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줘살려줘살려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연구소장은 언제나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해야 하는데, 분석해야만 하는데!
무서워무서워무서워.
노인이 정육점에서 고기를 고르듯이 납치된 사람을 한 명 끌고 갔다.
바이올린을 한다던 여자였다.
납치된 사람 중에서 유독 겁에 질려 있던 여자였다.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 올리고 생각한다.
노인은 여자를 강철 돼지상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돼지상에선 타다 남은 뼈 무더기가 후드득 하고 바닥에 흩뿌려졌다.
바닥에 있던 정체불명의 뼈 무더기의 정체가 밝혀졌다.
돼지상에선 저절로 불길이 치솟더니 잠잠했던 비명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하실을 가득 메우던 비명 소리의 원인도 밝혀졌다.
삐걱대며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메모를 한다.
오브젝트에 대한 정보를 적어 나간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연구소장다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
“야! 이쪽에도 카메라 설치해. 서울 숲 경계를 넘지 않도록 조심하고! 넘어가면 그대로 박살 나니까 조심해!”
카메라를 설치하는 사람들은 세심하게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었다.
서울숲의 경계를 넘어선 전자기기는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박살이 나니까, 어쩔 수 없겠지.
한산했던 서울 숲 입구는 이젠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부 조사를 위해서 들어가는 팀의 서포팅을 위한 캠프를 차리고, 숲에서 나올지도 모르는 오브젝트를 관측하기 위해서 카메라도 잔뜩 설치하고 있었다.
서울 숲에서의 집단 폐사 사건, 그리고 서울 숲 입구에서 발견된 ‘회색 사신’의 흔적. 그 두 가지의 시너지는 굉장해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특히 1위에 집착하는 인간의 습성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관리하는 오브젝트 중 가장 위험한 오브젝트의 연구소 탈출’이라니, 난리가 날 법도 하다.
내 처지에서는 딱히 피해를 준 적도 없는데, 어느새 위험도 1위로 랭크되어 있었다. 편하게 살기에 나쁘지 않은 칭호라서 감사히 받아들이는 중이다.
사실 굉장히 멋진 칭호 아닌가?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오브젝트 회색사신!
사실 좀 더 유명해지면 ‘우는 아이는 회색사신이 잡아간다!’ 같은 민담이 생길지도 모른다. 후후.
특히 이런 부류의 명성은 이렇게 사람을 불러들이고 싶을 때는 굉장히 유용했다.
세희 연구소에서 만든 캠프도 있었는데, 그쪽으로는 기자들이 잔뜩 몰려가서 질문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회색 사신이 연구소를 탈출한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리 소홀로 국민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셨는데, 어떤 보상안을 준비하고 계시는 건가요?”
“이번 폐사 사건도 회색 사신이 벌인 것으로 보이는데, 회색 사신의 탈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건가요?”
기자를 상대하는 김중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찌어찌 대응을 하는 걸로 보였다.
그를 도와야 하는 오예린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터질 줄 알고 어디로 외근이라도 나간 게 아닐까 싶었다.
서울숲 입구에서 숲 안쪽을 향하는 행렬은 끊이질 않고 있었는데, 이 정도 대규모 수색이면 이세희 소장도 쉽게 발견되지 않을까 싶었다.
뭐, 세희를 발견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잔뜩 부른 거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서울숲으로 향하는 행렬에 슬쩍 끼어들어 숲 안쪽으로 향했다. 1년 만에 다시 오는 서울숲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서울 숲 마을의 전경은 1년이 지나도 여전해 보였다. 목제 건물들, 자갈로 만든 도로, 전봇대가 없는 길거리. 마치 중세의 어느 마을을 잘라다붙인 것 같은 풍경이었다.
서울 숲 마을은 서울 숲 내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거주지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내연기관 사용 불가 등의 이유로 중세 시대처럼 살아가는 마을인데, 그런 불편함 때문인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반은 범죄자라는 소리가 나오는 곳이었다.
덕분에 서울 인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었다.
서울숲 영역에서 전자기기를 쓰면 어떻게 되냐고? 그냥 부스러져 버린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기존에 존재하던 고층 빌딩이나 도로들도 다 그렇게 없어져 버렸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서울숲 마을은 잘 만들어지고 생활감이 진하게 남아 있는 훌륭한 민속촌 같은 느낌이었다.
고무나 플라스틱, 그리고 아스팔트도 없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1년 만에 다시 와도 그 느낌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신기하게 느껴지던 것은 상점가였는데, 지폐도 부스러지는 곳이라 금화나 은화로 거래를 했다.
