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2
학장과의 맹세를 끝마친 다음 날 그는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나를 찾아왔지만 그런다 한들 우리 사이의 맹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약속한 대로 편지를 찢었으니 이제는 학장이 약속을 지킬 차례가 된 것이다.
“걱정 마세요. 학장님. 맹세에 적어놨던 대로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그 때에는 놓아드릴 테니까.”
“…영애 당신.”
“그리고 말이죠. 멍청하고 무능한 학장님께선 제가 아니었다면 정말 목이 날아갔을 거라고요. 쓸모없는 목숨을 지켜준 대신 귀여운 제 노예로 2년간 살게 해 주는 거라면 제가 훨~씬 더 손해 보는 거래 아닐까요?”
“…”
“정 싫으시다면 파파랑 면담하게 해드릴 수도 있는데요?”
“…아닙니다! 영애! 그저 영애의 자비가 감탄스러워 잠시 할 말을 잃었을 뿐입니다!”
학장은 전술병기인 베네딕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던 듯 얌전히 내 노예로 사는 처지를 받아들이면서도 속으로 울분을 삭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왜 싫어하나 생각을 하다 뒤늦게 내 사고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노예처럼 일하라 그랬을 때 더 마구잡이로 대해 달라 그러는 건 이상한 일이고.
내 주변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변태들이 많아서 이상에 너무 익숙해져버렸어.
그렇게 학장이 떠나가고 난 후 찾아온 것은 저택에서 항시 내 옆에 달라붙어 있던 에린이었다.
“허접 에린. 너무 빨리 온 거 아냐? 귀여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내가 알른 저택에 연락해 에린을 보내달라고 이야기한 것이 어제 저녁의 이야기다.
저택에 존재하는 체계가 있으니 아무리 빨라도 이틀 정도는 걸릴 것이라는 게 내 예상이었는데 하루가 지나자마자 바로 도착할 줄은.
“네. 엄청나게 보고 싶었답니다.”
환히 웃는 에린에게 이야기 듣기로 밤을 새어가며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이 곳에 왔다는 모양이다.
“제가 하던 일이라고 해봐야 몇 개 안 되니까요.”
…아니 내가 알기로 우리 저택 시녀들의 스케쥴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차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린은 내 전속시녀니까 약간 다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일단 에린을 안으로 들렸다. 아직 에린에게 숙소가 배정되기 전이라 당장은 내 방에 묵어야 하거든.
“…그럴 수 없습니다. 아가씨. 어찌 시녀가 주인과 같은 방을 사용하겠습니까.”
이 곳에 짐을 풀라는 이야기에 에린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칼님께 도움을 청하고 정 안 된다면 바깥에서 잠자리를 찾아보겠습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방에 묵을 바에는 차라리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겠다니!
나랑 같이 있는 다는 게 그렇게 부담스러운 거야?!
내가 뭐 했다고!
예전의 루시라면 모를까 지금 나는 너한테 별 대단한 거 안 시키잖아!
“허접 에린 주제에 내 명령을 거부하겠단 거야?”
“죄송합니다. 아가씨.”
다시금 권유를 해봤음에도 에린에게 거절당한 나는 미간을 찌푸리다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최근 표정을 짓는데 자유가 생기며 할 수 있게 된 것이 있거든!
지난 번 난색을 표하던 칼에게 프레이를 떠넘기기 위해 사용했던 기술이자 허접 성녀조차 감히 저항하지 못하는 내 나름의 필살기!
“건방져. 허접 에린.”
루시 알른은 울상짓기를 사용했다!
“아. 아가씨. 저 그것이.”
“됐어. 허접 에린은 내가 싫은 거잖아? 그럼 나도 싫어.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이 곳에 있겠습니다!”
효과는 굉장했다! 허접 에린은 말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에린이 방 안을 조심스레 움직이며 짐을 푸는 동안 나는 바깥으로 나와 페이비를 찾았다.
교회의 권력자인 성녀님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으니까.
“밤 중의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허접 주신에게 정성스레 준비를 한 후 기도를 하겠다고 약속한 게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의 일이다.
본래는 예술 교단에 들려서 화장을 받은 김에 기도를 하려고 했었는데 그 때 하도 난리가 나는 바람에 잊고 지나가 버렸지. 그 뒤로는 노가다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말야.
퀘스트를 내어주면서까지 노골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걸 보면 허접 페도 주신도 나름대로 간절한 것 같으니까. 여태 기다리게 한 대신 제대로 해 보려고.
“허접 성녀라도 성녀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물론 가능하기야 합니다. 그런데 굳이 밤중에 하실 필요가 있나요? 영애님께서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게 불편해서 밤중에 하려는 건데요.
생각을 해 봐.
제대로 된 화장을 하고 앞에 나서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잡아끄는 게 나야.
그런 내가 여러모로 신경 쓰고 신상 앞에서 신성을 뿜어대면 어떤 꼴이 나겠어.
나는 이 이상 얼빠여우나 변태사도 같은 인간을 양성하고 싶지 않다고!
예술 교단에서 겪었던 일을 다시 재현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격하게 거부의사를 표명하자 페이비는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 날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다.
“주교님께 말씀을 드려 준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 필요하시다면 교회의 복장도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교회의 복장? 흐응. 뭐야. 허접 성녀. 내가 그 옷을 입은 걸 보고 싶은 거야? 순진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네?… 아. 아뇨! 딱히 제가 바란 것이 아니라! 아예 안 바란 건 아닌데! 아니. 으아앙!”
