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사신이 사라진 후, 시간이 꽤 흘렀다.
전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신참 사신은 이제 신참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의 실력자로 성장해 있었다.
황금색 장작의 힘인 걸까?
누구나 치열하게 싸우는 이곳에서, 신참 사신만이 한 차원 높은 격에 도달해 있었다.
‘선배, 오늘도 지켜봐 줘.’
잠에서 깨어난 신참 사신은 숙소 내부에 놓여있던 구슬을 집어 들고, 자신의 후드 위에 붙였다.
그리고 거울 대신 사용하기 위해서 숙소 내부로 옮겨 놓은, 반질반질한 금속 덩어리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의지를 흘렸다.
‘엄마가 지금의 나를 보면, 검은 후드 사신이라고 불러주었을까?’
그 의지 속에는 엄마를 보고 싶다는 작은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신참 사신, 아니 검은 후드 사신은 평소처럼 엄마와 똑같이 생긴 자기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꼭 볼 수 있을 거야.’
‘엄마는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늦지 않았으니까.’
숙소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자, 검은 사신 본거지는 기분 나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잠든 검은 사신의 도시는 고요함이 가득했고, 천장에는 별이 되어버린 검은 사신들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똑같아 보이는 본거지였지만, 그전과 확연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하늘에만 가득했던 검은 사신의 별빛이 이제는 바닥에도 내려앉아 있었다.
매끈한 광택을 내는 검은 액체 위로 천장의 빛이 반사되어, 마치 땅 위에 또 하나의 밤하늘이 펼쳐진 것 같았다.
천장보다 몇 배는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별빛이 그곳에 있었다.
‘선배들….’
장작을 받지 못해 녹아버린 검은 사신들의 액체가 본거지 내부를 찰랑찰랑하게 채우고 있었다.
찰박찰박.
검은 후드 사신은 그 고요한 액체 표면 위로 물결을 만들며, 천천히 본거지 내부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본거지를 가로질러 거대한 화로 앞으로 다가가자, 화로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화로의 장작은 모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수많은 검은 사신들이 장작을 모두 써버리고 검은 액체로 변해버렸다.
사소한 상처를 입어도, 힘을 모두 써버려도, 흉터 사신처럼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외신 나비를 막을 수 없어.’
‘그래도 해내야만 해.’
‘엄마가 올 때까지.’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검은 후드 사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검은 사신이 쓰러질 때까지, 엄마를 기다리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검은 사신들은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의지를 다지며 텅 비어버린 화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 하늘을 꿰뚫는 하얀 섬광이 솟아올랐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수히 많은 빛의 기둥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비들이 왔어.’
평소에는 하나에서 두 개 정도의 빛기둥이 솟아오르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 이상 나비 군단을 억제하지 못하게 된 검은 사신들을 해치우기 위한, 대대적인 습격이었다.
본거지 앞으로 나오자, 거대한 외신 나비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겁쟁이 나비면서 오늘은 숨지 않네….’
그때, 본거지에 남아있던 검은 사신들이 천천히 밖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꺼질 것처럼 희미한 장작.
온몸에 새겨진, 재생하지 않고 남겨둔 상처들.
너덜너덜한 검은 사신들이었다.
‘동생.’
‘이제 마지막이야.’
마지막 전투를 직감한 것일까.
검은 사신들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검은 후드 사신이 뒤를 돌아보자, 검은 사신들이 모두 미니 사신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며, 계속해서 옛 신 형상을 하던 선배들이었는데?
검은 후드 사신의 의아한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선배 검은 사신들이 의지를 보내왔다.
‘우리는 여기까지야.’
‘끝까지 싸우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가 싸우는 것보다, 너라면 더 잘 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일제히 자기 심장에서 장작을 끄집어내어 검은 후드 사신에게 남겨주었다.
장작을 잃어버린 검은 사신들은 모두 검은 액체로 변해 녹아내렸다.
‘….’
검은 후드 사신은 한참 동안 물끄러미 장작을 내려다보다가, 하얗게 타오르는 장작을 주워 자기 몸에 집어넣었다.
순간, 검은 후드 사신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혼자 남은 검은 후드 사신은 나비의 대군을 향해 홀로 나아갔다.
머리 위로 희미하게 빛나는 헤일로가 점점 강렬해졌다.
‘엄마, 늦으면 안 돼….’
검은 후드 사신의 의지가 은은하게 색채 우주의 세계에 울려 퍼졌다.
그 앞에는 무수한 나비들이, 뒤에는 동료들의 유산이 있었다.
마지막을 향한 최후의 뚜방뚜방이었다.
***
늦은 밤, 서울숲 깊숙한 곳.
나는 감각을 넓게 펼친 채, 나무가 무성한 숲속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가운데, 미니 사신들의 소란스러운 의지가 음산한 서울숲 분위기를 뒤바꾸고 있었다.
‘동생!’
‘어디 있어?’
‘같이 푸딩 먹자!’
