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지하 깊숙이 마련된 밀실.
그 밀폐된 좁은 방에서 한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극도로 긴장한 그 남자는 식은땀으로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사실 그 남자의 상태는 좀 이상해보였다.
남자가 있는 밀실 안에는 책상에 노트와 펜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인데 말이다.
“여기 노트에… 이름만, 이름만 적으면 풀어주시는 거죠?”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남자는 천천히 책상에 다가서서 노트를 펼쳤다.
펼친 노트에는 유명한 오브젝트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귀여운 강아지’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 밑에는 <오브젝트 명 : __________> 라고 빈칸이 있을 뿐인 평범한 노트였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자는 펜을 손에 쥐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빈칸을 채우기 시작했다.
남자는 <오브젝트 명 : 강아지__> 라고 쓰고는 펜을 던져버리곤 절규했다.
“못 하겠어요!”
그러자 밀실에서 삐익- 하는 큰소리의 부저음이 들리더니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펜을 쥐었다, 놨다.
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
남자의 행태는 뭔가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카운트다운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는 노트 위에 빈칸을 마저 채웠다.
<오브젝트 명 : 강아지47>
후우….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남자는 눈을 뜨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하하. 살았다. 살았어!”
남자는 정말 기쁜 듯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나는 살았어!”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하늘 위로 뻗으며 정말 행복해 보였지만, 그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으악! 뭐… 뭐야?”
창문너머로 기괴한 괴물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쿵.
괴물이 손을 휘두르자 금속으로 만들어진 벽이 우그러들고 움푹 파였다.
투명한 창문은 하얗게 색이 변했고,LED등은 충격으로 애처롭게 깜박거렸다.
쿵. 쿵. 쿵.
괴물의 주먹질은 점점 빨라졌고, 괴물의 크기도 점점 커졌다.
남자는 자신의 책상 밑으로 숨어서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는 살 수 있을 거야.’라고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되뇌고 있었다.
밀실 외벽에서 쇠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자, 괴물이 내리치는 주먹도 멈췄다.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슬며시 뜨자, 괴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하아.”
남자는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폐부의 공기를 토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눈을 깜박이자, 괴물은 코앞에 서있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깜짝 놀란 남자는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괴물의 날카로운 손톱은 제일 먼저 시끄러운 성대를 잘라버렸다.
이름을 적어 내려간 양손을 잘라버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다리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이름을 생각해낸 머리를 양손으로 쥐고 터트려버렸다.
화풀이를 하듯이 남자의 시신을 마구 찢어 발겼다.
LED등이 망가져서 어둠뿐인 밀실 안에 핏물만이 가득 퍼져나갔다.
피에 푹 절은 노트에도 역시 거친 손톱자국이 남았다.
오브젝트 이름 부분이 알아볼 수 없도록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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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은 쓴 웃음을 지으며 피투성이가 된 밀실을 바라봤다.
특수하게 제작된 철판과 유리로 만들어진 밀실은 오브젝트를 막아내지 못했다.
“이번에도 실패로군. 오브젝트에게 명칭을 붙일 자유를 얻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단 말인가.”
나라에서 발행한 제대로 된 오브젝트 보고서라면 1페이지에 꼭 실어야 하는 오브젝트가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오브젝트.
그리고 대부분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오브젝트.
소장은 한국 정부에서 발행한 보고서를 펼쳐보았다.
