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시녀에게 부탁해 머리를 묶고 편한 옷을 입은 나는 알른 가문의 훈련장에서 몸을 풀었다.
본래 이 곳에서 훈련을 하던 기사와 병사들이 내 모습을 보고는 경계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던가.
저들이 나를 어찌 생각하던 간에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캐릭터 스펙을 키울 때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인가에 대한 연구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나 있었으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체력을 늘리는 것이다.
체력은 그 어떤 캐릭터를 키울 때도 유용하다.
왜냐하면 체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하루에 더 많은 행동을 할 수 있으니까.
특정 장소를 탐색하는 일에도. 여러 NPC들을 만나러 다니는 데에도. 지금의 내게 필요한 훈련을 하는 데에도 체력은 필요했다.
병약 마법사 컨셉이라도 잡은 게 아니라면 소울 아카데미에서 체력은 필수적으로 키워야 하는 스텟이었다.
그렇다면 이 체력은 어떻게 올릴 수 있는가.
이는 게임의 시간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보통 초반부에 사용하는 방법은 달리기였다.
어떤 스킬이나 특수한 방식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단순한 움직일 때 다들 사용하는 그 달리기 말이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그것들은 중반에 가서야 제대로 된 효율을 낼 수 있다.
초반에는 얌전히 양 손에 무기를 끼고 달리기를 하며 체력과 무기 숙련도를 동시에 쌓는 게 최고였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대략 이주 동안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메이스와 방패를 손에 든 채 죽어라 달리기만 할 생각이었다.
이게 소울 아카데미에서 캐릭터를 육성할 때 가장 효율적인 빌드니까.
준비운동을 끝마친 나는 무작정 훈련장 외각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할 때의 자세나 호흡 같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 온 남자라면 구보는 지겹도록 해보잖아.
제대하고서 꽤나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에 익혔던 것은 그대로 몸에 배어 있었다.
첫 바퀴를 달릴 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숨이 약간 차기는 했지만 그 뿐. 넓디 넓은 훈련장을 한 번 돈 것 치고는 멀쩡했다.
체력 상승의 영약 두 개를 먹은 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나서 한 시간 가량 훈련장을 돌았을 무렵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목표를 달성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숨이 벅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하루 종일 달릴 수 있나? 최선을 다해도 지금부터 한 두어시간 뛰고 나면 쓰러질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 지금 내가 몇 바퀴를 뛰었는 지조차 잊어버렸을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다리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과하게 사용한 폐가 찢어질 듯 아팠고.
메이스와 방패를 든 양 팔이 늘어져서 이제 달린다기보다는 흐느적거리고 있단 표현이 어울리는 상태가 되었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빙의를 하기 전의 나였다면 오래 전의 포기했을 것이다.
나는 이만큼 근성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
헬스장을 세 달 어치 끊으면 한 주 동안 열심히 하다 지쳐서 남은 두 달 반을 날려 먹는 게 나란 인간이었다.
그런 내가 어떻게 힘들어 뒤질 것 같은 걸 꾹 참고 계속 몸을 움직이겠는가.
추측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스킬.
이전에 영약을 먹을 때 공포 극복이 발동 되어 공포가 사라졌던 것처럼 지금도 캐릭터를 만들 때 넣어두었던 스킬이 효과를 발휘하는 거겠지.
지금 같은 경우엔 무너지지 않는 의지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무너지지 않는 의지 스킬 설명에 ‘죽음조차 당신의 의지를 무너트릴 수 없다.’라고 쓰여 있었으니 말이다.
게임 속에선 단순한 즉사 방지 스킬이었던 게 이런 도움을 줄 줄이야.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 주 동안 게임 속 캐릭터가 그랬던 것처럼 죽어라 달리기를 할 자신이.
죽음조차도 꺾을 수 없는 의지가 있는데 그깟 달리기 하나 못할까!
신이 났던 나는 페이스 조절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채 무작정 속도를 높였다.
그게 패착이었다.
내가 한 가지 간과했던 사실은 의지가 생긴다고 해서 딱히 체력이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는 거다.
의지는 의지고 몸은 몸이었다.
내가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한들 몸이 한계를 맞이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훈련장의 차디찬 돌바닥에 널부러진 나는 그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래서 페이스 조절이 중요한 거구나.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려 본 적이 있어야 알지.
다음번부터는 좀 더 몸을 신경 써가면서 달려야겠네.
“루시 아가씨?!”
내 전속 시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괜찮아… 귀 울리니까 조용히 해… 허접…”
지쳤을 뿐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괜찮아 지겠지.
그러니까 옆에서 호들갑 좀 떨지 말아줄래? 네가 허둥지둥대니까 나까지 정신이 사나워지는 것 같거든?
입으로 꺼내면 험한 말로 번역될 것 같아 잠자코 있던 중 시녀가 아닌 다른 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루시 아가씨. 실례가 안 된다면 쉬기 좋은 곳으로 옮겨 드려도 되겠습니까?”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확인해 봤더니 알른 가문의 기사 중 하나였다.
이름은 모른다. 다만 뛰면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쉬면 몸의 회복이 더딥니다. 쉴 땐 제대로 쉬어야 하죠.”
먼저 루시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신기하네.
루시는 알른 가문 내에서 핵물질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다가서면 루시의 지랄에 피폭을 당하기에 베네딕을 제외한 모두가 루시만 보이면 슬금슬금 도망을 친다.
