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5
뉴먼 가문에서 태어난 병약한 아이. 차라리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단 이야기를 듣던 체스터 뉴먼은 아카데미 거리를 두 눈에 담다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이미 한 번 눈에 담았던 광경인데 왜 매 번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인지. 저택의 방에 갇혀서 평생을 살다보니 어떤 풍경을 보더라도 아름답기만 해.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체스터에게 삶이라는 것은 고통이었다.
아픔에 신음하다가 눈을 감고 아픔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길 반복하는 일상.
그 속에서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어느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평생 동안 병을 앓아 온 탓에 거의 키가 자라지 않은 그와 비슷할 정도로 작은 아이가 가져다 준 약이 그를 구원한 것이다.
병마에서 벗어나 삶을 되찾은 체스터는 그 여자아이에게 커다란 은혜를 느꼈다.
체스터의 아버지는 가문이 그녀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이야기했지만 체스터의 생각은 달랐다.
은혜라는 것은 받은 사람이 되돌려줘야 하는 것.
은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게 말도 안 된다 생각하는 그는 다시금 여자아이를 만나기 위해 소울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거기가 들어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냐는 답변을 들을 이야기지만 체스터에겐 아니었다.
병약했을 뿐 머리는 꽤 좋았던 체스터다.
그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었던 수많은 서적은 그가 쉬이 필기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주었고.
여러모로 걱정했던 실기시험 또한 일 년 간 나름 열심히 준비한 덕분에 넘어설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운이 좋았던 것은 던전공략의 시험을 칠 때 켄트 가문의 차녀와 같은 파티가 되었단 사실이었다.
장녀의 아성에 못 미칠 뿐 충분하고도 남는 수준의 괴물이었던 그녀는 별 어려움 없이 던전을 박살내버렸으니까.
그 때의 광경을 떠올린 체스터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단 생각을 했다.
긍정으로 가득 차서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그녀는 체스터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체스터! 체스터 맞지?!”
허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버지가 시킨 것이 있어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파르나 켄트가 그를 발견하고 냅다 달려왔으니까.
“와아아! 너도 합격했구나! 하긴! 너 엄청 머리 좋아보였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켄트 영애께서도…”
“파르나라고 불러줘! 켄트라고 부르면 언니랑 헷갈리잖아!”
“…파르나님께서도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거군요.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줘서 고마워! 나 머리 나빠서 떨어지면 어쩌나 두근두근했다니까?!”
따로 물어본 것도 아닌데 “사실 필기시험은 완전 망쳤어! 켄트 가문의 검술이 아니었다면 집에서 엉엉 울고 있었을 거야!” 라는 사실까지 전하는 파르나의 모습에 체스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끝없는 에너지가 생의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지낸 그에게 버거웠던 것이다 .
켄트 가문의 영애와 인연을 맺은 건 좋지만 이 분은 내게 너무 부담스럽다. 적당히 이야기를 맞춰주다가 헤어질 방법을 찾아야.
“아! 그보다 체스터 너 우리 언니 못 봤어?!”
“프레이 켄트 영애 말씀이십니까?”
“응! 우리 언니 진짜 너무한 게 갑자기 날 버려두고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 있지!”
아카데미 거리에 대해서 아는 거 하나 없는데 진짜 너무하지 않으냐는 파르나의 불평을 듣던 체스터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불편하단 티를 내도 이 분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대놓고 싫다는 이야기를 하기엔 양심이 찔려.
어떡하면 좋을까.
아. 그래. 켄트 가문의 장녀에게 이 분을 데려다 주면 되겠군.
그러면 자연스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지금 많이 곤란해 보이시네요.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언니 찾는 거 도와 줄 거야?! 정말?!”
“예.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불편하긴 무슨! 고마워! 체스터 너 역시 엄청 좋은 사람이구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 파르나의 눈동자에 체스터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나 좋은 사람 아닌데. 약간 귀찮고 불편해서 떼어내려는 것 뿐이란 말야.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양심에 찔리잖아.
