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이 샌프란시스코를 감싸 안았다.
거리의 네온사인들이 간간이 어둠을 찢어내며 불빛을 토해냈지만, 그마저도 알렉산더 그룹 본사 건물 주변에서는 힘을 잃은 듯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도시의 한 귀퉁이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붉은 머리의 기자는 그 어둠 속에서 천천히, 하지만 확고한 발걸음으로 알렉산더 본사 건물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결의가 공존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잘 부탁해.”
기자의 작은 중얼거림이 밤공기를 가르며 흩어졌다.
그 순간,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검은 덩어리들이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차가운 듯 따뜻한,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올랐다.
검은 덩어리들이 그녀의 피부를 타고 올라가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피부가 마치 밤의 어둠처럼 검게 변하고 그 표면이 주변의 물건을 모방하기 시작하자,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되었다.
물론 칠흑 같은 검은색이기에, 밝은 빛을 쬐어보면 단번에 들키겠지만 말이다.
꾸물꾸물.
기자가 한 걸음 걸어 나갈 때마다, 검은 덩어리로 만들어진 피부는 그에 맞춰서 절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자는 천천히 알렉산더 그룹 본사 건물로 향했다.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는 경비들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림자 속에 그녀가 숨어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경비들을 지나쳐 건물 벽에 달라붙은 다음, 창문을 타고 넘어서 건물 내부로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후우.”
기자는 작게 숨을 토해냈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왔어.’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게 들어온 상태였다.
아마 그녀를 찾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전역을 수색 중인 사병이 많기 때문이겠지.
스르륵. 스르륵.
기자는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을 조용히 나아갔다.
‘이상하게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기괴할 정도로 조용한 복도와 벽에 걸린 그림들이 어둠 속에서 기묘한 형상으로 일그러지는 것까지.
기시감이 들었다.
역시 자신은 일주일의 기억 공백 중에 알렉산더 그룹 본사에 잠입한 걸까?
‘….’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 기자는 기시감이 강해지는 쪽으로 길을 더듬어 갔다.
그렇게 기자는 지하를 향해 뻗어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나긴 지하 계단을 전부 내려가자, 어두운 건물과 달리 밝은 빛이 내리쬐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순간 기자의 눈이 커졌다.
‘여기는….’
끝없이 늘어선, 투명한 격리실들.
이 사각형의 개별 격리실이 끝없이 늘어선 이 공간은 분명, 무언가를 가두고 있던 시설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기자님.”
그때, 기자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즘 센티널을 중심으로 초인협회의 초인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자는 본능적으로 왔던 길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녀는 완벽하게 포위당했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때 센티널이 천천히,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는 것처럼 기자에게 다가왔다.
“설마, 모텔에서 봤던 남자가 기자님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센티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숨겨진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선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났다.
본능적으로 ‘인간을 잡아먹은 냄새’라는 것은 알았지만, 왜 이런 냄새를 맡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기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도망갈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싸우자.”
그녀는 자기 몸을 덮은 검은 덩어리들을 토닥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응….]
[어지러워.]
[선제공격…!]
전보다 배는 어지러워 보이는 검은 덩어리들의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꾸물거리는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초인협회의 멤버들과 센티널은 검은 액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 오히려 더욱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초인들은 물론, 기자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초인들의 강력한 힘과 검은 덩어리의 전투 방식을 고려해 볼 때,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가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검은 덩어리들의 ‘선제공격’은 이제까지와 전혀 달랐다.
기자의 몸에 달라붙은 검은 덩어리들이 크게 부풀었다가 쪼그라들자, 수백 개의 날카로운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화산폭발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 촉수들은 흉포한 크라켄의 촉수처럼 휘날리며, 번개 같은 속도로 주변의 초인들을 향해 몰아쳤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나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으아악!”
초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들의 초능력도 이 검은 덩어리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불꽃과 염력은 검은 피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고속 이동 능력을 가진 초인도 눈 깜짝할 사이에 꼬치가 되어버렸다.
그 위용은 그야말로 ‘특급 오브젝트’급이었다.
“이게 무슨…?”
센티널은 형형색색의 빛의 방패를 만들어 낸 채,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츠아아악!
그리고 썰물의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검은 촉수의 바다가 다시 기자의 몸속으로 되돌아왔다.
온몸에 커다란 구멍이 수십 개씩 생긴 채, 처참하게 쓰러진 초인들.
센티널은 그 모습을 보고는 이를 짓씹듯이 말을 토해냈다.
“감히…!”
그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은 사라져 버렸고, 표정 속에 깃든 것은 극도의 분노뿐이었다.
‘치명적인 한 수를 숨기고 있었군.’
하지만 프리즘 센티널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공격을 연속으로 발휘할 수는 없겠지…!’
생각을 마친 프리즘 센티널의 온몸에서 칠색의 빛이 모여들더니, 두 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기자는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의 파도에 질끈 눈을 감았다.
“으아아아!”
그리고 센티널의 기합 소리에 다시 눈을 뜨자, 검은 덩어리들은 그 빛을 몸으로 맞아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찬 물줄기를 거스르는 것처럼 천천히.