저울로 그 금화의 무게를 재고, 그 금화로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과 사기가 가득한 중세 시대식 거래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과자 같은 식품들도 유리나 쇠로 된 통조림, 혹은 가죽 같은 걸로 포장되어 있었다.
시장만 가도 신기한 것투성이라 색다른 문화권의 관광지에 온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물론 오브젝트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다.
불편한 침대, 불편한 시설, 상태가 좋지 못한 음식들, 불안한 치안, 전자기기가 없는 환경. 오브젝트라면 몰라도 먹고 자야만 하는 인간은 관광으로 오기 불편한 곳이다.
이런 곳이라도 사회가 돌아가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지배자의 존재가 그것이다.
현대 문물을 사용할 수 없어서 그저 버려진 땅 취급을 받던 이곳을 가꿔서 나름의 사회가 돌아가도록 한 인물.
한강철.
서울 숲의 왕.
서울 숲의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곳을 다스리는 조폭 두목이다. 화기도 전자기기도 없는 이 무법의 땅에는 어울리는 지배자라고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라면 한 번쯤은 한강철을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단발성의 사고가 아니라면, 한강철의 조직은 분명 뭔가 정보를 알고 있을게 뻔했다.
한강철의 위치? 그야 이 마을에서 가장 크고 좋은 건물이겠지.
그렇게 찾아간 한강철의 거처는 중세 시대 저택을 상상하게 만드는 훌륭한 건물이었다.
저택으로 들어가 보니 확실히 무슨 일이 있어 보였다.
저택 안에는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았고 뭔가 날이 선 듯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세희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저택 내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라고 물어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폐가 없어서 말을 할 수 없으니 그런 식의 해결책은 사용할 수 없었다.
글로 쓰는 것 정도야 가능하지만’회색 사신’은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컨셉이니까 그것도 NG였다.
왜 그런 컨셉이냐고? 행복한 오브젝트 라이프를 위해서 만든 컨셉이었다. 대화가 가능하면 인간과 협상하게 될 텐데,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만든 일종의 규칙이었다.
저택 벽과 천장을 유령처럼 뚫고 다니며 저택의 모든 방을 천천히 둘러보던 내 귀로 의미심장한 대화가 들려왔다.
“이거 외부에서라도 도움을 청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이딴 일로 도움을 청하자고?”
저택 구석의 방안에는 한강철과 몇 명의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여러 사진이 흩어져 있었다.
“벌써 팔다리 분질러진 녀석이 10명은 넘습니다. 실종자도 30명이 훌쩍 넘었고요. 5명씩 뭉쳐 다녀도 잡질 못 하는데, 이거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습니다.”
“밖에서 도움 청하면 뭐 다를 거 같나? 총도 못 쓰는데 외부에서 쪽수 늘려 봐야 의미 없다. 오히려 정부는 서울 숲을 비워 버리는 쪽으로 해결할 거다. 그럼 우리 장사 접어야 하는 거야.”
실종자 사건!
세희가 말려들어갈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사건으로 보였다.
“갑자기 외지인이 많이 들어왔으니 사람 눈을 피해 다니는 그 녀석도 돌아다니기 힘들 거야.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해보자. 어차피 외지인들 많아서 더 이상 정보 통제도 힘들 거다.”
***
서울 숲의 밤은 유독 어두웠다. 전기가 없는 도시의 어둠. 그 어둠을 깨트리는 소리가 마을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잡아!”
“몰아넣어!”
깡패들은 저마다 날붙이를 들고선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한 존재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키가 3m는 되어 보이는 괴인.
삐쩍 마르고 팔다리가 기괴할 정도로 긴 인간이었다. 척 보기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소금쟁이나 농발거미 같은 비주얼이었다.
신체 능력도 그 기괴한 비주얼에 밀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괴인에게 얻어맞은 사람은 뼈가 뚝뚝 부러져 나갔다.
저런 녀석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부에서 처리하려고 생각하다니, 제정신인가?
확실히 저런 괴인이 돌아다니는 걸 외부인이 목격하면 더 이상 숨길 수 없겠지.
오히려 지금까지 숨긴 게 더 신기했다.
한강철의 서울숲 장악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 자신을 왕이라고 자칭할 만한 지배력이긴 했다.
깡패들이 괴인을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동안, 나는 괴인이 튀어나온 집을 수색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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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 시력도 부족하고 야간에 눈이 어두운 인간은 보지 못했겠지만, 저 괴인은 마을 한편에 세워진 작은 집에서 튀어나왔다.
특별한 점이 전혀 없는,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당한 주거지에서 말이다.
‘흐음.’
그리고 그 집에 슬며시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겨 준 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괴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