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1
장례식장에서 도망쳐 나와 교단의 응접실 안에 숨은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슬며시 커텐을 거뒀다가 교단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는 다급히 커텐을 내렸다.
“오오오! 여신의 현신께서 나를 바라보셨다! 내게 영감을 주실 것이야!”
“저 분께선 널 본 게 아니다! 나를 본 것이다!”
“헛소리 마라! 여신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장례식의 엄숙한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광기로 물든 거리의 풍경에 난 다시금 그 여신에 그 신도들임을 체감했다.
평범한 신도들이야 그렇다 쳐도 저걸 말려야 할 교주나 주교 같은 인간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진짜 그 여신에 그 신도들이라니까.
질린다는 생각에 찌푸린 눈으로 창을 살피던 나는 한숨과 함께 안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 곳에는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허접견과 대머리가 있었다.
주인이 곤란해하고 있음에도 지키러 오기는커녕 구경만 한 것에 대한 처벌이었지만 두 사람은 여유로워보였다.
알른 가문에서야 한낱 기사에 불과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충분히 중한 역할을 맡았을 두 사람이니 머리를 박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난 굳이 벌의 내용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건 육체의 힘듦보다는 자존심을 깎아먹고자 하는 의도가 더 컸으니까.
“…저어기. 루시?”
“뭔데. 보들보들한 털말고는 봐줄 것 하나 없는 무능 여우.”
“이제 슬슬 놓아주면 안 되겠느냐? 이러다 진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만.”
“진짜 지능이 부족하네. 정신이 나가라고 이러고 있는 거잖아. 멍청하긴.”
내 두 팔에 안긴 얼빠여우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반항했지만 난 그녀의 불만을 외면했다.
언제는 다른 변태들한테서 날 지켜준다더니 정작 필요할 때 변태들 사이에 합류를 해?
절대 용서 못 해. 넌 교단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내 멘탈을 치유하기 위한 인형이 되어줘야겠어.
발버둥치는 얼빠여우를 가뿐히 제압한 나는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미적감각이라는 스킬을 얻기 전 이 응접실을 둘러봤을 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냥 깔끔하고 좋네라는 생각을 했을 뿐.
하지만 스킬을 얻은 지금은 다르다. 스토커 까마귀에게서 축복을 얻은 지금 나는 이 응접실이 얼마나 치밀한 설계 하에 만들어진 것인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가구의 위치부터 시작해서 가구와 벽의 배색. 사용되는 식기의 디자인. 이외에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요소 하나하나에 예술적인 감각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를 설계한 건 분명 변태 사도일 거야. 그 녀석이 아니고서야 이런 기행을 벌일 수 없을 테니까.
새삼 변태 사도의 대단함을 느끼던 나는 문득 재미난 발상을 떠올렸다.
게임 속에서 미적감각이라는 스킬은 비싼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는 점 이외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능력이었다.
상인 플레이를 해서 금의 최대치를 찍고 싶다면 꽤 유용한 스킬이지만 그 이외에는 딱히 의미가 없었지.
하지만 그건 게임 속의 이야기다. 게임이 현실로 바뀐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서 무술의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최적화를…
“허접견.”
“예! 아가씨!”
“적당히 짖을 수 없어? 시끄럽잖아. 아님 뭐. 일부러 나한테 항의하려고 그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아아. 용서 받기 싫은 거구나? 일부러 나한테 욕을 듣고 싶어서 시비 거는 거구나? 변태 새끼. 징그러워서 발로 밟기도 싫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됐어. 잡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서 검이나 휘둘러봐.”
영문 모를 부탁일 수도 있거늘 칼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 말을 이행했다.
순식간에 칼의 허리춤에서 뽑힌 검이 허공을 베어 가른다. 칼의 검은 알른 영지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것이지만 지금 내 눈에는 새롭게 보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검을 붙잡은 손이다. 긴 세월 동안 검을 휘둘러 온 그의 손은 검에 맞추어져 있었다.
무에 대해 모르는 이가 본다면 기함을 할만한 형태였지만 미적감각을 얻은 나의 눈에 그 손은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칼이 만들어낸 검로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의 검로는 지금의 나에게 황금처럼 값져 보였다.
다만 완벽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뭔가가 부족해. 조금만 더 가면 정말 아름다워질 것 같은데 그 부족한 부분을 모르겠어.
아아악. 짜증나아아아.
“더 필요하십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고 있으려니 칼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해 봐.”
칼의 검로 속에서 부족함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면 찌푸릴수록 짜증이 늘 뿐이었다.
결국 답을 찾아내지 못한 나는 칼을 원위치 시키고 그 옆에 있는 대머리의 위에 앉았다.
“아. 아가씨!?”
“내 귀가 이상한가? 의자가 왜 말을 하지?”
대머리는 당혹 어린 목소리를 냈지만 내 다음 말에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벌을 받는 입장임을 이해한 것이다.
입술을 꾹 깨문 것은 칼도 마찬가지였다. 허접견 이 녀석이라면 지금쯤 자기 자리를 왜 대머리가 차지한 걸까 생각하고 있지 않으려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짝 떨리는 대머리의 등 위에서 팔짱을 낀 나는 방금 전 보았던 미적감각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미적감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본능이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거지.
