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아그라가 나를 방해하러 올 것이라는 것은 정해진 미래나 마찬가지였다.
악신인 그는 자신을 곤란케 할 수 있는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축복을 지닌 자에게 저주를 걸어 그 싹부터 없애버리려 하는 치졸함을 보라.
그는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대적자가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
나도 이를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당혹스러워한 이유는 벌써 아카데미의 던전에서 아그라의 주시를 받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의 던전은 평범한 던전과는 다르다.
이 곳은 아카데미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이공간.
던전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아그라의 영향은 한없이 작은 곳이다.
그러니만큼 이 곳에 개입하는 것은 아그라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럽다.
내가 게임을 할 당시 아그라가 아카데미의 던전에 개입을 하는 건 세 개 이상의 저주를 해제해서 완전히 아그라의 대적자로 찍히고 난 후의 일이다.
아그라의 저주 한 개를 해제한 정도로는 그가 아카데미의 던전에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대체 왜 아그라가 벌써 나를 주시하고 있는 거지?
아카데미의 던전에 개입할 정도로 나를 거슬리는 사람이라 인식하는 이유가 뭐야?
설마 아르마디가 나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축복이 내게 닿아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짜 쓸데가리 없는 무능 주신 같으니.
아그라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적자를 족치려 그러는데 당신은 자기가 주시하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두는 겁니까!
무슨 축복을 주던, 기연을 주던, 아니면 아그라가 개입하지 못하게 방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게임 속에서도 아무것도 안하던 신새끼가 달라질 거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진심이 담긴 기도를 통해 신새끼에게 항의를 하던 중 보스룸 한 구석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땅 아래에서 문이 하나 치솟아 올랐다.
섬뜩한 기운이 담긴 그 문은 분명 던전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던전 안에서 던전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건가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들어봅니다.”
<저건 분명… 아그라의.>
당혹스러워하는 조이와 베네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안함이 치솟아 올랐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내게 휘말린 입장이다.
저들은 아그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나를 향한 아그라의 관심이 저들에게 악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책임을 져야 하겠지.
지금부터 저 두 사람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그건 모두 다 내 잘못일 테니까.
‘일단 진정해요.’
“거기 허접 여러분. 진정해요.”
“이 상황에 어떻게 진정을 해요.”
‘아카데미에서도 눈치를 챘을 거에요. 그러니…’
“아무리 허접한 아카데미라도 이 상황을 눈치 챘을 겁니다. 그러니 기다리면 목이 날아가기 싫어서라도 구하러 오겠죠.”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알른 가문의 백작 영애님과 파르탄 가문의 공작 영애님이다.
둘 중 하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아카데미가 뒤집어 질만한 사안인데 둘 모두에게 일이 생겼다?
문제가 심각해진다면 아카데미 내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저들도 살고 싶다면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렇겠네요. 그 분들도 안에서 무슨 일이 얼어나고 있는지 보고 계셨을 테니까요.”
“소울 아카데미의 교수 분들이라면 금방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에요!”
실제 게임 내에서도 아카데미 시험 도중에 문제가 생겼을 땐 유저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아그라의 저주에 직접 대응하는 것.
새로운 던전이 나타났건 무슨 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건 뭐건 간에 유저의 손으로 저주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버티는 것이다.
아그라의 저주 때문에 일어난 현상을 극복할 자신이 없다면 던전 내에서 시간을 떼우고 있으면 된다.
그럼 머지않아서 아카데미 측에서 구조가 오게 되고 그럼 아무런 위험 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만일 조이와 제이콥이 없었다면 나는 던전을 공략하러 가는 걸 택했을 지도 모른다.
아그라의 저주 때문에 생겨난 현상은 분명 높은 난이도를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이나 막대한 보상을 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그 선택지를 고르진 않을 생각이다.
내 등에 달린 것은 나 하나만의 목숨이 아니니까.
나 때문에 제이콥이 죽고, 내 애캐 중 하나였던 조이가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최대한 안전한 수를 택해야 했다.
그나마 지금 상황은 최악은 아니었다.
아그라의 저주로 생겨난 게 던전이니 말이다.
만약 다른 몬스터라거나 저주 같은 게 이 던전 안에 생겨났다면 그 때는 버티는 것조차 고됐을 거다.
그렇지만 던전이라면 괜찮다.
던전은 아무리 험악한 곳이라도 던전에 불과하다.
저 안으로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던전의 바깥에서 느긋이 아카데미 측의 구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네요. 괜히 당황했어요.”
‘아무 일도 없을 거에요.’
“얼빵 영애. 보기보다 겁이 많군요? 걱정 마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황해선 어찌할 줄을 몰랐으면서 시치미 떼긴.
뭐. 알겠습니다.
저는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니까 특별히 모르는 척을 해드리도록 하죠.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있는 순간에 갑자기 할배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아야! 안심할 때가 아니다! 지금 바닥이!>
바닥? 할배의 말을 듣고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쩌억. 쩍. 하고 점차 균열이 커져가는 게 보이는 듯한 그 불길한 소리를.
제기랄!
나는 말을 하는 것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달려요!’
“뛰어!”
옆에 있는 조이를 끌어안으면서 제이콥에게 달리라고 소리쳤다.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 이 방에서 빠져 나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강제로 던전에 진입하게 된다고!
허나 이 곳에서 탈출을 하기엔 우리가 방의 이상을 파악한 것이 너무 느렸다.
우리가 방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것보다 먼저 바닥이 무너져 내렸고 우린.