전속 시녀에 나한테 예속된 몸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내게 접근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으음. 안 그래도 차가운 돌바닥 때문에 입이 돌아갈 것 같았는데 잘 됐다.
도움을 주겠다니 기꺼이 받도록 할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좋아. 허접 기사. 내 몸에 손을 대는 걸 허락할게.”
“영광입니다. 아가씨.”
기사는 내 근처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들었다.
그제야 나는 훈련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이 모여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 시선들은 대개 걱정이 담긴 시선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루시가 얼마나 많은 개짓거리를 해왔는데 나를 걱정하겠는가.
그 시선들은 나를 안아 든 기사를 걱정하는 시선이었다.
내게 호의를 베푼 이 기사가 루시에게 무슨 짓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건 좀 과하네. 아무리 루시가 썅년이라고 해도 그렇지 자기를 도와준 사람한테까지 지랄을 할까.
루시가 뭐 자기한테 깍듯한 시녀를 꼬투리 잡아서 쫓아내기를 했나.
요리장이 마음에 안 드는 음식을 내놨다고 주방에 가서 깽판을 쳤나.
교사가 공부하라고 말했다고 욕을 하기라도 했나.
다 했지.
음. 걱정할 만 하네.
이전의 루시가 했던 일을 떠올리고 나니 나를 도와준 이 기사가 더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전적이 화려한데 굳이 먼저 나서서 도와주러 왔다고? 이 사람의 상사가 도와주러 가라고 명령하기라도 했나?
“아가씨. 궁금한 게 하나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네.’
“뭔데.”
“왜 메이스랑 방패를 들고 뛰십니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체력 단련을 하시려는 건 알겠습니다만 처음부터 너무 무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사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갑자기 훈련장에 나와선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 뛰는 내가 이상해 보이는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지.
생전 운동 한 번 안하던 여자애가 갑자기 무구를 들고 한 시간을 넘게 달리고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무구를 들고 뛰어야 체력이 올라감과 동시에 숙련도가 올라가는 말을 어떻게 하냐.
요즘 들어 시녀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지고 있다는 루시 아가씨 괴담에 한 문장이 추가되는 걸 난 원치 않거든?
그래서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기사가 헛웃음을 지었다.
“단련을 시작하려 하신다면 저희한테 물어봐 주십시오. 저희가 매일 하는 일이 이거 아닙니까. 어떻게 단련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설득력이 넘치는 말이었지만 난 기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진정 옳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도 그럴 게 지금 이 세상에선 내가 지닌 스킬이 멀쩡히 발동되고 있잖아.
이건 게임 속 시스템이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이야기야.
그러니 내가 게임 속에서 사용하던 빌드를 그대로 사용하면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는 건데 이걸 어떻게 포기 하냐고.
“아가씨?”
‘배려는 고맙지만 괜찮아요.’
“시끄러워. 허접 기사.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이 시부럴 메스가키야.
배려는 고맙지만이라는 문장은 도대체 어디로 날려버린 거냐.
어? 너는 입에 고맙다는 말을 담으면 그대로 죽어버리는 병이라도 있냐?
조금도 곱다고 할 수 없는 대답을 들은 기사는 죄송하단 대답을 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메스가키어로 번역이 되면 완곡한 거절이라는 걸 도저히 할 수가 없다.
하아. 젠장. 이거 어떻게 못 고치나?
지금이야 저택 안이라서 괜찮다지만 나중에 아카데미 들어가서도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나 진짜 왕따 당하는 거 아냐?
*
루시의 전속 시녀인 에린은 훈련장 한 쪽 구석에서 열심히 달리기를 하고 있는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시간 째 훈련장 외각을 돌고 있는 루시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지 휘청휘청거리는 그녀는 언제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지만 루시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발을 멈추면 죽기라도 하는 듯 꾸역꾸역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왜 저렇게 열심히이신걸까?
루시가 달리기를 시작한 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에린은 루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본래 알던 루시는 저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에린이 아는 루시는 자기가 저택의 하늘인 줄 아는 성격 나쁜 꼬마아이였다.
사소한 일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사사건건 주변의 트집을 잡고,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성격이 나빴으면 그녀의 전속 시녀 자리가 계속해서 비었을까.
보통 다른 가문에서 영애의 전속 시녀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영광이다.
가문의 귀한 사람을 옆에서 보필할 만한 실력을 지녔다고 인정을 받은 거니까.
전속 시녀가 되면 윗사람에 의해 물러나게 될지언정 자기 스스로 전속 시녀의 지위를 포기하는 일은 없다.
알른 저택에서는 달랐다. 루시의 전속 시녀 자리는 영예의 자리가 아니었다.
전속 시녀라는 이름의 권고사직이라는 말은 루시의 시녀를 맡는다는 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지를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그랬기에 에린은 루시의 전속 시녀로 배정받았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여태까지 잘 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미움을 산걸까? 혹시 시녀장님에게 무슨 실례를 한 건 아닐까?
이건 얌전히 나가라는 경고인 걸까?
루시의 전속 시녀로 배정받은 날 밤. 에린은 잠도 자지 못한 채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되뇌었다.
잠시 마주치는 것조차 고역인 루시의 곁에 항상 머무른다는 건 그야말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린은 루시의 횡포에 계속해서 어울려주어야만 했다.
덕분에 낮에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다 밤이 되면 침대머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나날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아침이 왔다는 사실에 에린이 마음을 졸이던 그 날에.
루시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