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4
분체로부터 방학 동안의 기억을 전해 받은 리나는 의자에 기댄 채 헤벌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분체 안에 담겨 있는 기억은 그야말로 극상의 행복으로 가득했다.
해맑은 웃음을 짓는 루시.
거친 훈련을 끝마치고 땀범벅이 된 루시.
울상을 지은 채 무릎을 끌어 모으고 있는 루시.
역겹단 감정을 온 몸으로 드러내는 루시.
오열하는 루시.
너무 울어서 얼굴이 살짝 부은 루시.
예술 교단의 사도에게 얼굴을 맡겨 한층 더 아름다워진 루시.
여신을 믿는 자들이 경배를 보낼 정도로 신성한 모습을 지니고 있던 루시.
숲의 주인에게서 위엄을 빼앗아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루시의 모습들은 리나에게서 분체 대신 자신이 직접 그녀의 옆에 있고 싶다는 욕심을 내게 만들 정도였다.
“루시가 본녀를 인형마냥 안아주다니!”
분체가 끝없는 부끄러움과 함께 행복을 느끼던 기억을 몇 번이나 살피던 리나는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휘젓다가 책상 위에 얼굴을 박았다.
분체의 성격은 리나의 성격이니만큼 그녀도 루시 알른에게 붙잡히는 것을 마냥 기뻐하진 않는다.
자신이 먼저 달라붙어서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용납해도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부끄러우니까.
숲의 주인이 지닌 길고 긴 생에서 단언컨대 가장 아름답고 귀여운 극상의 미가 자신을 쓰다듬는다니! 그걸 어찌 견디겠는가!
당장 분체의 기억을 읽는 이 순간에도 리나의 양 볼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분체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이 정도인데 내가 직접 루시에게 안긴다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진짜 너무 행복하고 부끄러워서 죽어버리는 거 아닐까.
“…역시 직접 가고 싶구나.”
슬며시 시선을 들어 방 한 쪽에 걸린 루시의 바니걸 그림을 지켜보던 리나는 이 지루한 숲에서 빠져나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숲의 주인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의 위엄을 증빙하지만 정작 숲의 주인이 숲에서 하는 일은 별 것이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어디까지나 숲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
숲의 생태계에 끼어드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숲의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멍하니 시간이 흐르는 걸 지켜보는 것뿐이다.
당장 리나가 다른 이들의 반발을 무릅쓰고서 가장 먼저 아카데미와 계약을 맺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러다가는 정말 심심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기에 그들과 거래를 했고 그 덕에 많은 즐거움을 얻었지.
허나 생물의 욕심이라는 것은 하나가 이루어진다고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지기만 하는 것인지라.
서서히 숲의 주인이 지켜야 할 선을 넘나들고 있던 리나는 어느 샌가 루시의 옆에 있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리나!”
집 바깥에서 들려온 늑대의 울음소리를 닮은 목소리에 리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저 개자식은 왜 여기 온 거야? 한창 기분이 들뜨는 중이었는데 짜증나게.
책상 위에서 투덜투덜거리던 리나였지만 그렇다 한들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할 순 없었다.
지금 바깥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는 존재는 숲을 지키는 영물 중에서도 상당한 힘을 지닌 이였으니까.
“안 들리는가?!”
“그만 불러도 괜찮습니다. 뮤러.”
뮤러.
북부의 숲을 지키는 늑대이자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닌 짐승.
개과답게 숲을 지킨다는 의무에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자.
“뭔가 일을 하고 있었나? 숲에 들어올 때부터 연락을 전했다만 듣질 않더군.”
“죄송합니다. 좀 집중할 일이 있어서요.”
“방해였나?”
“아뇨.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같은 숲의 주인이라면 무리로 인식하는 뮤러는 리나의 대답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뮤러?”
“아. 최근 여러 숲에서 심상찮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말이야. 한 번씩 둘러보고 있는 중이라네.”
심상치 않은 일이라 이야기하는 뮤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축 늘어진 늑대 귀를 본 리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했다. 평소 늑대다운 고고함을 자랑하는 그가 슬픔을 드러내는 경우는 딱 하나 뿐이니까.
“누군가 죽었습니까?”
“그래. 메비다 숲과 더모굴 숲을 지키던 이들이 자연의 곁으로 떠나갔다네.”
메비다와 더모굴의 이름을 들은 리나는 기억 속에서 그 둘을 지키던 숲의 주인에 대해 떠올렸다.
어느 쪽이건 아직 지성을 얻은 지 채 오십 년도 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네.
약한 곳을 노렸구나.
“어느 쪽의 소행이죠?”
“흑마법이 지닌 불길한 기운과 악신의 기운이 뒤섞여 있네. 둘이 힘을 합친 거겠지.”
흑마법과 악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리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을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다만 리나의 뇌리에 떠오른 그녀의 모습은 이전처럼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굳건하고도 믿음직스럽다는 느낌 또한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되새기던 리나는 어째선지 이번 재앙이 길게 이어지지 않으리란 확신을 지니게 됐다.
“자네 정도 되는 이가 쉬이 무너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조심하게. 최근 들어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동료끼리 이 정도야.”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듯 뮤러는 건강한 모습을 보았으니 이만 가보겠다고 말을 하다 갑자기 발을 멈췄다.