<이 보고서는 오브젝트 관리 협회의 정식 간행물입니다.>
<이 보고서에 낙서나 필기를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이 보고서의 오브젝트 이름을 바꾸지 마십시오.>
<이 보고서에 있는 글씨를 지우거나 더하지 마십시오.>
<이 보고서는 ‘자격 있는 자’에 의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오브젝트 명 : 이름 없음>
<오브젝트 위험 등급 : 특급>
<관리 가능 여부 – 관리 난이도(상)>
<관리 방법 – 이 보고서를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인간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글을 읽지 못해도 이 내용을 숙지시켜야 합니다.>
<규칙* – 오브젝트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이지 마십시오. 오브젝트 이름에 숫자를 붙이지 마십시오. 오브젝트의 이름을 지을 때는 ‘검증된 표현’만을 사용하십시오.>
<‘검증된 표현’은 따로 첨부된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의 사항 1 – 규칙*을 어길 경우 지구 어디에 있든 ‘이름 없음’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현재까지 그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서류나 영상도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주의 사항 2 – 이 오브젝트에게는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습니다. 언제나 ‘이름 없음’ 혹은 ‘noname’ 같은 단어만으로 불러야합니다.>
<제거 가능 여부 – 제거 불가능.>
<모든 종류의 물리 공격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이름 없음’을 제거할 수 있는 오브젝트는 보고된 바 없습니다.>
<격리 가능 여부 – 격리 불가능.>
<지구 어디에서든 등장 가능합니다. 동시 출현 실험에서 복수의 ‘이름 없음’의 출현을 확인했습니다. 물리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곳에서도 출현하는 것이 관측되었습니다.>
<추방 가능 여부 – 추방 불가능.>
<규칙*을 어길 경우 관측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의 출현을 확인했습니다. 공중과 지하, 수중을 가리지 않습니다.>
<추가 사항 1 – 당신은 이 보고서를 덮을 경우 이 오브젝트를 망각할 것입니다. 이 오브젝트의 특징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이 보고서를 읽은 기억의 편린만은 남아, 오브젝트에게 이름 붙이는 일을 꺼리게 됩니다.>
<추가 사항 2 – 만약, 망각하지 않는다면 관리 협회로 연락 주십시오. 당신은 망각하지 않는 ‘자격 있는 자’입니다. 당신의 능력은 이 세계에 꼭 필요합니다.>
“언제 봐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오브젝트야.”
소장은 다시 보고서를 덮었다.
“그래도 황금뿔을 섞어 만든 강판이 ‘이름 없음’의 침입을 잠깐이라도 막아낸다는 것은 고무적이군. 좀 더 튼튼하게 만든다면 가능성이 보이겠어.”
소장은 연구원들을 부려 다음 실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소장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이름 없음’이 손댈 수 없는 곳에서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면, ‘이름 없음’은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까지 달성된 적 없는 목표지만 말이다.
***
연구소가 정신없이 분주한 가운데, 예린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거 어때요. 세희 언니?”
예린의 손에 들린 것은 고라니 동물 잠옷.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예린의 기행은 끝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그래, 그럼 그거 소품에다가 넣어둬. 김중뢰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와! 정말 고마워요 언니!”
예린은 정말 환한 웃음을 지으며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저렇게 속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연구소는 엄청나게 바빴다.
이유는 하나.
정부에서 내려온 명령서 하나 때문이었다.
<제 1회 오브젝트 박람회 개최>
공문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정말 대충 만든 서류가 손위에서 팔랑거렸다.
내용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요즘 한국에서 오브젝트로 인한 심각한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송파구 싱크홀, 대전 인육 음식점, 서울숲 맥동, 중앙 연구소 해체 등.>
<공포에 빠진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행사를 하나 열기로 했다.>
<각각 연구소에서 격리중인 위험 오브젝트를 데려와라.>
<안전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박람회 형식으로 널리 알리겠다.>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냐?”
절로 욕이 나오는 공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정부에서는 중앙 연구소 사태를 한 번 더 일으키고 싶은 것이 틀림없었다.
위험 오브젝트를 한 곳에 모아서 대규모 행사를 벌이다가 사고가 나면?
오브젝트가 연쇄적으로 우수수 풀려나와서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게다가 이 미친 기획을 한 정치인들은 한층 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했다.
<세희 연구소에서는 특급 위험도의 오브젝트 ‘회색 사신’을 반드시 지참할 것.>
으아아아, 미쳤어.
제 정신이 아니야.
완벽하게 통제되는 오브젝트들을 홍보하는 자리에 회색 사신?
새로운 장소에만 가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신이는 뚜방뚜방 돌아다닐 게 뻔했다.
분명히 박람회장을 관광객들처럼 같이 구경하고 돌아다닐 것이다.
마음 같아선 사신이는 연구소에 고이 모셔두고, 박람회에는 ‘귀여운 강아지’ 나 ‘파란 도마뱀’만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되겠지.
정부의 말을 무시하기도 힘들고, 사신이가 몰래 쫓아올게 뻔했다.
여러 잡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기다보니 도착한 곳은 세희 연구소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연구소 최심부 격리실.
분주한 연구소의 분위기와 달리 언제나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
그 안에서 회색 사신이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으며 뒤집혀서 TV를 보고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뒹굴거리는 꼴을 보면 왠지 모르게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저게 어떻게 회색 사신이야.
회색 고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