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8
나는 이 세상에 발을 들인 후로 수많은 시선 속에서 살아왔다. 눈치가 없다시피한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따가운 증오 속에서 말이다.
저택에서부터 시작해서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너무도 직설적인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어느 정도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서 지금 날 바라보고 있는 예술 교단 사람들의 시선에선 대부분 열기가 묻어나오고 있다.
변태 사도가 그랬고 얼마 전 거리에서 봤던 변태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들은 나란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뇌리에 새기기 위해 노력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 이 노인만큼은 달랐다. 이 노인은 다른 예술 교단의 사람을 흉내내려고 했지만 그 안에 담긴 광기를 따라잡진 못했다.
내가 대놓고 매도의 말을 내뱉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교단의 인원들이 내 목소리를 귀에 담으려 하는 동안에 이 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으니까.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이 자가 예술 교단의 사람이 아님을 확신한 나는 신성을 끌어 올려 눈 안에 담았다.
이전에 미라의 기일을 지나며 새로이 개화한 신성은 즉시 내 뜻을 따랐고 노인의 안에 도사리는 기운을 내게 보여주었다.
예술 교단의 사람들이 지닌 조화의 신성 아래에 도사리는 불온한 기운.
꽤나 잘 숨겨 두었기에 저를 알아차린 자는 존재치 않았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나는 주신의 사도이며 악신의 적대자니까.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나는 즉시 그 뒤편에 숨겨진 것을 까발리려다 재밌는 생각이 들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저 녀석의 정체를 직접 까발려도 문제는 없어. 변태 사도는 내 말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어렵잖게 저 녀석이 악신을 모시는 자라는 것이 드러나겠지.
근데 말야.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면 저 멍청이가 잔뜩 분탕을 칠 여유를 주게 되잖아.
안 봐도 뻔해. 네가 뭔데 날 의심하냐면서. 온갖 안 좋은 소문을 끌고 다니는 년이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려 든다고. 온갖 난리를 치면서 시간을 끌다가 추한 최후를 맞이할 걸.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입으로 가짜라는 걸 이야기하게 만들자. 분노 속에서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게 하는 거야.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면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기. 저기. 할아버지.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예?”
내 순진무구한 표정을 본 노인은 왜 내가 자신에게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는 듯 의문을 품었다.
“세우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렇게 징그러운 눈으로 절 쳐다보는 건가요?”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뒷말이 이어지기 무섭게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으니까.
찡그려진 노인의 얼굴에 묻어나는 분노는 뭇 어린 아이들의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살벌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조금의 위압도 주지 못했다.
그의 분노가 내게 가져다 준 것은 오히려 메스가키 스킬이 가져다주는 고양감과 즐거움이었다.
그래. 이거지. 툭툭 건드리면 튀어 오르는 게 보여야 놀리는 맛이 있잖아.
오랜만에 재미난 장난감을 만난 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왜 인상을 찌푸리시는 건가요?♡ 힘을 잔뜩 준다고 죽은 게 살아나진 않을 텐데요?♡”
“…건방지고 오만한데다 품위도 없으시군요.”
“아!♡ 설마 섰는데 그 정도인 건가요?♡ 풉♡ 죄송해라~♡ 티가 전~혀 안 나서 몰랐어요~♡ 실수를 해버렸네요~♡”
단어의 수위가 강했던 탓일까. 내 목소리를 감상하던 교단 사람들의 표정이 아연해졌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화났어요?♡ 혼내주고 싶어요?♡ 해봐요♡ 몸도 마음도 그것도 허접한 할배가 뭘 할 수나 있을까 싶긴 하지만♡”
때려보라는 듯 얼굴을 들이밀고 있으려니 노인이 꾹 쥔 주먹을 뻗는 게 보였다.
그의 주먹은 자글자글한 주름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건했지만 내 입장에선 그저 어설플 뿐이었다.
놀림 당하다가 폭발한 아서가 제발 꿀밤 한 대만 때리게 해달라면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 쪽이 더 위협적일 것 같네.
가뿐히 노인의 주먹을 붙잡은 나는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에 조금씩 힘을 더했다.
손아귀가 비틀리는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던 듯 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비명을 내질렀다.
“제가 손을 붙잡아드린 게 그렇게나 기쁘신가요?♡ 무릎까지 꿇으며 감사를 표하시다니♡”
“이… 년이!…”
“푸하하핳♡ 여자와 손을 맞잡은 게 처음이란 건 알겠지만 그래도 좀 역겹네요♡ 토 나올 것 같아요♡”
“알른 영애! 그 쯤 하시지요! 아무리 당신이라 한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교주가 날 말리기 위해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악신의 추종자가 제 가면을 벗고 본래의 힘을 끌어올렸다.
예술 교단의 신성이 지닌 조화가 사라진 후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공허였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기운. 없기에 존재하는 것.
악신의 추종자는 자신의 기운으로 나를 침범하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지닌 주신의 신성이 추종자가 지닌 공허를 빛으로 가득 채워 버렸으니까.