검은 피부는 천천히 깎여나가고 있었지만, 센티널의 힘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검은 덩어리들은 얼마나 강한 오브젝트인 거야?’
그리고 센티널의 앞에 선 검은 덩어리들은 길쭉한 팔을 뻗어, 센티널의 머리 전체를 손아귀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으로 붙잡은 수도꼭지처럼, 형형색색 빛의 파도가 사방으로 솟구치며 지하 시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죽어.]
[나쁜 인간.]
검은 덩어리들의 속삭임과 함께, 손아귀는 그대로 센티널의 머리를 짓이겨 버렸다.
털썩.
머리가 사라진 센티널의 시체가 난장판이 된 지하 한복판에 널브러졌다.
이제 그녀 앞에 남은 것은 죽은 초인의 시체들뿐이었다.
“너희들, 엄청 강했구나….”
그녀의 중얼거림에 검은 덩어리들이 대답했다.
[선제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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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약해.]
기자는 검은 덩어리들의 대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기자는 죽음까지 각오했었지만, 예상외의 결말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긴장을 푼 기자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체시체시체.
그것도 끔찍하게 죽은 시체들로 가득했다.
‘사병들 때는 정신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기자는 시체를 봐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악취가 나는 인간들이 죽자, 악취가 줄어들고 있어서 후련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검은 덩어리들에게 영향받은 걸지도 모르겠어.’
기자는 복잡해지는 생각을 애써 구석으로 밀어 넣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찾아보자. 내 기억과 너희들의 ‘엄마’를.”
그렇게 격리실을 돌아다니려고 하는 순간.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복도 끝에 위치한 강철 문이 튕겨 나왔다.
[위험해!]
[위험해!]
[인류의 적!]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지렁이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초인들의 몸도 폭발하듯이 찢어발겨지며, 지렁이들이 튀어나와 하늘을 향한 격류에 섞여 들었다.
그 지렁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어지러웠고, 굉장히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렁이들의 격류를 직시한 기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순간이동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끝없는 어지러움이었다.
순간 휘청해서 쓰러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
그래서 그런지, 샌프란시스코의 미니 사신들은 나를 보고도 반겨주지 못하고 해롱거리고만 있었다.
‘엄마 안 왔어?’
‘어지러워.’
‘으앙.’
아예 내가 온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감각이 이렇게나 뒤죽박죽인데, 감지 능력이 정상일 리가 없겠지.
‘역시.’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흉흉해 보이는 외신이 하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지렁이들이 수십 수만 개 모여, 대도시 급으로 거대한 똬리를 만든 외신이었다.
‘으, 골치 아파.’
태평양 때처럼 온전한 힘을 가지고 강림한 외신으로 보였다.
시선을 지면으로 내리자, 인간들은 공포에 질린 채 도시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 원인은 길쭉한 양팔을 가지고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죄다 박살 내고 다니는 옛 신 형상의 검은 오브젝트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지렁이들이 아예 보이지 않나 보네.’
하늘을 가득 채운 지렁이 쪽이 훨씬 위험해 보이는데도, 인간들은 검은 오브젝트만 신경 쓰고 있었다.
‘저 녀석, 검은 사신이었어….’
직접 와서 보니, 불변구와 연관이 있어 보였던 녀석은 그저 검은 사신이었다.
게다가 폭주해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중인 것도 아니었다.
지렁이 일부가 지면으로 떨어져 뿌리내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저 검은 사신은 서둘러서 지렁이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하지만 떨어져 내리는 지렁이들이 많아서, 거대 검은 사신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지면에 뿌리를 내린 지렁이들은 지구라는 공간 자체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외신은 굉장히 해로워 보여. 되도록 빨리 처리해야겠어.’
우선 능력 사용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어지럼증을 제거하기 위해, 능력 무효화 헤일로를 뒤집어썼다.
그러자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이 샌프란시스코 전역으로 흩어지더니, 어지러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다!’
‘엄마!’
‘엄마 언제 왔어?’
그러자 내 발밑에서 해롱거리는 미니 사신들이 순식간에 부활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지렁이를 토막 내고 있던 옛 신 형상의 검은 사신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
의아함이 담긴 의지.
너무 멀어서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원본 아귀를 불러내서 그 위에 올라탔다.
‘검은 사신에게 가자!’
그리고 명령을 내리자, 크기만큼 민첩한 속도로 하얀 아귀가 건물 위에서 위로 폴짝폴짝 달리기 시작했다.
뀨!
마시멜로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건물 위를 밟는 걸음걸이가 가볍고 경쾌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시를 주파해서, 옛 신 형상의 검은 사신의 가슴팍을 향해 점프!
하얀 아귀를 커다란 손으로 받아낸 검은 사신은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의지를 내뱉었다.
[엄마….]
[엄마다….]
[엄마!]
그러자 내게서 장작을 잔뜩 흡수하더니, 그 형상이 익숙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사신은 미니 사신의 형상을 취한 채, 하얀 아귀를 들고 싱긋 웃었다.
‘드디어 엄마, 찾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