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8
오랜만에 열이 올라서 다소 진심을 담아 메이스를 휘둘렀던 나였지만 프레이는 한 번 박살이 나고 나서도 오히려 좋다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진심을 담아서 대련한다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냥.
자신의 신남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난 결국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안 그러면 진짜 메이스로 뚝배기를 깨는 수밖에 없는데 친구의 머리를 여러 조각으로 만들 순 없잖아?
“말도 안 듣고♡ 실력은 허접하고♡ 귀엽지도 않은 애완동물이라니♡ 이런 거 나 필요 없는데♡”
“…응?”
“뇌도 허~접해서 이해를 못하는 거야?♡ 짜증나니까 사라지라는 거잖아♡”
“…루시? 화났어?”
“화라니?♡ 전혀~♡ 내가 왜 너 따위한테 화를 내야 해?♡ 이제 보지도 않을 건데 말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대련은커녕 같이 다녀주지도 않겠다는 내 협박에 프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교수와 다른 학생들에게 프레이가 사과를 전하도록 만들자 모두의 시선이 아연해졌다. 다들 프레이가 이런 식으로 사과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러면 되는 거지?”
미안함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 프레이는 사과를 끝마치자마자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난 그 이상 무어라 하는 대신 프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렇게라도 사회화가 되는 게 어디냐. 게임 속의 미친년이랑 비교하면 엄청난 성장이잖아. 모니터 너머의 프레이는 루시와 다른 방향성을 지닌 미친년이었다고.
어라. 근데 뭔가 좀 이상하네. 왜 평소보다 손을 높이 들어야하는 느낌이지? 예전에는 조금만 들면 됐었는데 이제는 팔을 좀 더 위로 치켜 들어야하는 듯한.
“바보 검사. 너 혹시 키 컸어?”
“응? 응. 조금이지만.”
“…나 너 싫어.”
이 배신자!
나보다 좀 더 크긴 해도 나름 작은 편이어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자기 혼자 키가 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내 투정에 프레이가 쩔쩔매는 사소한 일이 지나간 후.
나는 계속해서 아카데미의 참관 수업을 돌아다녔고 그 때마다 교수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전투학 수업 때의 교수가 그러했듯 모두 내 수준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의 물음을 할배에몽으로 어찌저찌 넘기던 나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서 루카를 찾아갔다.
대체 언제까지 이 난리가 이어질지 확인하기 위해서.
아니. 던전학이라거나 전투, 신성처럼 내 특기와 관련된 질문은 괜찮아. 이 쪽은 그 어떤 질문이 나와도 대답할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역사학처럼 학문의 성향이 짙은 곳에서 나한테 질문을 쏟아내는 건 곤란해!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대학원생한테나 할 질문을 나한테 던지지 말란 말야!
나 같은 빡대가리가 그런 걸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특히나 곤란했던 건 조이의 손에 이끌려서 들어간 마력학 수업이었어.
다른 건 할아버지의 지식으로 어찌저찌 해결할 수 있는 데 이건 진짜 아는 게 없어서.
‘화염 학파의 기초적인 이론입니다. 알른 영애. 알고 계시겠죠?’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한 그 태도에 진짜 할 말이 없어지더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성기사라고!
마법을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교수님. 굳이 그런 당연한 걸로 시간을 낭비하셔야 하나요? 저는 수업을 들으러 온 겁니다만.’
‘음. 그것도 그렇군요.’
내 옆에 있던 조이가 교수의 질문에 대신 대처해줘서 살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짜 곤란했을 거야.
최악의 경우 그냥 깽판을 쳐서라도 그 상황에서 탈출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여튼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반복될 걸 생각하니 진짜 끔찍하더라고.
나는 수업을 듣고 싶은 거지 앵무새마냥 할배가 해주는 이야기를 읊고 싶은 게 아니란 말야!
<그러게 내 이야기했던 대로 공부를 했어야지. 그랬다면 저들의 질문에 네가 대답하며…>
‘아아아. 안 들려요. 아무것도 안 들려요.’