나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를 느낀 듯 창백해진 추종자의 표정을 보던 난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한심해라~♡ 감정 조절도 못 해~♡ 연기도 허술해~♡ 자그마한 여자애한테 압도당할 정도로 연약해~♡ 거기에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허접한 고자새끼라니♡ 도대체 왜 사는 거야?♡”
“씹… 크헉!”
노인은 터질 듯 시뻘개진 얼굴로 분노를 쏟아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내 발등이 노인의 콧등에 닿았다.
뼈가 부서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던 노인은 벽에 부딪혀 멈추고 나서 몇 번인가 움찔거리다 정신을 잃었다.
노인이 기절을 함에 따라 그의 정체를 숨기던 권능이 풀리며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 노인의 거죽 아래 감춰져 있던 것은 기껏 해봐야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이 무슨.”
“뭐긴 뭐야. 저런 허접허접한테 속아 넘어갈 정도로 너희 교단 수준이 낮단 거지.”
쏘아내듯 교주를 타박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회의장 바깥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니까 기분이 좋네.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야.
<루시.>
‘…왜 그래요? 할아버지?’
그 어느 때보다도 엄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콧노래를 멈추고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게냐?>
‘어. 그게.’
방금 전에 내가 뭐 잘못 했나? 좀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좋았잖아.
예술 교단이 함정에 빠지는 걸 막았고 잠입해있던 악신의 추종자를 찾아내기까지 했으니까 말야. 아. 혹시.
‘악신의 추종자 앞에 조심성 없이 다가간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네 강함을 아는데 그런 걸 걱정하겠느냐.>
‘…어. 그럼 뭐에요? 진짜 모르겠는데.’
<하아아.>
할아버지의 한탄어린 한숨을 들은 나는 무심코 어깨를 움찔했다. 그를 본 칼과 에린이 무슨 일 있느냐고 묻기에 난 고갤 내저으며 별 거 아니라 답하고 빠르게 응접실을 향해 걸었다.
<귀족가문의 영애라는 녀석이 세웠네 작네 떠들어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느냐!?>
‘…아. 그쪽이에요?’
<그럼 이것보다 더한 잘못이 어디 있느냐!>
‘아니. 뭐. 제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해댄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내가 상대를 도발할 때 험악한 말을 내뱉은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이제와서 그걸 지적한들.
‘뭣보다 전 제가 바라지 않아도 저런 말을 하게 되는 걸요.’
<어디서 나를 속이려드느냐! 중간부터 네 의지로 그런 말을 했잖으냐!>
‘그렇게 해야 상대가 열 받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할 내용이 아니다! 아직 약혼도 치르지 않은 여자아이가 그런 단어를 입에 담다니! 다른 사람은 허락해도 나는 허락 못 한다!>
진심으로 이를 심각하게 여기는 듯 할아버지의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물론 난 그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루시의 교양이니 품위니 하는 건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박살난 상태였는걸.
메스가키 스킬이 있는 한 이걸 복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서 뭐 하겠어.
*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끝나기 전에 돌아온 변태사도의 얼굴에는 슬픔이 묻어나 있었다.
그 슬픔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악신의 추종자에게 거죽을 빼앗긴 노인을 향한 애도겠지.
변태사도는 무거운 마음을 애써 웃음 짓는 걸로 감춰보이고는 내가 떠난 후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줬다.
“영애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그 악신의 추종자야말로 누구보다 이번 일을 적극적으로 몰아붙이던 인물이었거든요.”
내가 추종자의 정체를 밝혀냄에 따라 여론이 한 쪽으로 기울어버렸고 그렇게 예술 교단에서 세웠던 계획은 파기 됐다.
“대신 교단 내부의 단속을 하기로 했습니다. 또 다른 잠입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변태사도는 여느 때와 다르게 진중한 얼굴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영애.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저희는 저희 사이에 누군가가 침입했단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유릭 주교의 명복을 빌어주지도 못했을 테고요.”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어나가던 변태사도는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이라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교단의 은인인 나에게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다면서.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별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우선 네 변태성을 끌어 모아서 만든 기술을 허접한 에린한테 알려줘. 안 그래도 허접한데 자존감마저 바닥을 치니까 너무 한심해서 웃음도 안 나오더라.”
“에린님께서 바라신다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종강 파티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 해 줘. 네 손길은 징그럽고 역겹지만 특별히 참아줄게.”
“영광입니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악신한테 당했을 그 허접한 노친네한테 이야기를 전하게 해 줘. 그런 허접한테 진 바보바보한테 한 마디 해주고 싶거든.”
변태사도는 내 마지막 부탁을 듣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내 눈을 마주하고는 눈가를 붉히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프레테. 여신의 이름을 걸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목소리가 유릭 주교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극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영애의 애도가 반드시 유릭 주교의 원혼을 풀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난 변태 사도에게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시야 뒤 편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