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7
1왕비 파벌에 속한 몬셀 가문의 차남이자 기사로서 나름의 성과를 입증해 온 이.
가보라는 몸을 푸는 루시 알른과 프레이 켄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본래 기사의 신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던 그가 이 곳에 오게 된 까닭이 저 곳에 있었기에 관심은 가져야만 했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아카데미 종강 파티가 끝나고 나서 만들어진 1왕비 세력들의 모임에서 1왕비는 직접 나타나 알른 가문을 끌어들이고 싶노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 내용자체는 별 놀랄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알른 가문이 제국과의 전쟁을 거치며 한층 더 날아오른 지금 알른 가문을 끌어들이고 싶단 의견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던 게 이상한 일이었다. 베네딕 알른이라는 거물이 그들을 지지한다 이야기하는 순간 2왕비 세력이 지닌 만일의 가능성조차 사라질 터인데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1왕비의 말에 신이 난 그들은 베네딕 알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이런저런 방법들을 이야기했다.
허나 1왕비는 그들의 대화를 머뜩찮게 바라보다가 슬며시 한숨을 내뱉었다.
‘여러분들. 제가 이야기하는 건 베네딕 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무수한 영광을 뒤로 한 채 변경백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물러난 그 분을 어찌 설득하겠습니까.’
1왕비의 이야기에 그녀의 파벌은 당혹을 표시했다.
베네딕 알른을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니라고? 그럼 방계에 속한 인물인가?
지금 알른 가문의 방계 중에서 쓸만한 인물이 있었나?
포셀 경을 제외한다면 모두 어딘가에 하자를 지닌 이들일 텐데?
파벌의 혼란을 지켜보던 왕비는 슬쩍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의도를 밝혔다.
‘제가 말하고자 했던 건 알른 가문의 영애에 대한 이야기였답니다. 모두들 알고 계실 거라 믿어요.’
1왕비의 말대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루시 알른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었다.
과거에는 특유의 패악질로. 지금은 파트란 왕국 최고의 재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루시 알른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러한 소식조차 귀에 담지 않는 무능아는 애초에 이 자리에 설 수 없을 지어니 그 자리에 선 이들은 루시 알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베네딕 알른이 지닌 딸사랑에 대해서도 말이다.
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던질 것이 베네딕 알른이니 그녀가 한 파벌에 들어온다면 자연스레 아비도 따라 붙겠지.
여태는 위험성이 더 크다 판단해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만 왕비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1왕비 파벌은 왕비의 생각을 짐작하면서도 그녀가 말을 잇는 것을 기다렸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죠. 알른 가문의 영애를 끌어들이려면 본인보다 그 주변을 건드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날 회의가 끝난 후 1왕비 세력에서 많은 이들이 아카데미의 교수로 차출되었다.
불만을 품은 이는 없었다.
1왕비를 따르는 자들은 그녀가 무능한 왕을 대신하여 왕국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어줄 것을 믿었으니까.
가보라 몬셀도 1왕비를 열성적으로 따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과거 1왕비와 함께 전선에 서 보았던 그는 지금도 고귀한 핏줄을 타고 났음에도 전선의 맨 앞에서 날뛰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했다.
기억하기에 루시 알른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그녀의 판단을 믿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1왕비가 이야기해주지 않은 다른 것은 크게 신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루시 알른이 지닌 재능이 현 대륙에서 제일 갈 정도라는 소문 같은 것 말이다.
아무리 알른 가문의 핏줄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겨우 1년 사이에 아무것도 못하는 망나니가 대륙 제일의 재능이 되는 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기가 쉬운 법이니만큼 루시 알른의 재능이 뛰어날 지라도 소문만큼은 아닐 것이라는 게 가보라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의 교수로 차출된 이들 중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 왕국에 퍼져 있는 소문을 모두 믿기에는 과거 루시 알른에 대해 알려져있던 사실이 너무도 파멸적이었던 것이다.
계단으로 한 층을 올라가기 힘들어하는 저질스러운 체력이라던가.
검을 휘두르다가 그 무게를 못 견디고 나자빠져서 울었던 일이라거나.
성질을 내다가 지쳐서 혼절했던 일이라던가.
이러한 과거들이 공공연연하게 퍼져 있는데 루시 알른의 강함을 어찌 쉬이 납득할까.
의심을 품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가보라는 프레이 켄트라는 압도적 재능 앞에서 루시 알른이 무엇을 보여줄지에 대해 큰 흥미를 지니고 있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바보 검사. 눈빛으로 공격해도 가소로울 뿐이거든?”
“또 내가 먼저 가야 해?”
“흐응♡ 달려들기 무서운 거구나♡ 여태까지 하도 얻어맞아서 예의가 새겨진 모양이네♡”
“…치이!”
가보라는 프레이의 검 위에 새겨지는 오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평범한 오러가 아닌 색을 지닌 오러! 이제 막 2학년이 된 학생이 저를 자유자재로 다룬단 말인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 치부했을 허무맹랑한 모습에 경악하는 것도 잠시. 가보라는 한치 망설임없이 내달리는 프레이를 보고서 당혹을 느꼈다.
