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을 넘자마자 보이는 것은 특이하게 생긴 검은 사신이었다.
옷 비슷한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머리 위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헤일로까지 떠 있는, 이전에 본 적 없는 특별한 미니 사신이었다.
‘이 정도면 제1 검과 비슷한 수준인 것 같은데?’
그 밑으로 갈기갈기 찢긴 나비들의 사체만 봐도 명백했다.
저 나비들은 평범한 황금 사신들이 처리하기 곤란해할 수준이었으니까.
그런 나비들을 이렇게나 많이 해치운 것을 보니, 이 검은 후드 사신의 능력은 범상치 않았다.
‘흠, 생긴 게 후드를 뒤집어쓴 것 같으니까, ‘검은 후드 사신’이라고 부르면 되겠지.’
나는 간단하게 검은 후드 사신의 명칭을 정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원을 넘어 도착한 이곳은 한없이 색채 우주와 가까운 어딘가였다.
머리 위에는 더욱 선명하게 빛나서,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는 색채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검은 후드 사신을 다치게 한 원흉, 외신 나비가 거대한 몸을 바닥에 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고 있었는데, 내 눈앞에 있던 검은 후드 사신이 갑자기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검은 후드 사신의 몸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멈춰. 그만해!’
나는 깜짝 놀라서 검은 후드 사신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계속 자폭하려고 할 줄이야….
나는 검은 후드 사신의 앞에서 서서, 자폭하려는 후드 사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 순간, 내 손가락에서 황금빛 장작의 격류가 쏟아져 나와, 검은 후드 사신의 몸을 감쌌다.
내 의지를 따르는 눈부신 황금색 불길이 후드 사신의 전신을 휘감으며 폭발을 억제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끓어오르던 장작은 잠잠해졌고, 깨진 도자기처럼 갈라진 몸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황금색 불길에 휩싸인 검은 후드 사신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에는 혼란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엄마? 진짜 엄마야?’
검은 후드 사신은 마치 환영을 보는 것처럼 손으로 자기 눈을 쉴 새 없이 비비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문으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점점 맑아지며 확신으로 가득 차자, 검은 후드 사신은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짜 엄마다!’
그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엄마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무심코 토닥여 주고 싶어지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나를 걱정시킨 데다가 자폭까지 시도한 것에 대한 혼을 내주기로 마음먹었다.
검은 후드 사신이 나를 향해 뛰어드는 순간, 나는 후드 사신의 이마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앗!’
검은 후드 사신은 깜짝 놀라 이마를 문지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곧 댖지로 변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으앙!’
댖지가 되어 바닥에 누워있으면서도, 검은 후드 사신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히히 웃기만 했다.
나는 댖지 후드 사신의 뱃살을 몇 번 두들겨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도대체….’
눈으로 보기에는 황량하기만 한 공간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조금 달랐다.
‘엄마 빨리 와!’
‘엄마, 잘했지?’
‘끝까지 싸웠어!’
‘내가 만든 빛기둥이, 엄마에게 보이기를….’
수많은 미니 사신의 의지가 서려 있었다.
얼마나 많은 미니 사신이 나를 향한 의지를 토해냈으면, 공간 자체에 의지가 틀어박혀 버린 걸까?
그것은 나에게만 보이는, 나를 향한 미니 사신들의 편지였다.
나는 미니 사신들이 남긴 편지들을 들으며, 고개를 들고 외신 나비와 마주했다.
‘네 녀석이 우리 아이들을 아프게 한 녀석이구나.’
나는 나비를 올려다보며 사나운 표정으로 웃었다.
저 나비는 외신이었지만, 너무 많이 다쳐서 외신의 격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나비 몸에 새겨진 커다란 손톱자국들은 아마 검은 거인이 남긴 상처겠지.
게다가 헤일로를 억지로 쓰고 있어서 그런지, 상처는 치유되지 못하고 악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겨우 그 정도 능력으로 우리 아이를 납치하다니, 배짱 한번 정말 좋네.’
나는 우선, 저 외신 나비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로 결심했다.
***
[■ ■ ■ !]
시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외신에게 ‘기다림’이라는 감정은 본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신 나비는 이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검은 외신으로부터 받은 치명적인 상처로 인해 격이 깎여나가, 시간에 붙잡혀 버렸을 때 한 번.
그리고 그 하수인들과 끊임없는 전투를 통해 자연스럽게 한 번.
두 번에 걸쳐서 ‘기다림’이라는 느낌을 습득하게 된 것이다.
기대와 초조함.
이 두 가지 감정은 외신 나비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성가신 하급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고 검은 거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
검은 거인의 ‘눈’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
지금, 이 순간에라도 검은 거인이 나타날 수 있다는 초조함.
이러한 감정들이 외신 나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검은 거인의 하수인들을 모두 제거하고, 검은 거인의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그 순간.
황금색 불꽃을 다루는 하수인이 출현하여, 성가신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외신 나비의 진로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신 나비는 그 존재를 수월하게 제압하고 계속해서 전진하려 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검은 거인과 유사한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 ■ ■ ■ ■ ]
분위기도 생김새도, 뿜어내는 격도.