“리나. 자네 예전부터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었지?”
“네. 그랬죠.”
“이런 건 어떤가.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예술 교단에 소속된 자들을 만나 받은 것이다만.”
뮤러가 품 안에서 꺼낸 것은 겉으로 보기엔 수수해 보이는 팬던트였다.
세공한 자의 실력이 좋은 듯 기품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딱 그 정도.
리나가 지닌 엄격한 기준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 번 팬던트를 열어보게. 그 안에 가장 공을 들였다 했으니.”
팬던트를 이리 저리 둘러보던 리나는 뮤러의 말을 듣고 팬던트를 열었다.
그리고 그 곳에 그려진 그림을 본 순간 리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팬던트 안에 그려진 기도하는 여자아이의 그림은 분명 리나가 가장 아끼는 여자아인 루시 알른의 것이었으니까.
리나의 경악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것일까. 뮤러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며 들고 오길 잘했다고 혼잣말을 했다.
“자네가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어. 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의 눈길마저도 사로잡는 것이었으니 자네가 싫어할 리 없.”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훌쩍 뮤러의 앞으로 다가온 리나는 무서울 정도로 올곧은 시선으로 뮤러를 바라봤다.
“더 없어요?”
“으. 음?”
“더 없냐고요. 루시가 그려진 것들.”
“그림 속의 인물이 지닌 이름이 루시라고 하는.”
“대답이나 해요. 뮤러님. 더 없어요?”
“…어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은 다른 이들에게.”
“모두 다 내놔요. 당장.”
뮤러는 리나의 협박에 저항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지키는 숲에 머무는 숲의 주인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닌 늑대는 연기를 다루는 여우에게 모든 걸 털린 후 개털이 되어 숲을 떠났다.
*
불길한 상상은 잘 맞아떨어진다고 하던가. 루카가 나에게 전해주었던 이야기는 사실로 드러났다.
예술 교단은 내가 떠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나와 관계된 물건들을 만들어 대륙에 퍼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날림으로 물건을 파는 놈들처럼 들리지만 예술 교단의 미치광이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어길 놈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며칠 만에 자신들이 이전에 만들어서 퍼트리던 여러 장신구와 비견되거나 그보다 더한 물건들을 제작해냈고 심지어 그걸 시제품이라고 부르며 여러 개선점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본래부터 여러 예술퓸으로 유명했던 예술교단이 이렇게나 매달리는 일이니 대륙의 호사가들이 여기에 관심을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만.
안 그래도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 이 장신구에 또 다른 관심을 더할 사건이 생겨났다.
바로 나와 관계된 장신구를 착용하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문의 시작은 한 상인이었다.
우연찮게 장신구를 구해 착용하고 있던 그가 상행 중의 일어난 사고에서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 상인은 자신이 지닌 장신구가 자신을 지켜주는 것처럼 느껴졌다며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예술 교단의 장신구를 권했다.
이러한 행운은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길가다 돈을 줍는 사소한 일에서 시작해서 큰 돈벌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행운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덕분에 예술 교단의 장신구는 현재 없어서 팔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게 내가 뒷골목에서 알아낸 정보였다.
“스승님께서 자기한테도 하나 보내달라는 말을 남겨두셨습니다.”
“…곧 할망구가 될 사람이 주책이 심하다고 전해.”
자칼의 얼굴을 곤란하게 만든 후 뒷골목에서 빠져나온 나는 부디 예술 교단의 유행이 아카데미까지 미치지 않기를 기원했다.
허나 내 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에 들어온 신입생들 중에서 예술 교단의 장신구를 지닌 이들이 심심찮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영애. 이런 게 있었으면 미리 알려주시지 그러셨어요. 뒤늦게 이야기를 전해듣는 바람에 구하는 데 고생했다고요.”
조이가 어렵게 구했다면서 팬던트를 보여줬을 때에는 진짜 정신이 혼미해지더라. 맘 같아서는 뺏어서 어딘가에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였어.
물리적으로 뺐었더니 울상을 짓길래 차마 던지지 못하고 되돌려주고 말았지만.
“치사해. 나도 팬던트 가지고 싶어.”
“이번엔 저도 켄트 영애에게 동의합니다. 조이. 치사하다고 생각해요. 친구인 저희들 것까지 구해주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해드렸죠! 근데 지금 상황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요!”
프레이와 페이비가 편을 먹고 조이를 힐난하는 광경을 체념한 채로 보고 있던 나는 변태 사도한테 연락해서 내놓으라고 할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조이 하나만 해도 정신이 어지러운데 다른 둘까지 저걸 들고 있으면 진짜 수치사해 버릴 것 같아. 알아서 구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차마 건네주진 못하겠어.
<루시. 오른쪽으로 슬쩍 고갤 돌려봐라.>
‘왜요. 뭐 있어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슬며시 고갤 돌린 나는 저 멀리에서 내 눈치를 힐끗힐끗 보고 있는 이를 발견하고 고갤 갸웃했다.
비시 쟤 왜 혼자 저러고 있는 거야?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아드리는 어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