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9
칼이 들고 온 현 교직원에 대한 정보는 행정 측에 보관되어 있는 이름뿐인 리스트였다.
지난 번 카리아가 보여주었던 것에 비하면 한없이 허술한 무언가였지만 지금의 내겐 이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이 안에 있는 이름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는 나니까. 이 중에서 수상해 보이는 이름을 찾는 건 별 어려운 일이 아냐.
이 녀석은 1왕비 측에 달라붙은 놈이고.
얘는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어야 할 녀석인데, 2왕비의 입김에 여기로 온 건가.
이 인간은 원래 2학년에 추가될 NPC니까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리고 이 쪽은…
게임 속에 존재하는 NPC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줄을 긋고 있던 나는 중간중간 애매한 이름들을 넘겨가며 리스트를 노려봤다.
일단 의심 가는 이들이 몇 군데 있긴 해. 지금 시점에 결코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될 녀석이라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놈이라거나. 워낙 허술해서 언제 악신에게 홀려도 이상하지 않을 멍청이라거나.
맘 같아선 이들을 모두 건드려보고 싶긴 한데 그럴 수는 없다.
이미 거리에서 한 번 깽판을 친 내가 아카데미 내에서 다시 한 번 깽판을 쳐봐라. 공허의 추종자가 자신의 자취를 감추지 위해 한층 더 노력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만큼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긴 한데.
슬며시 루카의 이름을 바라보던 나는 그 녀석이 1왕비 측 세력에 포함되어 있음을 떠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여러 제약을 걸어두었으니만큼 내게 해가 될 일을 못하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이 녀석을 완전히 믿긴 그래.
루카라는 광인은 혼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인재가 정제될 것이라며 웃음을 터트릴 놈이니까.
일단은 최후의 수단으로 내버려 두자. 지금 당장 이 녀석에게 의존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아.
“고메릭 이 녀석은 용의선상에서 배제해도 괜찮다. 1왕비님께서 끌어들인 작자이니 당장에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터.”
이린 저런 고민 탓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내 옆에서 리스트를 바라보던 아서가 의견을 더했다.
“코펜 이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지난 번 사교회에서 만났을 때 화염학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눴거든요. 그의 대답은 교수 수준이 아니라면 내어줄 수 없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를 잇듯 조이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둘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장에 쓸만한 단서가 없기도 하고 좋은 안목을 지닌 두 사람이 그리 평가를 내렸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펜을 움직이자 페이비도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에팅거님 또한 제외해도 괜찮을 겁니다. 저번에 교회에 기도하러 오신 걸 봤을 때 아무 문제없었거든요.”
그렇게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 목록을 제거해 나가다 보니 리스트에 남은 사람은 단 셋뿐이었다.
지금 내가 얻은 정보들이 맞다면 이 사이에 공허의 추종자가 존재한단 소리일 텐데.
던전학이 둘이고 다른 하나는 전투학이네.
…잠시만. 던전학?
용의자들이 담당하는 학문을 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소울 아카데미의 입학식에는 아카데미에서 제작한 골렘들이 학생들을 습격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본래라면 이 행사는 철저한 통제 속에서 그 어떤 부상자도 없이 끝나야 할 일이지만 여기에 악신의 추종자가 끼어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카데미 교수의 흉내를 내고 있는 자가 골렘의 마법에 개입해 그 명령을 뒤튼다면 분명 큰 혼란이 벌어질 터.
아직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무작정 던전학 교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알른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던전학 교수는 무척이나 밝은 얼굴로 날 맞이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만든 던전 때문에 아카데미의 명예가 높아졌다 같은 소리를 하며 너스레를 떨려 했지만 난 그녀의 질문을 끊어내듯 리스트에 적혀 있던 던전학 교수 둘의 이름을 들이 밀었다.
“듣도 보도 못한 허접 둘. 지금 뭐 하고 있어.”
“…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교수님들이시네요.”
던전학 교수는 고갤 갸웃거리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한 사람은 이번 학기에 열릴 아카데미 던전의 제작을 돕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개학식 때 나타날 골렘의 정비를 하고 있다고.
“쉽게 말해 짬처리 당한 거죠. 힘들고 귀찮은데다가 지적까지 엄청 당하는 작업을 맡게 된 거니까.”
지금도 구르고 있을 거라는 던전학 교수의 말에는 동정이 묻어나왔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귀에 담지 못했다.
새로 들어 온 던전학 교수 중 한 사람이 개학식 때의 골렘 정비를 하고 있다는 건 내 예상이 들어맞을 가능성이 높아졌단 이야기니까.
“골렘의 위치요? …어. 말씀드리기 곤란한데요. 아무리 영애라도 그건 기밀인지라.”
“자칭 교수 나부랭이. 자꾸 그러면 허접 아카데미의 쓰레기 던전을 어떻게 박살내야 할 지 다 퍼트리는 수가 있어.”
아카데미 던전이 열리자마자 공략법이 퍼지는 꼴을 보고 싶냐는 내 협박에 던전학 교수가 기겁을 했다.
“아. 알겠어요! 대신 골렘 건드리시면 안 돼요?! 그거 아카데미의 전통이란 말이에요!”
교수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그녀의 부탁을 흘려들으며 방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무언가 단서를 찾아냈나?”
