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방뚜방.
나는 커다란 종이 상자를 양팔로 감싸 안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미니 사신 정원의 폭신한 마시멜로가 내 발바닥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내 걸음의 목적지는 ‘전쟁 축제’가 벌어졌던 장소였다.
축제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문득 지렁이 외신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기다려도 새로운 미니 사신이 안 생기네.’
허그 사신처럼 새로운 미니 사신이 튀어나오는 걸 조금 기대했었는데….
뭐, 외신은 많으니까, 언젠가는 미니 사신도 생겨나겠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떠 있는 불변구들이 보였다.
‘그리고 왠지 새로운 불변구도 생길 것 같지 않아.’
아무래도 좀 특이한 타입의 외신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외신들과는 달리 유독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보통의 외신들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존재였지만 지렁이 외신은 달랐다.
단일 개체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지렁이 오브젝트의 집합체.
전부 모여서 간신히 외신의 격에 닿았지만, 하나하나는 평범한 오브젝트 수준이었다.
강한 지렁이는 특급 오브젝트 수준부터, 약한 지렁이는 평범한 오브젝트 이하인 경우도 있었다.
‘뭐, 아무튼 지렁이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겠지.’
상당수의 지렁이 사체를 회수하지 못하고 통로가 끊어져 버려서, 아마도 색채 우주에 남은 지렁이 외신의 남은 파편은 외신의 격을 잃어버렸을 테니까.
징그러운 지렁이를 다시 볼 필요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렇게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축제 현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잠든 황금 사신들이 마시멜로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들면서 서로 끌어안다 보니, 만들어진 커다란 황금 사신 고치
히히 웃으며 대자로 누워있는 황금 사신.
팔다리를 모두 다른 황금 사신에게 깨물리고 있는 황금 사신.
달리다가 잠들어 버린 건지, 머리를 바닥에 박고 엎드린 황금 사신.
축제를 즐기다가 잘 시간이 지나서, 황금 사신들이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린 현장이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든 녀석들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와서 그런지, 별들이 흩어진 풍경을 그린 것 같았다.
나는 그런 황금 사신들을 하나하나 주워 들기 시작했다.
따뜻하네.
잠이든 황금 사신의 몸에는 기분 좋은 온기가 가득했다.
손으로 쥐면, 뒤척이며 내 손을 꼬옥 껴안았다.
‘자, 여기서 자는 거야.’
나지막이 의지를 속삭이며 황금 사신들을 종이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차곡차곡.
상자가 가득 찰 때까지.
‘엄마….’
‘엄마?
‘졸려….’
몇몇 황금 사신들은 내 손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비몽사몽인 표정으로 해롱해롱.
졸린 황금 사신들은 손가락으로 눈을 살짝 덮어주면 순식간에 잠들어 버리니까, 별문제 없이 상자에 넣을 수 있었다.
어느새 말랑말랑하게 가득 차버린 종이 상자.
‘완성!’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지를 흘렸다.
이렇게 해서 일명 ‘황금 사신 병아리 상자’가 완성되었다.
상자를 들어 올리자, 그 안에서 작은 몸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나는 상자를 단단히 붙잡고 목표로 한 장소에 미리 배치해 둔 황금 사신의 기척을 찾았다.
그리고 잠든 황금 사신의 기척이 느껴지자, 나는 그 황금 사신을 향해 순간 이동했다.
순식간에 뒤바뀌는 풍경.
하얗고 폭신폭신한 마시멜로 평원은 어느새 딱딱한 흙바닥으로 변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머리만 내놓은 채, 땅속에 파묻혀서 잠든 황금 사신이 있었다.
시야를 정면으로 향하자, 마치 성벽처럼 높은 콘크리트 벽과 수문처럼 생긴 출입구가 보였다.
‘도착!’
출입구 위에는 <황금뿔 쉼터>라고 표지판이 걸려있었다.
그렇게 나는 일명 황금뿔 격리 구역이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
‘으앙!’
황금 사신이 하늘을 날았다.
아니, 던져졌다.
데굴데굴.
하늘에서 떨어져 흙바닥을 구르던 황금 사신이 눈을 뜨자, 어두운 골목과 높은 벽뿐이었다.
‘분명 엄마가 있었는데….’
잠결이었지만, 엄마의 의지가 들려왔었다.
엄마가 뭐라고 했더라?
맞아, 여기서 애착 인간을 만들라고 했었지.
‘자동? 사냥? 에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아!’
황금 사신은 자신의 말랑말랑한 머리통을 혹사해 가며, 가까스로 엄마의 지시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의 지시를 이행하려는 순간, 또 다른 황금 사신이 떨어져 내렸다.
‘으앙!’
중간에 잠에서 깬 자신과 다르게, 바닥에 콩하고 머리를 박아버린 황금 사신이었다.
그 황금 사신은 어지러운 것처럼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빨리 가자!’
아직도 어지러워 보이는 황금 사신에게 손을 내밀어 손을 맞잡은 뒤, 엄마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 같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여기에 애착 인간이 있을 거라고 했어!’
엄마가 자신을 집어 던진 사실은 까맣게 잊고, 신나는 표정으로 어두운 골목에 뛰어 들어갔다.
***
송파구 외곽에 우뚝 선 제임스 타워의 최상층.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진 가운데, 제임스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북극에서의 오브젝트 조사를 중단하고 긴급 귀환한 상태였다.
알렉산더 그룹에 대한 충격적인 보고를 접하고 난 후, 그의 마음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요동쳤다.
