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없어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힘든 색채 우주의 세계.
그런 세계에 신참 검은 사신이 도착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아침!’
말랑말랑한 볼을 바닥에 대고 잠들어 있던 신참 검은 사신은 눈을 뜨고 폴짝 뛰어올랐다.
물론 태양이 없는 이곳에 아침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검은 사신들이 마련해준 숙소 밖으로 걸어 나오자, 언제나처럼 드넓은 본거지가 신참을 반겼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천장.
그 아래서 작게 반짝이는 검은 사신의 흔적들.
그리고 사방으로 어지럽게 얽혀있는 미니 사신 사이즈의 굴들.
겉보기에 모든 것은 자기 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
‘아무도 없어….’
신참 검은 사신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검은 사신들이 작게 웃으며 밤 인사를 나누었는데, 지금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일어나면 신기한 동생이라며,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검은 사신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뚜방뚜방.
거대한 화로 근처로 걸어갔지만, 그곳에도 아무도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로에서 장작을 받기 위해 줄을 선 검은 사신들이 가득했던 곳이 이제는 텅 비어 있었다.
거대한 화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안의 불꽃은 어제보다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의문이 가득한 채로 신참 검은 사신은 훈련장으로 향했다. 뚜방한 걸음에는 불안감이 묻어났다.
‘동생!’
훈련장에 도착하자, 한쪽 눈에 깊은 흉터가 있는 검은 사신이 신참을 반겼다.
하지만 훈련장에도 흉터 사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넓은 공간은 텅 비어 있었고, 어제의 활기찬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신참 검은 사신이 의문을 품고 고개를 갸웃하자, 흉터 검은 사신은 씨익 웃으며 답해주었다.
‘다들 자러 갔어!’
‘장작 아껴야 해!’
그리고 천천히 훈련장 밖으로 신참을 이끌며 말을 덧붙였다.
‘엄마가 올 때까지.’
‘지켜야 하니까.’
흉터 사신은 어제와 똑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뭔가 조금 달라 보였다.
흉터 사신은 신참 사신을 데리고 본거지를 나와 점점 먼 곳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황량한 본거지가 점점 작아져 갔다.
거대한 화로에서 새어 나온 불빛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본거지의 모습이 둥근 지평선으로 변할 만큼 멀리, 두 검은 사신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주변의 풍경은 점점 더 황량해졌고, 색채 우주의 빛조차 희미해져 가는 듯했다.
그 정도로 멀리까지 나아가서야, 흉터 사신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여기 정도면 적당하겠네.’
흉터 사신은 그렇게 작은 의지로 중얼거리더니, 작은 돌을 찾아 그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흉터 사신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외신 나비는 엄마의 ‘눈’을 가지고 도망가려고 하고 있어.’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치 꼭 해줘야 하는 정보를 알려주듯이, 계속 의지를 보내왔다.
본거지 깊숙한 곳에는 색채 우주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이야기라던지.
외신 나비는 엄마의 헤일로를 가지고 그곳으로 도망가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라던지.
손톱을 이용해서 시간과 공간을 찢어버리는 방법이라던지.
다른 검은 사신들이 모르는, 조금 단 맛이 나는 흙이 묻힌 장소라던지.
흉터 사신은 정말 온갖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중요한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도 전부.
‘아, 맞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도중, 문득 생각난 것처럼 흉터 사신이 의지를 보냈다.
‘엄마, 엄마의 이야기 좀 들려줘.’
신참 검은 사신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흉터 사신의 요청에 따라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엄마의 생김새.
엄마가 이제는 회색이라는 점.
장난을 자주 치는 이야기.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까지.
신참 사신의 이야기 속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간.
‘이런 방식인 건가?’
흉터 사신이 미니 사신의 형태를 취한 채, 의지를 보내왔다.
멀쩡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덜너덜한 모습.
‘이 모습으로는 상처를 숨길 수가 없네.’
흉터 사신은 멋쩍은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신참 사신은 흉터 사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상처는 너무 심해서, 엄마가 아니면 절대로 고칠 수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절대로 싸울 수도 없겠지.
마치 신참 사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흉터 사신이 말했다.
SDVIMVFoanVzY1YwSVhjamMzUkt1U3pnY1pRaU5OZVlrWGsxQUxDREd6eS80WExJWGhneWlQN2VSL2FlK3JaNg
‘괜찮아. 나는 이제 정찰 임무를 맡아서,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흉터 사신의 의지에는 체념과 동시에 묘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이제 돌아가.’
흉터 사신이 신참 사신을 재촉했다.
‘너는 아직 싸우기엔 미숙하니까, 좀 더 훈련해야 해. 많이 훈련해서 우리 정도가 돼서, 같이 싸우게 되는 날을 기대할게.’
흉터 사신의 재촉에 신참 사신은 천천히 본거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참은 걸어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라도 돌아보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흉터 사신은 하나 남은 팔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로 흉터 사신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바람결에 흉터 사신의 작은 의지가 실려 온 것만 같았다.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
황금 사신들을 잔뜩 뿌려놓은 황금 뿔 격리 구역.
나는 격리 구역 중앙에서 유령화를 풀고 앉아, 손아귀에서 황금 사신 하나를 바닥에 내려 두었다.
그러자 주변에 자리 잡은 황금 사신들이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많이 모였는지, 황금 사신의 작은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황금빛이 너무 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황금 사신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황금 사신의 이마부터 시작해서 뒤통수까지 천천히 문질렀다.