교수실의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 친구들은 내가 나오기 무섭게 내 주변을 둘러쌌다.
얘네 따라오라고도 안 했는데 왜 온 거야? 나는 그냥 칼이랑 둘이서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으음.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나쁠 건 없다. 지금이라면 전투 단계에서 충분히 일인분 이상을 해줄 게 분명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부분은 친구들의 지위와 명성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 테니까.
내 대답만 기다리는 친구들을 보던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지금 내 생각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 게 가능한가?”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아서가 의문을 표했다.
“잠입한 후 거기에 마법을 심는 게 가능하다고는 생각한다. 허나 던전학 교수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모두 검수를 할 텐데 그게 의미가 있나?”
“상대가 공허의 추종자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페이비가 평소에 비해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저들의 힘은 어딘가에 녹아드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악신과 오랫동안 싸워 온 교회의 사람들조차 쉬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권능인데 아카데미의 교수님들이라 하여 크게 다르진 않겠죠.”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악신의 추종자들이 벌인 수많은 재앙을 마주했던 페이비에 말에는 지위에 어울리는 무게가 존재했다.
그랬기에 아서는 그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얌전히 물러섰지만 프레이는 아니었다.
타인이 지닌 말의 무게 따위 알지 못하는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제 할 말을 내뱉었다.
“근데 악신의 추종자가 왜 아카데미를 노리는 거야? 소울 아카데미가 그렇게 대단한 곳인가?”
“…죄송합니다.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루시는? 루시는 알아?”
“응. 알아.”
“뭔데?”
“그치만 대답 안 해줄 거야. 바보멍청이인 너는 들어봐야 이해 못 할 테니까.”
“…치. 루시도 모르는 거잖아.”
“아닌데? 난 무능한 바보인 너랑 다른데?”
친구들은 내가 여느 때처럼 장난을 친다 생각한 듯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나는 정말로 악신의 추종자들이 왜 여기를 노리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구원과 멸망을 수도 없이 지켜 본 나인데 어찌 저들의 목적을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아직은 그걸 입에 담을 때가 아니었다.
쪼잔한 쫄보인 아그라가 언제 어디서 날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이상 이건 아직 나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할 일이다.
대화를 끝마치고서 빠른 속도로 움직인 우리는 금새 던전학 교수가 이야기 한 장소에 도착했다.
던전학과 건물의 지하.
소울 아카데미 던전 내부에 들어가는 골렘을 제작하고 보관하는 장소.
지난 번 직접 던전을 제작할 때에 수도 없이 들락날락한 곳.
이 곳의 지리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는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입학식 때 사용될 골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영애?!”
그 앞에는 대학원생 하나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별 말 하지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저항하기에는 우리의 지위가 너무도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영애님의 직감이 옳았네요.”
<이러니 거리를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렇게 안으로 들어온 순간 페이비가 날선 목소리를 냈고 할아버지가 짜증어린 목소리를 냈다.
이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 순간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지금 이 공간에 자리한 골렘들은 공허의 추종자들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성녀님에 3왕자님. 파트란 영애. 알른 영애. 켄트 영애. 거기에 칼 교수님까지. 바쁘신 분들이 왜 다 같이 이 곳에 오셨습니까?”
그 안에서 여러 학생들과 일을 하고 있던 교수는 우리의 방문에 진심어린 의문을 표했다. 우리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연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면 그냥 넘어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콰직! 메이스를 꺼내어 옆에 있던 골렘을 박살내버린 나는 당황한 체 하는 교수를 보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좆 같이 생긴 녀석이 좆 같은 짓을 하는 게 꼴 뵈기 싫어서 말야♡”
내 도발을 들은 교수는 일순 굳었다가 다시금 표정을 다잡았다.
“칼 교수. 영애께서 갑자기 왜 이러시는.”
“연기 잘 하네.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를 모시는 병신다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걸 믿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건가?♡”
“…”
“축하해♡ 네 죽음은 개죽음이 될 거고♡ 네가 믿는 작자는 너 따윌 기억하지도 못할 거야♡ 음흉한 쓰레기에게 어울리는 최후네♡ 그치?♡”
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잇듯 우리 뒤 편에 있던 문이 쿵!하며 닫힌다.
그리고 그 문 위에 역겨운 기운이 자리한 순간 교수를 비롯하여 이 안에 머무르고 있던 이들의 표정에서 당혹이 사라졌다.
“그리 뒤지고 싶으시다니 바라시는 대로 해드리죠. 이름만 드높고 머리는 없는 네놈들과 같이 뒤지는 거라면 나쁜 성과는 아니니까요.”
방의 외각부터 시작해 악신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을 본 나는 신성마법을 펼치려는 페이비를 막은 후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게을러빠진 허접 주신. 일 해.”
불경하고도 건방져서 도저히 기도라 부를 수 없는 어투였지만 마조변태인 허접 주신은 기꺼이 내 기도에 반응했다.
메이스에 담긴 신성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악신의 기운을 정화한다.
“유언 있으면 미리 말 해♡ 뒤지기 직전에 남긴 말이 살려주세요~ 라고 비는 거라면 너무 추하잖아?♡”
내 웃음을 마주하는 이의 눈에 증오가 서리며 이 방 안에 있는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