“이 정도일 줄이야….”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회색 사신이 중요해도, 진작에 제대로 살펴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의 책상 위에는 알렉산더 그룹의 비밀을 담은 수많은 문서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착한 기업’이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어두운 진실.
무고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인체 실험.
인류의 오브젝트 방비 체계를 무력화하려는 음모….
그 모든 것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났다.
알렉산더 그룹에 대한 조사가 일단락되는 것 같아 보이자, 키보드 옆에서 잠들어 있던 황금 사신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인간…?’
황금 사신은 마치 작은 강아지처럼 그의 손바닥 위에서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인간!’
그리고 제임스와 눈을 마주치더니, 제임스의 셔츠 위로 뛰어들었다.
황금 사신은 제임스의 셔츠를 붙잡고 해맑은 표정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그런 황금 사신을 떼어낸 뒤, 미소를 지으며 작은 쿠키 하나를 물려주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제임스는 핫초코를 한 모금을 마시며 핸드폰으로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온 새로운 정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황금 사신이 쿠키를 씹는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제임스의 시선이 한 지역 신문 기사를 정리해 둔 보고서에 멈췄다.
<이탈리아 환경 운동가, 변사체로 발견.>
제목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시체는 마치 복강 내부에서 폭탄이 터진 듯했다. 당국에서는 오브젝트의 짓으로 보고, 오브젝트 협회 쪽으로 사건을 넘겼다.>
제임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알렉산더 그룹 상층부와 비슷한 방식의 죽음이군.’
그는 의문이 들자마자 자리로 돌아가, 오브젝트 협회 데이터 센터에서 비슷한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의 예감은 정확했다.
비슷한 형태의 죽음이 세계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었다.
지역 유지, 정치인, 기업가, 자원봉사 단체의 수장 등등.
터져서 죽어버린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심지어 도시 전체가 무력화될 정도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도 있었다.
톡. 톡. 톡.
제임스는 손에 든 볼펜으로 책상을 천천히 두들겼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가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제임스는 제임스 연구소 내부망을 통해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의심스러운 사망 사건 관련 긴급 조사 지시>
– 조사 대상 : 첨부 문서에 명시된 인물 및 단체.
– 각 대상의 개인정보, 소속 단체, 활동 내역을 철저히 조사.
– 대상들의 최근 5년간의 재정 상태 및 거래 내역을 추적.
– 대상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매핑하고 주요 접촉 인물을 식별.
– 알렉산더 그룹 사건의 조사 방법론을 참고.
– 특히 숨겨진 조직 구조와 비밀 프로젝트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조사할 것.
지시를 내린 뒤, 제임스는 다시 협회 내부 신규 보고서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샌프란시스코 일간지의 한 기사를 정리한 보고서였다.
<새로운 히어로, 검은 사신!>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한 장.
그것은 인간만큼 커다란 검은 사신이 도시를 누비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
늦은 밤, 미니 사신들이 거니는 서울숲.
검은 사신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의지의 메아리를 향해 뚜방뚜방 걸어 나갔다.
어딘가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어두운 숲속이었지만, 검은 사신은 머뭇거리지 않고 힘차게 나아갔다.
‘엄마….’
여전히 멀고 작은 속삭임이 검은 사신에게 들려왔다.
그 의지에 이끌려, 검은 사신은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검은 사신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상한 장소에 도착해 있음을 깨달았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익숙한 밤하늘이 아니었다.
다양한 색의 달빛 대신, 형형색색의 색으로 가득한 색채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붉은빛과 푸른빛, 노란빛과 보랏빛이 서로 얽히고설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하늘 아래로, 반투명한 거대 나비들이 우아하게 날아다녔다.
검은 사신 혼자서는 해치울 수 없는 강력한 오브젝트.
저 나비들은 이 익숙하지 못한 땅에서, 검은 사신이 유일하게 익숙한 것이었다.
‘여긴 어디?’
검은 사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머리 위에는 더듬이가 여전히 커다란 물음표를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시야의 끝에서 무언가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처럼 맹렬하게 달려드는 검은 물결.
옛 신의 형상을 한, 수많은 검은 사신들의 파도였다.
그리고 그 검은 파도 속에서 의지의 외침이 들려왔다.
‘엄마를 위해!’
‘엄마아아!’
‘인류의 적!’
SDVIMVFoanVzY1YwSVhjamMzUkt1U3pnY1pRaU5OZVlrWGsxQUxDREd6em8zdSthSlZkR3BQMGhBK2c5YmpFUw
그 의지의 외침은 하나로 뭉쳐져 거대한 현상이 되어 주변 환경을 뒤틀어 버릴 정도였다.
검은 사신들의 파도는 점점 더 빠르게 전진했고, 곧 하늘을 나는 거대 나비들과 충돌했다.
‘위험해.’
검은 사신은 동료들을 돕기 위해, 발을 떼려고 했다.
거대 나비들은 검은 사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오브젝트였으니까.
‘!’
하지만 충돌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끼이익!
뭔가를 억지로 뒤틀어버리는 듯한 소음과 함께, 검은 사신들의 손톱이 반실체의 나비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나비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뒤틀림은 검은 사신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대로 모든 나비가 쓸려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변이 발생했다.
거대한, 아주 거대한 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 날개가 갈기갈기 찢기고, 구멍이 잔뜩 뚫린 몸통에서도 핏물을 질질 흘리는 거대한 나비.
하지만 그 나비 머리 위에는 하얗게 빛나는 헤일로가 씌워져 있었다.
‘엄마의 헤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