렸겠지.
‘복슬복슬!’
‘복슬복슬!’
황금 사신들은 복슬복슬의 의지를 끊임없이 외치며, 자기 머리카락을 복슬복슬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들은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외신의 신전에서 본 황금 사신들처럼 털 뭉치 새우튀김으로 변하는 황금 사신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이제 마시멜로 평원에는 회전초처럼 바닥을 굴러다니는 황금털 새우튀김과 검은 솜뭉치들이 가득해졌다.
그렇게 언제나 행복한 미니 사신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악한 장난의 목소리, 주황 사신의 속삭임이었다.
으음.
도대체 언제쯤 분리가 되는 거지?
황금 사신끼리 융합했을 때는 금방 분리되던데, 나는 상당히 오래가네.
아무래도 내버려 두면 영원히 분리될 것 같지 않아서, ‘융합의 헤일로를 이용해서 분리해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주황 사신이 속삭이는 이야기 중에서 상당히 재미있어 보이는 장난이 들려왔다.
‘오.’
내가 절로 감탄할 정도의 아이디어였다.
주황 사신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나는 주황 사신의 아이디어를 곱씹어 보았다.
‘환상의 별사탕 장난’이라….
정말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히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환상의 헤일로를 뒤집어쓰고 양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다.
환상으로 만들어진 설탕의 실들이 내 손가락 끝에서 춤추듯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실들은 공중에서 얽히고설키며 점점 더 큰 덩어리로 뭉쳤다.
그 덩어리들은 이리저리 뭉치며, 형형색색의 맛있어 보이는 별사탕들로 변했다.
수많은 별사탕이 밤하늘의 별처럼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앗!’
‘사탕이야!’
‘엄마표 사탕!’
황금 사신들은 데굴데굴 구르던 걸 멈추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별사탕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별사탕 속에서 황금색 장작이 은은하게 자리 잡았다.
황금 사신의 머리통만 한 반짝이는 별 모양 사탕.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그 사탕은 미니 사신을 유혹하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맛있겠다….’
황금 사신들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염없이 별사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환상의 헤일로를 언령의 헤일로로 바꿔쓴 뒤, 한 가지 규칙을 부여했다.
단순하지만 막대한 장작이 필요한 규칙.
[미니 사신에게 닿을 것 같지만, 절대로 닿지 않는다.]
그러자 별사탕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황금 사신들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와아!’
‘별사탕!’
황금 사신들은 엄마가 주는 사탕인 줄 알고,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별사탕!’
머리 위에 둥실둥실 떠오른 별사탕을 향해 점프!
하지만 사탕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슬쩍 멀어지며 황금 사신의 손을 피해버렸다.
‘앙대!’
황금 사신은 별사탕을 붙잡기 위해 시간 가속을 쓰기도 하고 유령화까지 사용했지만, 결코 닿을 수 없었다.
‘앙대!!’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주황 사신과 함께 히히 웃었다.
황금 사신들은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별사탕을 쫓아다녔다.
마시멜로 평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탕을 잡으려 했지만, 매번 허탕을 치고 말았다.
‘거의 다 잡았어!’
‘도와줘!’
‘앙대!!!’
서로서로 상대방의 별사탕을 잡아주려고 하는 등, 황금 사신은 별사탕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금 사신의 힘으로는 별사탕을 붙잡을 수 없었다.
황금 사신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닿지 않는 별사탕을 향해 손을 뻗으며 울먹였다.
‘앙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탕을 잡지 못하자, 황금 사신들은 슬픈 얼굴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그저 닿을 수 없는 슬픈 별사탕을 하염없이 올려다봤다.
‘별사탕….’
***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의식이 깨어났다.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며, 기자의 시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검게 탄 부스러기들이었다.
코끝에는 꿈속에서 맡았던 석유 냄새가 맴돌았다.
‘이 부스러기들은 뭐야? 내 침대가 아닌 건가?’
기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이 뻐근했다.
마치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처럼.
탄 부스러기들과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헤치며 간신히 일어섰다.
그제야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가득 메운 짙은 구름.
빛 한 줄기 없는 어두운 공터.
코를 찌르는 악취.
사방으로 펼쳐진 끝없는 쓰레기 산.
“쓰레기 매립지? 어째서…?”
갑자기 이상한 곳에 떨어졌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주변이 너무 잘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혼란스러움에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손에 뭔가 묻어나왔다.
붉게 말라붙은 핏자국.
조심스레 더듬어 보니 이마 정중앙에 둥근 피딱지가 달라붙어 있었다.
“핏자국…?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왔는지, 모든 것이 안개 속에 가려진 듯했다.
기자의 마지막 기억은 평범했다.
언제나처럼 출근해서, 퇴근하는 일상 그 자체였다.
주머니를 뒤졌지만, 핸드폰도 지갑도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은 너덜너덜했고, 가슴팍에도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이건… 내 피야?”
공포와 혼란이 밀려왔다.
‘괜찮아. 인간.’
그러나 동시에 이상한 평온함도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그를 안심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기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다.
기자는 쓰레기 더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선, 집으로. 집으로 가자.”
그렇게 기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