할아버지의 조언을 사뿐히 무시하며 루카를 찾은 나는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그에게 전해 들었다.
“계속 그럴 겁니다. 지금 아카데미에 오신 분들은 모두 충성심이 깊으신 분들인지라. 영애의 대답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궁금해하며 앞으로 나설 테죠.”
누군가는 내 잠재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내가 받는 총애에 대한 질투로.
또 누군가는 순수히 나에 대한 궁금증으로.
내가 한계를 보일 때까지 내게 질문을 들이밀 것이라는 이야기에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수업을 듣더라도 내가 관심을 집중 받는 건 확정된 일이란 거잖아.
…아니지.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일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네.
내가 왜 굳이 수업에 들어가서 질문을 받아내야 해?
그냥 이론 수업을 다 안 들으면 되는 일 아닌가?
안 그래도 지능이 낮은데 그냥 포기해도 되잖아.
그래. 내가 자그마한 머리만큼 자그마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만 하면.
<루시. 정말 그걸로 괜찮겠느냐.>
‘…당연히 안 괜찮죠!’
지능이 낮은 게 신경 쓰여서 이번에는 수업을 집중해서 듣겠다고 생각했었단 말야!
그러면 자연스레 지능을 올릴 수 있을 테니까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고!
근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이이!
아니 진짜 억울하네?!
지금 내가 만만해!?
루시 알른이라는 망나니가 만만하냐고!
예전의 루시가 벌인 패악질이 얼마인데 겨우 1년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걸 다 잊어버린 거야!?
진짜 짜증나네! 한 번 엎어버려?! 교수가 학생 앞에 무릎 꿇는 광경 만들어 봐?!
<그러면 네 평판이 또 바닥을 칠 텐데.>
‘그치만!’
<말했잖냐. 상대가 명분을 안 준다고.>
할아버지의 말대로 1왕비 파벌에 속한 이들은 내게 관심을 비칠 뿐 중요한 일선을 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교수의 재량이 허용되는 선에서만 내게 질문을 던졌지.
아카데미에 새롭게 들어온 인원이 많아서 아예 폐급이 없진 않지만 걔네들도 내 눈치는 보더라.
심지어 내가 먼저 도발했던 그 던전학 교수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일 뿐 나에게 달려들진 않았어.
분명 파벌 사이에 무언가 경고가 내려진 거겠지.
이런 상황에서 먼저 패악질을 부리면 곤란해지는 건 오히려 내 쪽.
깽판을 쳐봐야 상대에게 시비 걸 명분을 만들어 줄 뿐이야.
으으으. 이래서 정치가 싫어.
이게 던전이었으면 그냥 적을 메이스로 조용하게 만들면 되는데.
<정 마음에 안 들면 상대가 일선을 넘게 하는 방법도 있다. 네가 잘하는 일이니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야.>
‘…아니. 할아버지. 그래도 제가 주신의 사도인데 무고한 사람을 건드리라는 건 좀.’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상대가 먼저 선을 넘었을 때 메스가키 스킬로 조진 적은 있어도 무고한 사람을 스킬로 조져버린 적은 없다고요!
…아예 없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대답하진 못하겠지만!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당장은 참는 수밖에.>
‘…진짜 방법 없어요?’
<어쩌겠느냐. 일단 네가 곤란해하면 내가 도움을 줄 테니 현상을 지켜 보자꾸나.>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진짜 답이 없구나.
아악. 진짜 짜증나아아아!
제에발 어떤 멍청한 놈이 나한테 명분을 주면 좋겠다.
그럼 내 짜증을 모두 다 담아서 그 자식을 조져버릴 거야!
*
최근 아서 솔라딘은 아카데미 교수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묘하단 걸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1왕비나 2왕비 파벌에 속한 이들은 분명하게 아서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그가 자꾸만 튀어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테지.
아서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도 불편했다.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왜 이리 나를 경계하는 것인지.