*
<…시.>
아. 젠장. 머리가 더럽게 아파.
<…ㄹ시!>
머리만 아픈 게 아니네.
그냥 안 아픈 곳이 없는 거였어.
기사단과 함께 밤을 세워서 훈련하고 난 후에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루시!>
누가 자꾸 날 부르는 거야?
좀 잡시다.
나 지금 더럽게 피곤하고 힘들거든요?
내가 어? 망나니 영애인데 늦잠 정도는 자도 괜찮잖아.
<루시! 일어나라!>
할배의 외침을 들을 순간 다급히 눈을 떴다.
내 바로 아래에 눈을 감은 채 편안한 숨을 내쉬고 있는 조이의 얼굴이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드디어 정신을 차렸느냐.>
‘할아버지. 대체.’
<낙하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눈을 뜨지 못해 걱정했었다.>
낙하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 던전의 바닥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졌었지. 그를 깨닫고 나니 몸의 감각이 점점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몸 여러 곳에 타박상을 입은 듯 자그마한 통증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고 내 등 뒤에는 무언가 올려져 있는 건지 묵직한 감각이 나를 짓눌렀다.
‘할아버지. 제 등에 뭐가 올려져 있는 건가요?’
<바닥의 잔해들일거다. 양이 꽤 되지만 지금의 너라면 들 수 있다. 밀어내 보거라.>
이런 때에 한해서 할배의 말은 틀리는 법이 없었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서 내 등을 짓누르는 것들을 밀어냈다.
그러고서 얼마 있지 않아 후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등에서 느껴지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잔해에서 빠져나온 나는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던전의 풍경은 전체적으로 ‘연금술사가 머무르던 곳’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방금 전 그 던전은 연금술사가 사라진 후에 망해버린 건물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던전은 아직 망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 씨발. 진짜로 좆됐는데?
여기는 ‘연금술사가 머무르는 곳’이잖아.
이 곳은 얼핏 보면 내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던전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둘의 난이도 차이는 극명하다.
연금술사라는 존재가 있고 없고에 따라 너무도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까놓고 말을 해서 여기는 지금의 나로써 공략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스펙이 부족했다.
내가 이전에 미노타우르스를 상대로 발악조차 하지 못하고 쳐발렸던 것처럼 이 던전은 나를 비슷한 꼴로 만들 수 있는 위험도를 지니고 있었다.
좆같은 아그라.
그렇게까지 나를 죽이고 싶었냐?
“으으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지에 대한 방안을 생각하던 중에 조이가 침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내가 잔해를 받아준 탓인지 크게 다치지 않은 그녀는 느릿하게 일어나서는 주변을 살피고는 쉬어버린 목소리를 냈다.
“알른 영애. 여기는 어딘가요.”
‘방금…’
“방금 전에 생겨났던 그 기분 나쁜 던전 안이겠죠.”
“…제이콥 영식은 어디에 있죠?”
‘잘 모르겠어요.’
“저도 그 조무래기에 대해선 몰라요. 방금 전에 깨어난 거라.”
아마도 이 근방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있던 위치는 우리와 크게 멀지 않았으니까.
혼자 패닉에 질려서 마구잡이로 움직이지만 않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겠지.
“그럼 빨리 찾아야. 아얏!”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던 조이는 갑자기 비명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조이의 발목이 완전히 비틀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에 낙하를 하면서 다친 걸까.
‘조이님…’
“얼빵영애. 아프겠지만 가만히 있어요.”
“네?”
나는 무릎을 꿇고서 얼빵영애의 발목에다 손을 가져다댔다.
설마 아카데미 입학시험 중에 아르마디의 자비를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내 손에서 치유의 기적이 펼쳐지자 조이의 발목이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건 대체.”
‘움직여 봐요.’
“얼빵 영애. 움직여 봐요.”
조이는 다시금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더니 방금 전과는 다르게 멀쩡히 발을 움직였다.
치유계 스킬을 지니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던전에서 움직이는 동안에 조이를 업고 다녀야 했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알른 영애.”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그렇지만.”
<여아야. 바깥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움직일 준비를 해라.>
나는 할배의 말을 듣자마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냐.
키메라? 아니면 완벽히 정비된 골렘? 그것도 아니라면 연금술사가 길들인 마수들?
어느 쪽이더라도 우리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다.
우리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한 지금은 도망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이윽고 문 안으로 들어온 것은 몸 전체에 빼곡이 눈알이 박혀 있는 인간의 형체를 한 무언가였다.
잠에 들지 않은 경비병.
키메라 아르고스.
저 녀석이라면 괜찮아.
나는 다급히 조이의 입을 막은 후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닥치고 있어요. 얼빵영애.”
무수히 많은 눈을 지닌 아르고스는 그 부작용 때문에 그 어느 눈으로도 앞을 보지 못한다.
어느 눈으로 세상을 보아도 수없이 많은 잔상이 비치기에 어느 하나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르고스는 가만히 있는 물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있던 가구들과 가만히 서 있는 유저를 구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적어도 게임 속에선 그랬다.
현실에서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아르고스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우리의 앞에 멈춰 섰다.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라. 제발 좀 꺼져.
그 징그러운 눈으로 우리를 관음하지 말고 사라지란 말이야!
이런 기도가 통한 것일까.
아르고스는 그 무엇도 하지 않고 다시 방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발소리가 저 멀리로 떠나간 후에 조이의 입에서 손을 떼어내자 조이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참아냈던 그녀의 눈동자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여긴…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