아무리 루시 알른의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저것은 같은 나이대의 학생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직에서 일하는 이들조차도 진심을 담아야 할 공격에 어찌 아카데미 학생이 대응한단 말인가!
사고가 일어날 것을 확신한 가보라는 다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려 했지만 선임 교수인 안톤이 그를 막았다.
정신이 나간 건가?! 저 공격에 개입하긴커녕 끼어드는 걸 막는다고!?
안톤 교수 탓에 때를 놓쳐버린 가보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둘의 격돌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프레이가 한층 더 속도를 더한다.
노리는 것은 상대의 목을 노리는 최속의 일검.
철조차도 나뭇잎처럼 갈라버릴 날카로움 앞에선 루시 알른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했다.
오러를 휘감은 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학생의 것보다는 노련한 기사의 것에 가까웠다.
어떻게 아직 어리디 어린 여자아이가 저런 눈을 할 수 있는 거지?
루시 알른의 눈에 가보라가 감탄하던 그 때 루시가 순백의 방패를 치켜들었다.
얇은 팔다리를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루시를 걱정하던 가보라조차도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잡게 될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하구나.
그렇지만 어딘가 어색해.
배우가 무슨 동작을 잊어버린 것처럼.
채애앵!
무의식 중에 루시의 움직임을 평가하던 가보라가 정신을 차린 건 루시 알른의 방패와 프레이의 검이 부딪힌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또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도. 가보라가 예상하던 일은 펼쳐지지 않았다.
루시 알른이 당연하다는 듯 프레이의 검을 막아내 보인 것이다.
“…어떻게.”
오러를 휘감고 있는 프레이의 검은 루시의 방패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튕겨 나왔다.
“항상 이랬다네.”
가보라의 당혹에 안톤이 대답한다.
“항상…이라함은.”
“알른 영애와 켄트 영애간의 대련에서 검이 방패를 뚫은 적은 거의 없단 이야기일세.”
안톤의 이야기를 들은 가보라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방에서 슬며시 눈을 떼고 학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이해했다.
안톤의 말이 옳다는 것은 말이다.
아카데미의 신입생들은 둘의 대련을 보며 경악하고 있는 반면에 아카데미 재학생들은 두 사람의 대련을 공부하듯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련이 일상적이라고? 기사단 사이의 대련에서도 쉬이 보기 어려울 이 거센 대련이?
“루시. 재미없게 또 이거야? 제대로 해주면 안 돼?”
“푸하핳♡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허세는♡ 허~접♡ 말할 시간에 팔이나 휘적거리지 그래?♡”
치열한 대련의 와중에도 여유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보라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다들 착각을 하고 있었군.
루시 알른은 고평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평가 되어 있었다.
알른 가문의 핏줄을 타고 났으며 베네딕 알른이라는 괴물의 자식으로 태어난 저 아이는 진정 왕국을 이끌 영웅 중 한 사람이다!
하. 저런 인재를 단순히 베네딕 알른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 취급하던 자신이 원망스럽군.
그 의견에 동조하던 다른 이들 또한 한심하기 그지없어.
1왕비께서 괜히 저 아이에게 큰 관심을 들였겠는가.
스스로의 멍청함을 한탄하던 그는 프레이 켄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안톤 교수님. 저 공격도 일상적인 겁니까?”
“…어. 어?”
가보라의 물음에 안톤이 당혹어린 목소리를 낸 그 순간 프레이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겠어. 휘적거려볼게.”
루시 알른은 한층 더 진해지는 오러를 보자마자 자신의 방패 위에 신성을 담았다.
순백의 방패 위에 신성마법이 펼쳐진 순간 오러를 담은 프레이의 검이 내질러진다.
주변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따위 신경쓰지 않는 위압적인 공격이자 그 여파만으로 누군가가 다칠 수 있을지 모를 광인의 일격.
자칫 잘못하는 순간 참고를 위한 수업이 참상의 현장이 될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공격의 여파가 타인을 위협할 일은 없었다.
루시 알른이 펼친 신성마법이 프레이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냈기에.
“이제 제대로 해주는 구나? 재미있나보네?”
자신이 저지른 일 따위 신경쓰지 않고 웃음짓던 프레이였지만 그녀의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야♡ 허~접 검사♡”
공격의 여파가 사라짐에 따라 루시 알른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물을 연상케하는 사나운 눈과 짐승을 연상케하는 사나운 눈빛.
“그래♡ 네 말대로 참 재밌었어♡ 허접 검사가 멍청한 건 알고 있었지만 금붕어 닭 이하일 줄은 몰랐거든~♡”
가벼운 어투와 어지간한 이는 숨을 쉬기도 어렵게 만드는 위압감.
“그러니까 나도 재밌게 해줄게♡ 허접 검사가 재밌는 소리를 낼때까지 말야♡”
그 곳에 전투의 와중에도 자신의 미를 증명하던 아이는 존재치 않았다.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하는 루시 알른은 과거 전장을 공포로 물들이던 알른 가문의 기사를 연상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