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3
루카는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의 눈에 비치는 정경은 그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달빛은 먹구름에 잡아먹혔고 별빛들도 제 얼굴을 내비치지 못하는 어두운 날.
모든 빛이 사라져버린 교회의 한 가운데에 선 루시 알른은 짙고도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세상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겨울에 쌓인 눈밭보다도 새하얀 피부가.
밤중에도 자연스레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별 생각 없이 걷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끔한 몸놀림이.
살짝 커서 나풀거리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신비하단 느낌을 주는 수녀복이.
빛 하나 없는 밤중에도 세상을 명확히 바라보는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가.
어두운 교회의 예배당에서 루시 알른이 있는 곳에 빛이 가득 찬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들킬지 모른단 생각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루시가 있는 곳을 바라보던 그는 루시 알른이 신상 앞에 서는 것을 눈에 담았다.
성녀보다도 더욱 성스럽고 고결해 보인다는 생각은 루카만의 것이 아니었다.
루시 알른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에 끌어 모은 순간 그녀의 주변으로 따스한 신성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까.
오랜 시간 교수로서 일해 온 루카는 온갖 성직자들을 만나보았다.
그 중에는 부패하여 왜 주신께서 이런 놈에게 신성을 베푼 것일까 하는 자들도 존재했고 너무도 고결하여 되래 멍청하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이도 존재했다.
그러면서 루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양 극단에 선 것처럼 보이는 두 부류가 다루는 신성이 비슷하다는 것 말이다.
교회의 성직자는 그 비슷함을 주신의 평등이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신의 아래에 있는 다른 선신들은 자신을 믿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힘을 베푸는 데 왜 주신만이 평등을 추구한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을 품었던 루카는 주신이 보여주는 모습이 평등이 아닌 무능임을 남몰래 확신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루카의 확신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루시 알른이 지닌 태양처럼 따스한 신성은 여타 성직자들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했으니까.
분명했다.
여태까지 내가 보아왔던 성직자들이 다 비슷한 신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뜻이 주신의 뜻과 달랐기 때문이다.
주신이 여태 침묵했던 이유는 주신 교회라는 장소 자체가 불만스러웠기 때문이었단 말이다!
보라! 신화 속에 구전되던 것처럼 주신의 따스한 신성을 품은 루시 알른의 모습을!
저 분이야말로 주신의 사랑을 받는 자다! 주신의 뜻을 세상에 펼칠 자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밝은 태양이 될 자란 말이다!
따스한 신성의 한 가운데에서 기도를 올리는 루시 알른의 모습을 눈에 새기던 루카는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알른 영애라면.
주신의 사랑을 받는 저 분이라면.
알른 가문의 압도적인 재능을 개화한 저 사람이라면.
외견과 어울리지 않는 경이로운 끈기를 지닌 저 자라면!
내 목표를 이루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았던 재능의 별을 흐리게 만들어 줄지도 몰라. 광증이 서린 웃음을 얼굴에 새긴 루카는 루시 알른을 위한 시련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태까지 그녀의 성장을 돕기 위해 준비했던 자잘한 것들이 아니라. 루시 알른이라는 신성에 루카라는 세공사의 이름을 새기기 위한 시련을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 곳에서 알른 영애를 지켜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들킬 가능성이 너무도 높으니 슬슬 빠져나가 볼까.
루카는 마지막으로 루시 알른의 얼굴을 눈에 새긴 다음 조용하게 에배당을 빠져나갔다.
*
허접 주신을 위해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로 마음 먹는 나는 여태까지 허접주신을 향해 내뱉었던 온갖 매도를 빼버리고 오롯이 주신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다짐을 담아 기도의 내용을 가득 채웠다.
여태까지 나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루시가 슬픔을 달랠 수 있도록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당신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악신의 그림자를 지워 버릴 것이란 맹세를 말이다.
할 말을 모두 끝마치고서 눈을 뜬 나는 예배당을 환히 밝히고 있는 신성을 거두려다가 내 옆에서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 페이비와 에린을 보고 그냥 신성을 내버려 두었다.
페이비가 내 옆에서 기도하는 거야 일상적인 일이지만 에린이 기도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얘가 주신 교회의 신자였던가?
내가 기억하기로 주말에 에린이 어디 바깥으로 나가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보통 내가 저택에 있을 때 에린은 항상 내 옆에 달라붙어 있으니까.
…어쩌면 이전의 루시가 교회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언급을 피한 걸지도 몰라.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직장상사라니. 루시 알른 괴담은 아직도 이어지는 건가.
– 띠링.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귓가에 쏘아지듯 들려온 알림음을 듣고 고갤 들었다.
[사도의 기도가 주신에게 닿았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스킬 [부정 구축]이 지급됩니다!]
부정 구축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내가 아는 부정 구축이라는 스킬은 성기사나 사제 트리를 타다 보면 배울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의 일종이다.
효과는 악신과 관계된 이들과 싸울 때 능력치를 증가시켜주는 것과 신성을 펼쳤던 곳에 일정 시간 동안 악신의 기운이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
2학년이 시작되면 이전보다 악신의 추종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텐데 그 때 이 스킬은 분명한 도움이 되겠지.