미니 사신들을 서울숲에 잔뜩 풀어 검은 사신을 찾게 만든 탓에, 음산한 한밤의 숲은 이제 소란스러운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댖지가 되지 않기 위한 미니 사신들의 열정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검은 사신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뚜방뚜방.
부드러운 흙이 가득한 숲속 공터를 걷고 있었더니, 갑자기 흙 속에서 검은 사신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앗!’
나와 눈이 마주친 검은 사신은 히히 웃더니, 다시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흠, 실종된 검은 사신이 땅속에 있지는 않을 텐데….
나는 검은 사신 두더지와 일별하고, 내 직감만을 의지해서 숲속을 계속 나아갔다.
부스럭. 부스럭.
그러던 중, 나무 위에서 조그마한 동물이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이 흔드는 소리와 조금 다른,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위로 던져보니, 높은 나무 위에서 황금색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으앙!’
그렇게 떨어진 황금 사신은 내 손바닥 위로 폭 하고 떨어졌다.
‘엄마다!’
황금 사신은 내 손아귀 안에서 조그마한 손을 앞으로 뻗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황금 사신을 내려다보면서, 작게 의지를 흘렸다.
‘하라는 수색 작업은 안 하고 빈둥빈둥 노는 황금 사신은 댖지로 만들어버려야지!’
‘앙대!’
그러자 황금 사신은 화들짝 놀라서 숲속 깊숙한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내 주변에서 수색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황금 사신들도 깜짝 놀라서 사라져 버렸다.
‘황금 사신에게 작업시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네.’
제일 착하고 말을 잘 듣기는 하지만, 뭔가 명령의 전달이 원활하지 않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주변을 배회하던 황금 사신들이 사라져서, 조금은 조용해진 숲속.
나는 계속해서 감각을 넓혀가며 검은 사신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희미한 의지가 들려왔다.
시끌벅적한 미니 사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굉장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감각을 곤두세웠다.
‘동생 어딨어!’
‘동생!’
[오늘도 지켜봐 줘.]
‘푸딩 먹자!’
미니 사신들의 소란 속에서도 그 희미한 의지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오는 것처럼 아득하고 묘한 느낌이었다.
‘잠깐, 떠들지 마!’
나는 모든 미니 사신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순간 숲은 고요해졌고, 모든 미니 사신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희미하게 들리는 바람 소리와 외신의 느낌.
미니 사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네.’
나는 그 희미한 의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니 사신들은 조용히 나를 따랐다.
나는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점점 더 어둡고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발을 디뎠다.
도착한 곳은 공간 절단으로 나무가 잘려 나간 처참한 공터.
그곳에는 물거품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공간의 틈이 무수히 많이 뚫려 있었다.
[엄마, 늦으면 안 돼….]
그리고 나는 물거품 같은 공간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의지를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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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찰나의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공간의 틈이었지만, 한번 인지를 하고 나면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그대로 공간을 찢어버리고, 씨익 웃었다.
‘대단해!’
‘엄마, 대단해!’
‘강한 엄마!’
내 눈앞에는 검은 사신의 기척이 느껴지는 커다란 공간의 통로가 열려있었다.
히히.
***
색채 우주의 하늘 아래, 검은 후드 사신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검은 후드 사신의 전신에는 여기저기 베인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리고 검은 후드 사신의 발밑에는 거대 나비들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전부 무언가가 뜯어먹은 듯한 상처가 남은 처참한 시체들.
모자에 달린 날카로운 이빨에 남은 질척질척한 나비의 살점을 보면, 무엇이 원인인지 명약관화했다.
나비들은 검은 후드 사신에게 ‘먹혀’ 버린 것이다.
적을 먹고, 적의 힘을 빼앗고, 자신의 상처와 힘을 회복하는 능력.
검은 후드 사신의 능력은 엄마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검은 후드 사신은 한계에 가까웠다.
장작을 거의 다 소모했으니까.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희미한 황금색 불꽃.
그런 희미한 불꽃을 가까스로 붙들고, 간신히 서 있었다.
그런 상태를 눈치챈 것일까.
나비의 대군이 뒤로 천천히 물러서고, 외신 나비가 거대한 몸을 이끌고 다가왔다.
마치 눈높이 차이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외신 나비는 후드 사신을 내려다보았다.
‘다가왔구나. 겁쟁이!’
그 모습을 보면서, 검은 후드 사신은 보이지 않게 웃었다.
쩌저적.
검은 후드 사신의 몸에 수많은 균열이 일어나더니, 황금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후드 사신이 선배에게 마지막으로 배운 기술이었다.
정찰 역할을 하던 검은 사신들의 마지막처럼.
자기 몸을 폭탄으로 바꾸는 방법.
‘엄마.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외신 나비는 하나만 남은 다리를 이용해서 서둘러서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외신 나비의 육중한 몸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터지기 직전, 검은 후드 사신은 환하게 웃으며 정면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나 열심히 했어.’
그런 검은 후드 사신의 시야 정면에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마지막 환상만큼은 웃는 얼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검은 후드 사신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