무엇 하나 닮지 않았지만, 검은 거인이라고 느껴지는 무언가.
[■ ■ ■ ■ ■ ■ ■ ■ ]
그 검은 거인과 닮은 무언가는 공간을 잘라, 외신 나비를 토막치기 시작했다.
단번에 부서지지 않도록, 천천히, 조금씩.
공간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절단의 폭풍 속에서, 외신 나비는 처음으로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경험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존재가 왜 하필 지금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이 질문은 외신 나비의 의식을 강하게 흔들었다.
파괴의 순간이 다가오자, 외신 나비는 마지막 선택을 내렸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눈’을 포기한 것이다.
검은 거인에게서 훔쳐 온 눈.
이 모든 기다림의 이유였던 눈.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하얗게 빛나는 광채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섬광으로 변해 사라졌다.
‘눈’은 결국 검은 거인이 지배하는 땅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와 동시에, 나비의 형상으로 유지되던 외신 나비의 모습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외신 나비의 본질적 형태는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비는 원래 이 세계의 물리법칙을 초월한 존재였다.
나비의 형상이 붕괴하며, 나비는 그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외신은 게걸스럽게 세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이번 사건도 곧 끝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외신 나비는 상처가 너무 심해서 너덜너덜했고, 파괴 조건도 명확하게 보였으니까.
<격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의 손상.>
나는 외신 나비의 파괴 조건도 채우고, 검은 후드 사신의 복수도 해줄 겸.
공간 절단으로 외신 나비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남은 다리 하나도 싹둑 잘라버려서 기지도 못하게 만들고.
흔적만 남은 날개도 뿌리까지 도려내고.
마지막으로 통통한 나비 몸통을 토막 치고 있었다.
‘슬슬 나비가 파괴될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외신 나비의 머리 위에서 헤일로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헤일로는 섬광으로 변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그와 동시에 외신 나비의 모습이 공기 중에 녹아들더니, 공간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 전체가 수정이 된 것처럼 빛을 반사했고,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균열이 공간에 잔뜩 새겨졌다.
그 깨진 조각들이 나비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거울처럼 선명한 상을 비추는 수정 나비.
마치 세공된 다이아몬드처럼 여러 가지 면을 가진 나비에게 비치는 거울상.
그리고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수정 나비.
수많은 수정 나비가 서로 비추기를 반복하자, 마치 거울로 된 방처럼 수정 나비의 거울상은 뒤죽박죽에 일그러져 보였다.
그리고 그 일그러진 형상을 바라보면, 그 수정 속에 비친 형상이 현실을 침식해 버렸다.
‘!!!’
문제는 내 시야가 360도라는 점이었다.
사방에서 일그러진 형상이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내 팔다리는 거울상처럼 이리저리 꺾이고 잘려 나갔고, 그 상처에서는 황금색 장작이 핏물처럼 흘러나왔다.
< ■ ■ ■ >
설상가상으로 파괴 조건마저 가려져 버렸다.
‘엄마!’
‘우리가 왔어!’
그리고 상하좌우마저 마구 뒤집히기 시작하는 공간 속에서, 나는 미니 사신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
시공간의 개념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외신 나비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외신 나비는 빠른 속도로 격을 회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외신 나비가 침식하기 시작한 공간은 효과적으로 적들을 무력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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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비슷한 인식을 지닌 검은 거인의 하수인들은 물론, 격과 크기를 모두 상실한 채 쇠락해 버린 검은 거인까지.
갑작스럽게 출현한 존재는 검은 거인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격은 현저히 부족했다.
정확하게 재단한 것처럼, 외신에 닿지 못하는 한계치의 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외신 나비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했다.
흐트러진 공간 속에서 방황하는 하수인들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어지러워!’
‘엄마 어딨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외신 나비는 특정한 패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전보다 현저히 강화된 검은 거인의 하수인들과 대조적으로 약화된 검은 거인의 모습이 그것이었다.
이는 검은 거인이 자신의 격을 하수인들에게 분배한 결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외신 나비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외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차원의 틈새를 통과한 한 하수인이 황금빛 반투명한 칼날을 형성하여 혼잡한 공간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강도!’
황금빛 칼날은 공간의 복잡한 얽힘을 무시한 채 직진하더니, 영락한 검은 거인의 핵심을 정확히 관통해 버렸다.
그것은 하극상이자, 반역이었다.
이는 마치 과도하게 강화된 하수인이 일으킨 불가피한 [내부 분열]로 해석되었다.
외신 나비가 격을 회복하면 회복할수록, 외신 나비의 의식 속에서 승리와 패배의 개념은 점차 흐릿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희미한 인식 속에서 승리에 대한 직관적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외신 나비의 영역에서 외신의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한 방울.
영락한 검은 거인에게 모자랐던, 한 방울의 격이 채워진 것이다.
영락한 검은 거인의 몸을 중심으로 대지가 하얗게 물들며, 세계가 침식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