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4
던전에서 한 달 가까이 박혀 있다가 영지로 돌아온 프레이는 자신의 변화를 체감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던전 내에서 마물을 상대할 적에도 이 변화를 어느 정도 체감하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영지로 돌아와 찬찬히 자신의 변화를 되짚어 본 그녀는 경악 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죽어라 마물을 사냥했을 뿐인데 눈에 띌 정도로 신체능력이 올라간 것이다.
프레이가 느낀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검로가 보였다. 지금보다도 더 나은 검의 길이 프레이의 시야에 생겨났다.
그래서 그녀는 영지에 돌아가고 나서 무아지경에 빠져 죽어라고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동생이 아카데미에 미리 가야 한다고 재촉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검을 휘두르고 있지 않았을까.
아카데미에 막 도착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생을 향해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던 프레이였지만 지나가다 루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루시도 일찍 여기에 온 거야?
잘 됐다. 안 그래도 루시한테 내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지금 내가 검을 휘두르는 걸 루시가 본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
분명 칭찬해주겠지? 머리도 쓰다듬어 줄 수도 있어!
지금의 루시는 솔직하게 웃어주는 걸! 루시의 얼굴을 보자마자 거기에 매혹되어버린 프레이는 자신의 동생을 내버리고 즉시 루시를 만나러 갔다.
루시는 프레이의 갑작스런 방문에 짜증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련 신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 루시도 근질근질하구나!
실전에서 성장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거야!
루시의 도발을 듣고서 그를 눈치 챈 프레이는 활짝 웃으며 루시와 함께 수련장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개학 일주일 전의 수련장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그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모두 수련장에 살다시피 하는 이들이었지.
루시와 프레이의 얼굴을 지겹도록 보았던 그들은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걸 보고 하던 것을 멈췄다.
저 둘만이 이 곳에 왔다는 것은 대련을 한다는 이야기.
현 세대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는 두 사람이 방학기간 동안 얼마나 성장을 했을까.
또 놀라운 성장을 거둔 이들의 대련에선 얼마나 배울 것이 많을까.
둘의 모습에 흥미를 지닌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정작 그 시선의 중심인 루시와 프레이는 태연했다.
그들에게 있어 타인의 관심은 일상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루시. 오늘은 다를 거야.”
“매번 다를 거라고 그러는데 달라지는 건 네 패배횟수밖에 없지 않아?”
“오늘은 아냐.”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매번 실망하는 것도 은근히 힘든 일이거든.”
루시의 키득거리는 소리를 앞에 둔 프레이는 양 손으로 검 손잡이를 쥐었다.
아직 던전에서 얻은 성장을 완벽하게 체화한 건 아냐. 아빠도 아직 내가 나아질 여지가 많아 보인다고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문제는 없어. 완벽하지 않다면 실전 속에서 완벽함을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
“안 덤비고 뭐해? 자신만만하더니 벌써 겁먹은 거야?”
시도 때도 없이 루시와 대련을 반복해 온 프레이는 루시가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는 것임을 알았다.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프레이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이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마력을 검 위에 담아내며 돌진했다.
멀리서 시간을 끌어봐야 결국 루시의 도발에 넘어가게 될 뿐이야.
그렇다면 내 감정이 요동치기 전에 돌격하는 게 나아.
이러면 최소한 처음의 주도권은 내가 지니게 되니까.
채애앵! 무채색의 검기와 루시의 방패가 부딪힌 순간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수련장 안이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 찬다.
“쪼오오오끔 강해졌네? 이제 내 머리 손질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칭찬 고마워.”
얄미운 웃음을 짓는 루시에게 웃음을 되돌려 준 프레이는 이를 악물고서 루시의 방패를 두드렸다.
색을 지닌 오러를 완벽하게 체화시킨 프레이의 검은 하나하나가 거인의 주먹질처럼 위협적이었다.
“아니다. 방금 말은 취소~ 이 따위 검으로는 솜털도 못 벨 것 같으니까.”
그렇지만 그를 받아내는 루시의 방패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루시가 지닌 경이로운 방패술이, 압도적인 신체능력이, 그를 뒷받침하는 신성이, 프레이의 공격을 완벽히 상쇄하는 것이다.
둘 사이의 격차를 보고 절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프레이는 공세를 거듭하며 루시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녀의 동작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의문을 품었다.
이상해. 지금의 루시는 평소의 루시랑은 달라.
내가 여태까지 상대해왔던 루시라면 하지 않을 동작이 너무 많은 걸.
과거 자신이 상대했던 루시와 지금의 루시를 비교하던 프레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루시는 완성된 기사처럼 보였어.
장난스러운 태도와는 달리 절제되어있는 효율적인 동작은 루시가 어떤 싸움을 추구하는 지를 알려줬지.
그치만 지금은 아냐.
지금의 루시는 효율적이지 않아.
움직임 하나하나에 여러 낭비가 자리해있어.
얼핏 보기에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치만 단 하나. 한 가지 이전에 비해 나아간 부분이 있어.
지금의 루시가 펼치는 동작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아름답고 자연스러워.
루시의 위협을 눈앞에 둔 나조차도 무심코 시선이 끌리게 될 정도로 말야.
“시선이 징그럽네! 달라졌다는 게 바보에서 변태가 됐다는 소리였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루시가 휘두른 방패를 피한 프레이는 방금 전 얻어낸 정보를 기반으로 승리를 향한 길을 찾아냈다.
루시가 왜 본래 방식을 버린 건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의 루시가 예전의 루시보다 어설프다는 거야.