아무리 내 주변에 눈에 띄는 이들이 많다 한들 반쯤 사생아 취급을 받는 내가 왕권에 도전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아서는 투덜거리면서도 지금 자신의 상황이 특이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파트란 공작 영애의 절친.
주신 교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성녀와 친함.
이번에 1학년으로 재입학한 버로우 공자와 자주 대화를 나눔.
차기 검성이 유력하다 여겨지는 켄트 영애와 자주 대련을 함.
최근 자주 화두에 오르는 루시 알른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유일한 왕족이며 알른 가문에서 훈련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
개인의 능력 또한 부족함이 없음.
말 그대로 외가의 부족함과 나이의 어림을 제외하고는 모든 걸 갖추고 있는 아서는 마음만 먹으면 균형을 흐트러트릴 수 있는 위험인물이다.
이러한 현상을 잘 알고 있는 아서는 무해하게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허나 그의 초연한 체는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으니 그가 바라지 않음에도 주변의 환경은 계속해서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우야. 이대로 가다가는 네 의지와 상관 없이 휘말리게 될 것이야.’
언젠가 세실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아서는 그의 조언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이 딱 그렇지 않은가.
최근 이상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2왕자 세실을 떠올린 아서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다음 수업을 위한 장소로 발을 옮겼다.
어디 보자. 이번에 내가 듣고 평가해야 하는 건 궁중의 예절과 관계된 수업인가.
수업을 하는 교수는.
[발리안 클록]
담당교수의 이름을 본 순간 아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발리안 클록이라는 자는 아서와 악연만을 쌓은 인간이었으니까.
귀족의 지위에 집착하는 자.
천한 피를 타고났다며 아서를 멸시하던 자.
아서가 타인의 무시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 이 중 하나.
어렸을 적의 기억을 떠올린 아서는 잠시 발을 멈췄다가 긴 한숨과 함께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와서 루시 알른 그 녀석에게 못 하겠다는 말을 할 순 없다.
그랬다간 그 녀석의 비웃음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할 테니.
그럴 바에야 꼴 뵈기 싫은 인간의 수업을 잠시 듣고 말지.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뒷방으로 밀려난 녀석이니 성질도 많이 죽었을 터. 이전처럼 내게 대놓고 시비를 걸진 않겟지.
그리 생각을 하며 발을 움직이던 아서는 강의실 옆 복도에서 발리안 클록과 얼굴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3왕자님.”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클록 궁정백.”
“쉬고만 있기에 눈치가 보이던 찰나 지식을 전파하는 명예로운 일을 맡을 기회가 생겨 자청했습니다.”
궁중 귀족 특유의 가증스러운 웃음을 마주한 아서는 속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최근 들어 많은 일을 해내셨더군요. 먼 과거의 일이나마 왕자님을 가르쳤던 입장에서 참으로 기뻤습니다.”
겉으로 듣기엔 칭찬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아서는 그 속내가 검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은 일을 해냈다는 말과 동시에 과거의 일을 언급했다는 건 주제를 알고 적당히 찌그러져 있으라는 소리겠지.
이 녀석이 매번 하던 말이 그것이었으니.
“아직 부족할 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들이박고 싶다만 그래선 안 된다. 이 놈이 뒤로 밀려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아.
당장은 참아야 할 때다. 아서가 분노를 억누르며 고개를 숙이자 클록이 대견하다는 듯 그에 답했다.
“겸손의 미덕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시다니. 스승의 입장에서 참으로 기쁘군요.”
무시하자.
몰락한 후에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 노인 따위에게 감정을 소비하여 무엇이 남겠는가.
어차피 얼마 안 가 사라질 작자다. 무시해도 괜.
“조금만 나은 피를 지니셨다면 참 좋으셨을 텐데.”
비아냥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든 아서가 주먹에 힘을 더한 순간.
“푸하핳♡”
그 옆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서가 귓가에 박힐 정도로 들어왔던 선명한 웃음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