“근데 어떻게 찾아낼 거야? 언니가 사라진 지는 꽤 오래 지났는데?”
“켄트 가문의 프레이 영애께서는 상당히 눈에 띄는 분입니다. 아카데미 거리에 머무는 분들이 프레이 영애를 놓쳤을 리 없죠.”
뒷세계와 가까운 뉴먼에서 태어난 체스터는 방구석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가문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배운 체스터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레 정보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았다.
“켄트 영애? 그 분이라면 아카데미 쪽으로 가셨어.”
거리의 상인에게서.
“얼마 전에 지나가셨다. 기숙사 방향으로 향하셨지.”
아카데미의 경비에게서.
“켄트 영애? 지금쯤 수련장에 계실 걸. 그 분 거기에서 살다시피 하니까.”
지나가다 만난 선배에게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끌어 낸 그는 손쉽게 파르나를 프레이가 있는 곳까지 인도했다.
“와아! 체스터! 진짜 저기 언니가 있어! 너 완전 대단해!”
“…감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파르나의 호들갑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진 체스터는 프레이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를 보고 사라질 준비를 했다.
또 다시 붙잡히면 그 땐 정말로 빠져나오지 못할 거다. 저 분과 어울리다 탈진하기 전에 사라져야 해.
“…루시 언니이이이!”
뒷걸음질을 치던 체스터는 파르나의 고함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루시…라면 설마.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린 체스터는 프레이 켄트 옆에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 분은 분명 나를 구해주신 은인 분이 맞다. 그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으니 착각일 리 없다.
허나 저 분께 존재하는 자그마한 변화가 왜 이리도 거대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소문으로 알른 영애가 진정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내가 보았던 때에 비해 더 아름다워지실 수는 없다 여겼거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지는 군.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뻔 했던 체스터는 그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목소리를 억누른 채 파르나의 뒤를 따랐다.
“루시 언니! 프레이 언니한테 뭐라고 해주세요! 언니가 절 버리고 떠나버린 거 있죠!”
“버린 거 아냐. 중요한 게 있어서 급하게 움직였을 뿐.”
“그게 버린 거잖아요!”
켄트 가문의 자매가 왁왁거리며 말다툼을 하는 동안 체스터는 조심스레 루시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른 영애.”
이 분께서 나를 기억하실지는 모르겠다. 아주 짧은 만남에 불과했으니까.
그래도 과거의 만남을 언급해야 내가 이 분께 감사를 전할 수 있지 않겠나.
“그래. 오랜만이야.”
루시의 웃음을 마주한 체스터는 순간 환한 웃음을 지었지만.
“좆밥 가문의 허약 영애. 여전히 비실비실해 보이네.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아.”
연이어진 말을 들은 순간 당황해서 눈을 끔뻑이고 말았다.
“…저는 남성입니다만.”
“키도 작고 근육도 없고 중요한 것도 없을 것 같은 네가 남자라고? 푸하핳. 재밌는 농담이네.”
살짝 노골적이었던 루시의 언사에 체스터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다.
“남자 취급 받고 싶으면 조금이라도 키가 커서 오도록 해. 허~접아.”
매도에 내성이 없는 체스터가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동안 둘 사이에 파르나가 끼어들었다.
“루시 언니! 체스터 알아?!”
“예전에 이 약골을 도와줬던 적 있거든.”
“역시 언니야! 프레이 언니보다 훨씬 더 멋져!”
“…백치 꼬맹아. 제발 호들갑 좀 적당히 떨지? 네가 재잘재잘대는 소리에 귀청이 터져버릴 것 같거든?”
“그러기에는 루시 언니가 너무 멋진걸요! 그치! 프레이 언니!”
“맞아. 루시는 멋져. 그리고 귀여워.”
“귀여워요?”
“응. 완전.”