마치 아기의 머리를 감기는 것처럼, 뭐 하나 놓치는 것 없이 꼼꼼하게.
물론 비누 거품은 없었지만, 그 동작만으로도 황금 사신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히히히.’
그때 내 손 안에서 황금 사신이 간지러운 것처럼 꿈틀거렸다.
‘간지럽나? 이 녀석은 조금 특이하네.’
대부분의 황금 사신은 내 손길에 몸을 맡기고 늘어지는데 말이다.
마치 부드러운 마사지를 받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편안하게 추욱.
콩콩.
문득 머리 위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시선을 정수리 쪽으로 옮겨보니, 나에게 마사지를 받았던 황금 사신들이 내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내 머리를 콩콩 두들기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향한 공격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마사지를 해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마사지가 기분 좋아서, 나에게도 해주고 싶어 하는 건가?
하지만 미니 사신 사이즈로는 마사지는 힘들겠지.
힘도 약하고, 무게도 가볍고, 손가락이나 주먹도 너무 조그마하니까.
그렇게 황금 사신을 하나하나 만져준 뒤, 나는 살짝 실망했다.
‘없네.’
사실 마사지를 해주려고 황금 사신의 머리통을 만지작거린 게 아니었으니까.
겨우 며칠밖에 안 지났지만, 혹시 작은 뿔이라도 자란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의 두피를 꼼꼼히 살펴봤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금 사신들의 두피에는 아무런 뿔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힝.
아쉬움을 안고 미니 사신 정원으로 돌아가자, 눈에서 안광 궤적을 남기며 날아다니는 황금 사신이 보였다.
‘???’
처음 보는 황금 사신 변종이라, 나는 깜짝 놀랐다.
황금 사신들은 안광을 흘리는 황금 사신의 강력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강해!’
‘으앙!’
왠지 저번에 혼종과 벌이던 ‘전쟁 축제’랑 비슷해 보이네.
그렇게 나는 새로운 황금 사신이 자동 사냥에 쓸만할지, 견적을 보기 위해 축제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구경하던 도중, 나는 문득 황금 사신의 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 버렸다.
심장 부근에 반투명한 칼날이 삐죽.
‘뭐지?’
미니 사신에게 딱 맞는 크기의 칼날이었다.
인간을 찌르기에는 너무 작고, 인간이 들고 찌르기에도 너무 작은 칼날.
‘그나저나 저 칼날의 모양….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데?’
나는 관심 없는 것들은 금세 금세 까먹는 머릿속을 열심히 뒤지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
신참 검은 사신은 아무도 없는 훈련장에서 끊임없이 훈련을 반복했다.
흉터 사신이 알려준 기술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며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실력을 쌓아갔다.
다른 검은 사신들이 모두 잠들어 있어 조금 외로웠지만, 제대로 된 1인분을 하기 위해 묵묵히 노력했다.
가끔 훈련장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흉터 사신이 언제 돌아올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본거지에 도착한 뒤로 계속 같이 있어 주었던 흉터 사신이 없어서 그런지, 신참 사신은 조금 외로움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훈련장에서 연습하던 신참 사신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정찰 임무는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걸까?’
신참 검은 사신은 훈련을 잠시 멈추고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훈련을 마치면 만나러 가볼까?
신참 검은 사신은 엄마도 없고, 흉터 사신도 없어서 그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훈련을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커다란 빛의 기둥이 하늘을 꿰뚫고 있었다.
마치 색채 우주에 닿을 것만 같은 거대한 장작의 기둥이 지평선 너머에서 솟아올랐다.
그 순간, 본거지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본거지의 검은 사신들이 일제히 잠에서 깨어났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수백, 수천의 검은 사신들이 굴에서 쏟아져 나왔다.
검은 사신들의 의지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돌격!’
‘적이 접근 중이야!’
마치 거대한 검은 파도와 같이, 검은 사신들이 한 방향을 향해 물밀듯이 달려 나갔다.
그 광경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신참 검은 사신은 홀린 것처럼 검은 파도의 뒤를 쫓았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해 검은 사신들의 빠른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작은 발로 필사적으로 달렸다.
멀리서 전투의 소리가 들려왔다.
섬광이 번쩍이고, 땅이 흔들렸다.
신참 사신은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공간을 찢어발기는 시간의 칼날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검은 형체들이 그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벌어지는 전투와도 같았다.
본거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를 가까스로 따라잡자, 전투는 이미 끝나 있었다.
황량한 들판에는 전투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땅은 파헤쳐져 있었고, 여기저기 깊은 구멍들이 나 있었다.
‘어디지?’
신참 사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를 끝낸 검은 사신들이 힘을 다해 녹아내린 검은 사신들을 운반하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흉터 사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참 사신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흉터 사신을 찾았다.
‘선배, 어디야?’
신참 사신의 작은 염원이 검은 들판을 떠돌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점점 더 불안해진 신참 사신은 전장 곳곳을 누볐다.
구덩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바위 뒤편을 살폈다.
하지만 흉터 사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 돼….’
마침내 신참 검은 사신은 눈에 익은 바위를 발견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신참 사신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돼!!!’
황량하기만 한 평원인 데다가 전투로 난장판이 된 한가운데, 그 바위에는 까맣게 타서 가루만 남은 검은 사신의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본거지에 조명처럼 잔뜩 박혀있던 구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구슬은 마치 흉터 사신처럼 상처가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희미하지만, 따스한 장작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