게임 속에서는 이를 형용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딴 쓰레기 스킬로 만들어버렸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달라.
나는 단순히 물건의 값어치를 알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보고 느끼는 모든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게 됐어.
이러니까 까마귀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댔지.
이거 진짜 개사기 스킬이네!
기쁨에 콧노래를 부르던 나는 지금이라면 얼빠여우나 변태사도가 난리를 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대머리의 등 위에서 일어났다.
음.
으으음.
확실히 예쁘고 귀엽기는 한데.
굳이 건드릴 부분이 있나 싶을 정도이기는 한데.
어디를 가더라도 자연스레 시선을 끌 정도인 것도 맞는데.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정도인가?
전신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던 나는 아양을 떨면 좀 다를까 싶어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지만 결국 변태들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아무리 예뻐도 나 자신한테 몰입하는 건 어려운 일 인가봐. 나르시스트도 나름대로 대단한 거구나.
털썩!
무언가 무너지듯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나는 문 바깥에 쓰러져 있는 변태사도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얼마 안 됐겠지?! 그렇겠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말을 해주자면 네가 볼을 부풀리고 있을 때부터 보고 있었다.>
‘…왜 말 안 해줬어요!?’
<뭐 어떠냐. 귀여운 아이가 귀여운 체를 하는 것은 흐뭇한 일인데.>
‘당사자에게는 안 흐뭇한 일이거든요?!’
부끄러움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발을 콩콩 구르고 있으려니 옆에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린과 알새틴이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 흑역사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나는 소파 위에서 무릎을 끌어 모은 후 얼빠여우의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미 오래 전에 혼절을 해버린 얼빠여우는 얌전히 내 벌개진 얼굴을 가려줬다.
*
교단 전체가 나서 루시 알른이 떠나가는 길을 배웅한 후 열기가 서린 거리에서 빠져나온 예술 교단의 교주는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돌아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차고 넘치는 건 알고 있지만 어느 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루시 알른이라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차라리 여신의 현신이라 부르는 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여자아이가 남기고 간 영감이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으니까.
교주라는 지위만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쯤 다른 신도들처럼 스스로의 영감을 마음껏 펼치고 있었을 텐데!
…지금 내가 꼭 일을 해야 하나?
일을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지만 이 영감이라는 지금 따르지 않으면 어느 순간 떠나가 버릴지도 모르는 거잖아.
약간의 문제가 생기더라도 교단의 위세를 드높을 예술을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면 오히려 교단에 더 이득이 되는 거 아닌가?
교주가 한 집단의 장으로써 결코 해선 안 될 합리화를 거듭하던 도중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프레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크조차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교주도 프레테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함께 해 온 두 사람에게 있어 자잘한 예의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잘 떠나가셨나?”
“여기 있는 변태들을 모두 다 감옥에 집어넣어야 한다 소리치며 가셨다.”
“이거야 원. 영애를 다시 모셔오기는 글렀군.”
“혹시 모르지. 이전에는 절대 너 같은 변태 새끼가 사도로 있는 곳엔 안 갈 거라 그러셨거든.”
흐뭇한 웃음을 짓는 프레테의 모습에 교주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나쁜 새끼. 여태까지 저런 분을 혼자 독점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다른 신도들은 그렇다 쳐도 교주인 나한테는 기쁨을 나눠 줄 생각을 했어야지.
“어허. 너 표정이 이상하다?”
“이상한 게 아니라 노려보고 있는 거다.”
“사도한테 예의 안 지켜?”
“그러는 너는 교단의 교주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예의?”
프레테가 피식 소리를 내자마자 교주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교주의 분노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교주가 진심으로 소리를 내지르기 전에 프레테가 품 안에서 그림 하나를 꺼낸 것이다.
거울을 바라보며 볼을 부풀리고 있는 루시 알른의 모습이 담긴 그 그림은 현장의 풍경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처럼 생생했다.
“예의를 지켜야 하는 쪽은 과연 누구일까.”
“…이건?”
“영애께서 거울을 보고 애교를 부리시던 걸 그림으로 그린 거다. 사도의 명예를 걸고 단언컨대 현실의 풍경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확언하지.”
그림을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교주였지만 그녀는 긴 고민 끝에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유혹을 떨쳐.
“이와 비슷한 그림이 다섯 개는 더 있다만. 정말 필요 없나?”
“…죄송합니다! 교단의 사도시여! 제가 주제를 몰랐습니다!”
내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프레테의 수중에 들린 것이 너무도 많았다.
교주가 얌전히 패배를 인정하고 머리를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레테의 거만함은 풀릴 줄을 몰랐다.
“교단의 교주라는 사람이 그 정도밖에 못하나?”
뭐야. 얘 뭔가 더 가지고 있는 거야? 아직도 뭐가 더 있다고?
슬며시 고개를 든 교주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마주한 프레테는 짐짓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알른 영애께 자신과 관계된 예술을 마음대로 해도 괜찮단 허락을 구하고 왔거늘.”
“…진짜?”
“진짜.”
“여신에 걸고?”
“내 예술에 걸고.”
“씨발! 야! 프레테! 사랑한다 개새끼야!”
“저리로 꺼지십시오! 교주님! 저희 사이에 왜 이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