체스터를 가뿐히 가지고 놀았던 루시였지만 그녀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못해 주관밖에 없는 두 사람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기 할 말만 하는 켄트 자매 사이에서 곤란해 하던 루시는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다급히 도주했다.
*
<네가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걸 보면 참 재밌단 말이지.>
‘전 재미없어요! 둘 사이에 있으면 기빨리는 것 같단 말이에요!’
프레이 하나만 있을 때는 아무 문제없다. 그 녀석은 무심한 마이페이스니까.
그렇지만 파르나가 옆에 끼어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긍정을 뿜어대는 그녀는 내 입장에서 한없이 부담스러운 상대인 것이다.
아니 진짜 쟤 대체 왜 날 따르는 거야?
같이 있던 시간이라고 해봐야 채 며칠이 안 될 텐데 왜 친언니인 프레이보다 나한테 달라붙으려 하는 거냐고!
내가 뭐 해 준 것도 없잖아! 근데 왜 자기 목숨이라도 구해준 것마냥 와와 거리냐고!
<근데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저 파르나라는 아이와 네 호위기사는 비슷하지 않으냐?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불편해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칼은 제 눈치를 본다고요! 파르나는 제 눈치를 안 보고요!’
칼은 자기가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지만 파르나라는 해맑은 여자아이는 자신이 미움 받을 수 있다는 것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극한의 긍정형 인간인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제 좋을 대로 해석하고 웃음을 짓는 것이다.
타인의 적의에 익숙한 내게 있어서 어떤 음흉함도 없이 다가오는 파르나는 그 자체로 부담이었다.
싫냐 좋으냐로 따지면 좋은 편이긴 하겠지만 정도라는 게 있잖아! 정도라는 게!
<익숙해져라. 네 업을 따라가다 보면 저런 사람이 차고 넘치게 될 테니. 아니지. 따지고 보면 지금 네 주변에도 저런 이들이 한 가득 아니더냐? 그들이 자제를 하고 있어서 모르는 거지 수만 따지자면 꽤 될 것 같은데.>
어라?
그…런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멈춰 서서 주변 사람들을 하나 둘 떠올리던 나는 할아버지가 한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눈을 떨었다.
표현의 방식이 직설적이라 그렇지 파르나가 크게 특이한 건 아니구나.
와아.
덕분에 파르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도 엄청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이런 현실 알려주지 말라고요!’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느냐?! 난 그저 사실을 이야기해줬을 뿐인데!>
‘아무튼 할아버지 잘못이에요! 사과하세요!’
<내 잘못이라고?!>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 할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던 나는 문득 아카데미 거리에 존재하는 위화감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미적감각이 여기 잘못됐다 저기 잘못됐다 지적하는 거야 일상적인 일이긴 한데 이건 평소랑 느낌이 좀 달라.
<…갑자기 왜 말을 멈추고 그러느냐. 많이 화가 난 게야?>
‘할아버지. 뭔가 이상한 거 안 느껴져요?’
<이상한 거라니. 그건 또… 허?>
할아버지가 당혹어린 목소리를 낸 순간 내 앞에 푸른 색 창이 떠올랐다.
[부정을 섬멸하라!]
[아카데미가 개학하기 전까지 아카데미 거리에 존재하는 부정을 제거하십시오.]
역시나. 이거 악신의 추종자들이 내뿜는 기운 맞네.
후흐흐. 내가 할아버지보다 이상을 빨리 감지하다니. 오늘은 이거 가지고 잔뜩 놀려야겠다!
재밌는 놀림거리를 찾았단 사실에 히죽거리던 나는 그 아래에 적힌 것을 보고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보상 : 명성의 증가]
[실패시 : 풀메이크업 기도!!!!]
아. 맞다. 허접 주신한테 기도해준다는 거 까먹고 있었네.
…근데 그게 그렇게까지 원통했던 거야?
느낌표를 네 개나 쓸 정도로?
허접 페도 주신. 당신 진짜 쪼잔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