기도 한 번 하고서 받은 보상치고는 너무도 좋은 보상이긴 했지만 난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악신의 추종자들을 아카데미 거리에서 몰아낸 후에 받아낸 보상이 명성의 증가였어.
몸으로 체감하기도 어려운 애매모호한 보상이었다고!
근데 기도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쓸만한 스킬을 주다니!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보상이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줘도 지랄이라고 할 수 있단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잖아!
대체 허접 페도변태주신이 얼마나 괴상한 녀석이면 보상을 이따위로 지급하냐고!
반 강제적으로 모시게 됐다 한들 그래도 내가 모시는 신인데 좀 위엄을 가져달라 부탁하는 게 잘못된 일이야!?
허접 주신의 신상에다 대고 불만을 잔뜩 드러내고 있으려니 또 다시 알림음이 울렸다.
변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싶어 미간을 찌푸린 나는 기존 퀘스트가 새로운 퀘스트로 변화했단 문구를 보고 고갤 갸웃했다.
[루카의 시련]
[아카데미의 교수 루카는 밝게 빛날 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합니다. 그가 준비하는 시련을 돌파하십시오.]
[보상 : ???]
[실패시 : ???]
루카? 루카가 왜 갑자기 튀어 나와?
나 아카데미 복귀하고 나서 걔랑 만난 적도 없는데?
고갤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금 푸른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아무리 허접 주신이 위엄 없는 변태라해도 이런 걸로 이야기를 돌리려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고민을 이어나가던 나는 에린의 걱정스런 물음을 듣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렴 어때. 내일 직접 만나서 확인해보면 되는 일이니까.
지금은 눈물을 흘리다 실신할 것 같은 페이비를 진정시키는 것부터 하자.
*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일어난 나는 언제 일어난 것인지 완벽하게 준비를 끝마쳐둔 에린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오늘은 아카데미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찾아가 제가 할 일을 찾으려 합니다. 아가씨께서 수업을 들으시는 것을 따라다니는 건 민폐니까요.”
에린이 머리를 묶어주는 동안 오늘 하루 무얼 할 것이냐 물어보았더니 그녀는 일거리를 찾겠다고 말을 했다.
평민들 사이의 내 이미지가 좋지 못함을 아는 나는 괜찮겠느냐는 물음을 던졌지만 에린은 당찬 웃음을 지어보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그런 걸 해결하는 데 무척 익숙해졌거든요.”
익숙해졌다는 에린의 말에 의문을 품은 나였지만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자신만만해 보였기에 일단은 보내주기로 했다.
에린이 말했던 것처럼 그녀를 언제까지고 내 옆에 둘 수도 없는 거니까.
나중에 칼한테 이야기해서 잘 지켜보라고 말을 해두면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
몸단장을 끝마치고 방에서 빠져 나온 나는 즉시 루카의 교수실을 찾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내가 아는 루카라면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른 영애.”
내 예상대로 루카는 서류 더미를 책상 위에 늘어트린 채였다.
여느 때처럼 서류를 정리해 서랍 안에 집어 넣은 그는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여러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꽤 오랜 시간 대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루카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1왕비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일부러 거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분께서 영애께 눈독을 늘이는 것 같았거든요.”
심지어 1왕비와의 관계를 언급했음에도 말이다.
이렇게 판단을 내린 것은 할아버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지라 나는 당장의 의심을 접었다.
일단 꾸준히 경계하고 지켜 보는 걸로 가닥을 잡자.
퀘스트가 주어진 이상 언젠가 이 녀석이 미친 짓거리를 할 건 분명하니까.
확인할 것을 끝마치고 교수실을 빠져나가려던 그 때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본 루카가 마침 떠올랐다는 듯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알른 영애. 혹여 방학 때 예술 교단에서 무언가를 하셨습니까?”
“그런 건 왜 물어 보는 거야? 너처럼 집착 심한 허접 변태한테 사생활을 알려주고 싶진 않은데.”
“아아. 그것이 예술 교단 측에서 영애와 관계된 물건들을 퍼트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벌써?!
내가 예술 교단에서 빠져나온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벌써 물건이 퍼져!?
광인들의 무리가 지닌 놀라운 추진력에 놀라 굳어 있으려니 루카가 자신의 서랍에서 팬던트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수수해보이는 펜던트 안에는 눈을 감은 채 기도하고 있는 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당장은 시제품을 내고 분위기를 확인하는 중인 듯 합니다만 노래와 시는 물론이고 영애와 관계된 연극까지 만든다는 소문이 파다한 걸로 보아 예술 교단에선 자신들의 성공을 확신하는 듯 합니다.”
노래나 시 같은 것까진 이해할 수 있어. 어차피 변태 사도가 이미 퍼트릴 대로 퍼트려 놓은 게 있으니까 그 위에 몇 개가 덧붙여진다 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근데 연극은 뭐야!?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나를 가지고 연극을 해?!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실제로 시제품의 인기가 괜찮다 하더군요. 안 그래도 예술 교단의 물품이 인기가 있는데 그 곳에…”
루카의 말을 듣다가 벌떡 일어난 나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교수실에서 빠져 나왔다.
뒷골목.
뒷골목으로 가야 해!
거기에서 이 소문이 사실인지를 확인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