얼굴이 시뻘개진 페이비를 쿡쿡 찌르면서 놀리던 나는 그녀의 의견이 나쁘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
기왕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복장까지 준비를 해야지.
근데 나한테 맞는 옷이 있긴 한가?
내 체형을 생각해봤을 때 따로 맞추는 게 아니라면 찾기 힘들 텐데?
이런 의문을 던져 보았더니 페이비가 해맑게 웃으며 안심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교회의 아이들이 입는 복장이 있거든요.”
…뭐?
“영애님과 키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으니 조금만 조정하면 될…”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입을 움직이던 페이비는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나라는 사람의 인격은 이미 페이비에 의해 모독된 상태였으니까.
“죄송합니다. 영애님.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저. …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용서를 빌 시간을. 흐아앙! 아하여! 아하여여어어!”
자기는 키가 크다고 뻗대는 성녀님의 볼따구를 시뻘겋게 만들어준 나는 다시 한 번 도발하는 순간 빵떡성녀로 만들거라는 경고를 함으로써 페이비에게 자기 주제를 알려줬다.
*
“이 정도면 조금만 수정하면 되겠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가씨.”
너무나도 열이 받는 일이지만 페이비가 내어 준 자그마한 수녀복은 내 몸에 맞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금 컸다.
어린 아이들이 입는다는 이 수녀복이 컸단 말이다!
살짝 헐렁한 수녀복을 본 페이비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듯 슬며시 고개를 틀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네 아비가 그토록 큰데 왜 루시 너는 이리 자그마한지.>
‘…자그마하다고요?’
<말이 헛 나왔구나. 미안하다. 닥치고 있겠다.>
날 선 태도로 할아버지를 조용하게 만든 나는 에린이 날 꾸며주는 것을 가만 구경했다.
에린의 움직임은 크게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변태 사도로부터 교습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토록 실력이 좋아진 건지.
여러 잔상처가 잔뜩 새겨진 에린의 손을 보던 나는 후일 그녀의 손을 말끔하게 해줄 물건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옷을 조금씩 잘라내는 걸 보면 좀 짜증이 났지만… 이건 에린의 잘못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참아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된 내 모습은 늦은 저녁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귀함을 지니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작고 예뻐서 인형같단 소리를 듣던 내가 수녀복까지 입으니 순수하고 고결하단 느낌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영애님께서 저보다도 성녀 같으시네요.”
이런 감상을 품은 건 나 뿐이 아닌 듯 페이비는 내 모습을 보고서 감탄의 목소리를 냈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페이비가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라.
낮에 기도를 하지 않길 잘했네. 만약 모두가 보는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등장했다면 분명 개판이 났을 거야.
“그럼 가실까요?”
“그래. 허접성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페이비의 뒤를 따라 허접 주신의 신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몇 달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
아카데미의 교수 루카는 최근 짜증스러운 기분을 자주 느꼈다.
그가 사랑하는 인재들이 아카데미에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의 소울 아카데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재가 풍성한 시기이니까.
당장 일년 전의 루카였다면 그는 자신이 할 일이 너무도 많단 사실에 쉴 새 없이 웃음을 흘려댔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루카는 수많은 인재를 눈에 담으면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어떤 인재를 보더라도 루시 알른이란 별 하나가 보이는 빛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어 성에 차질 않는 것이다.
루카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아카데미에 복귀한 루시 알른이 그를 찾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뭐 박살낼 곳 없느냐고 물어보던 것이 그녀이거늘 방학이 끝나고 복귀한 후에는 무언가 부탁을 하러오긴커녕 말조차 걸어오지 않은 것이다.
루시 알른을 위해 이런저런 시련을 준비해두었던 루카는 혼자서 안절부절 하다가 결국 개학을 앞두고 먼저 루시 알른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스스로가 지닌 쓸모를 증명하고 그녀라는 보석의 세공자로 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다.
자신이 보았던 그 어떤 별보다 높이 올라가 세상을 환히 빛낼 존재를, 그의 열망을 대신해서 이루어 줄 존재를 놓치는 것보다야 자신의 자존심을 내다버리는 쪽이 훨씬 더 나으니까.
세상에 어둑해졌을 무렵 움직이기 시작한 루카는 우연찮게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는 루시 알른을 발견했다.
옆에 있는 건 이번에 알른 영애가 데리고 온 시녀고, 다른 한 사람은 주신 교회의 성녀님이시군.
알른 영애는 몰라도 규칙과 규율을 중시하는 성녀님께서 이런 시간에 외출이라니.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생긴 루카는 루시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존재감을 지우고 그녀의 뒤에 따라 붙었다.
루시 일행의 행선지는 밤중의 교회였다.
불이 꺼지고 모두가 내일 새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고요한 장소.
루시 알른의 교회 혐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루카는 무슨 일일까 생각을 하며 그들을 따라 예배당에 들어갔다.
허나 그 이상 접근하진 못했다.
그가 따라 붙기 전에 문이 닫혀버렸으니까.
저걸 열고 안에 들어갔다간 들킬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예배당 구석의 어둠 속에서 안 쪽으로 들어간 루시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거리마저 완전한 고요로 물들고 모든 이들이 꿈의 세계로 향할 즈음이 되었을 때 다시금 루시 알른이 얼굴을 드러냈다.
옆에 선 주신 교회의 성녀보다도 더욱 더 성스럽고 고결한 모습을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