확신을 품은 프레이는 그 즉시 자신의 모든 마력을 쏟아내며 신체능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루시에게 자신의 문제를 파악할 틈을 줘선 안 돼.
내가 아는 루시라면 패색이 짙어진 순간 즉시 움직임을 수정할 테니까.
문제가 문제로 남아 있는 동안 루시를 쓰러트린다.
루시를 이긴다!
쿵!
마법의 탄환처럼 쏘아진 프레이는 루시의 옆구리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는 체를 했다.
노련한 전사인 루시는 프레이가 위협만을 주려 한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그녀의 대처는 평소에 비해 어설펐다.
빈틈이 생겼다 판단내린 프레이는 즉시 허수에 진심을 담아냈다.
오러를 담아낸 일격이 소리를 가르며 루시에게로 향한다.
콰아앙!
어설퍼도 루시는 루시인지라 그녀는 뒤늦게나마 프레이의 공격에 대응해보였다.
허나 다급히 움직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비틀림을 숨기진 못했다.
“크윽!”
프레이의 연격을 막아낸 루시의 얼굴에 당혹이 묻어난다.
그걸 본 프레이는 억지로 자신의 흥분을 억눌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루시를 이길 순간이 찾아올지 몰라.
어쩌면 이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냉정하게.
침착하게.
무감정하게.
루시를 무너트리는 것만 생각해야 해.
연격을 거듭하는 걸로 기세를 빼앗고.
오른 쪽 다리를 노린 후 바로 위에서 강격을 내리 찍어서 균형을 무너트린 다음.
전력을 다한 일격으로 승부를.
“쯧♡”
루시가 혀를 찬 순간 그녀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어설픔과 아름다움이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그 자리를 냉혹함과 효율이 채운다.
본래의 루시가. 이미 완성된 기사인 루시가 다시금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프레이가 위로 치켜 든 검이 휘둘러지기 직전에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프레이의 전력을 담은 공격이 위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 가뿐하게 루시의 방패에 가로막힌다.
“건방져♡ 바보 검사♡”
루시의 사나운 눈빛을 마주한 프레이는 자신이 기회를 놓쳐버렸음을 직감했지만 기가 죽기는커녕 웃으면서 사나움에 사나움을 맞부딪쳤다.
*
<아직 실전에 사용하긴 어려울 것 같구나.>
‘그러게요. 하마터면 프레이한테 질 뻔 했어요.’
방금 전에는 진짜 위험했다.
조금만 대처가 느렸더라면 프레이의 일격에 얻어맞고 바닥을 굴러야 했을 걸.
아니 프레이 얘 진짜 사기 캐릭이네.
지금 할아버지와 연구하고 있는 둔기술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지만 나와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스펙 차를 기술로 뒤엎으려고 할 줄은.
아무리 프레이라도 아직 레벨 한계치까지 숙련도를 끌어올리진 못했을 테니 여기서 훨씬 더 강해지는 건 확정인가.
역시 천재는 천재구나.
“루시. 치사해.”
바닥에 널부러진 채 고개만 치켜 든 프레이는 볼을 부풀린 채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 번 져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나도 져주고 싶어. 바보 검사. 근데 네가 너어~무 약해서 도저히 져 줄 수 없는 걸 어떡해. 네가 약한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질 뻔 했으면서.”
“놀아줬다는 생각은 안 해? 하여간 멍청하다니까.”
“으으으.”
프레이는 짜증이 나는 듯 팔다리를 휘적거렸지만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방금 전 대련에서 모든 걸 쏟아낸 탓에 반쯤 탈진해버린 것이다.
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련이 이어지는 중간중간에 새 둔기술을 시험하면서 개선점을 찾아내느라 고생을 했거든.
조금만 쉴까? 어차피 프레이가 다시 일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 때까지는 숨을 좀 돌려도 되겠지.
방패에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쉰 나는 몸을 돌려서 허공을 바라보는 프레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바보 검사. 아카데미에 왜 일찍 온 거야? 영지에 있으니까 외로웠어?”
“루시가 없어서 아쉽긴 했어.”
프레이의 솔직함에 말문이 막힌 내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프레이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거 때문은 아니고. 동생이 난리를 피워서.”
“…동생?”
“응. 파르나. 이번에 입학했어.”
“어떻게?”
이런 말을 해도 될 진 모르겠지만 걔 그렇게 똑똑해 보이진 않던데? 어떻게 입학시험을 통과한 거야?!
“나랑 똑같은 방식으로.”
무예 특기로 입학했단 소리구나. 하긴 걔도 켄트 가문의 사람이니까. 프레이보다 못할 지언정 재능자체는 압도적이겠지.
…잠시만. 걔가 왔다는 소리는 파르나의 호들갑을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감당해야한단 소리 아닌가?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매번 그러면 진짜 기 빨릴 것 같아서 싫은데. 되도록 피해 다닐.
“그보다 루시. 나…”
“프레이 언니! 절 버려두고 뭘… 와아아아아! 루시 언니이이이이!”
뒤편에서 들려온 긍정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 삐걱대며 고갤 돌리니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이 쪽으로 달려오는 파르나의 모습이 보였다.
저 웃음을 보고 있으니까 내 미래가 보이는 것 같네. 저 긍정에너지를 피하는 건 무리겠구나.
…어라? 파르나가 끌고 오는 애 얼굴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예쁘장하게 생긴 게.
아. 기억났다.
쟤 내가 구해준 뉴먼 가문의 아들이잖아.
저 녀석 왜 너덜너덜해져서는 파르나한테 끌려 다니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