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0
루시 알른이 저지른 일은 아카데미 내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최근 수많은 활약 때문에 온갖 이들의 관심을 독점하던 그녀가 한 때 궁중의 유력자였던 교수의 머리를 잘근잘근 밟았다는 이 소식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으니까.
누군가는 그 망나니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느라고 기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바뀌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으냐며 아쉬움을 드러냈고.
또 다른 이는 지금의 루시 알른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 중에서 아서는 세 번째 부류에 속했다.
이는 그가 지금의 루시 알른이 이유 없이 타인에게 시비를 걸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루시 알른이 왜 나섰는지를 알기 때문이란 이유가 더 컸다.
아서는 루시 알른이 앞으로 나서던 순간을 기억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어머니마저 모욕하던 그 말에 분노해서 입술을 꾹 깨물었던 그 순간을 말이다.
이성을 잃고서 무작정 몸을 움직이려 하던 그 때 귓가에 스며들었던 목소리.
바닥을 타고서 전해지던 자그마한 발소리.
살짝 열이 오른 것이 절로 느껴지던 숨소리.
루시가 발리안을 청소부 취급하며 무시하던 그 때에 아서는 그녀가 정말로 발리안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눈치 챘다.
지난 겨울 방학 이후로 솔직해진 그녀의 표정에선 아서를 향한 걱정이 절로 묻어나왔으니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양 입술에 힘을 더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본래 아서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대부분 타인을 동정하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을 뿐 진실로 남을 위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으니까.
허나 기이하게도 루시의 시선은 달랐다.
그녀의 걱정 어린 눈은 너무나도 쉽게 아서의 감정을 뒤흔들었다.
루시 알른이 그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바로 발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아서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을 것이다.
루시가 고갤 돌리고 나서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아서는 문득 루시의 모습이 평소와 많이 달라졌음을 새삼 느꼈다.
시녀가 이 곳에 들어오고 나서 그녀를 꾸며주고 있기에 본래보다 예뻐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루시 알른이라는 인간은 자신의 외모에 크게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꾸밀 줄을 모르던 인간에게 타인의 손길이 닿으면 변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다만 여태까지 아서는 그 변화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괜히 지난 학기 말처럼 얼굴이 벌개졌다간 놀림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어떻게든 외면을 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오늘에 이르러 그녀의 변화를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그는 멍하니 루시의 외견을 관찰하고 말았다.
보석보다 빛나는 눈동자를.
티끌 하나 없이 하얀 피부를.
자그마한 입술을.
미와 예술을 담당하는 여신이 직접빚빗어냈다 이야기 듣는 그녀의 얼굴을.
그가 발리안을 모욕하는 말에 무심코 웃음을 터트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예 정신을 놓고 있었던 탓에 표정관리를 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아서는 지금도 그 순간을 후회했다.
그 때 그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면. 발리안과 루시의 갈등을 어디까지나 아서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내버려 두었다면. 발리안이 루시의 어머니를 욕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지난 방학 동안 아서는 루시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모난 말을 내뱉어야만 하는 루시를 평생토록 긍정해주었던 인물.
그녀가 죽고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루시가 엉엉 울다가 쓰러질 만큼 그리워하는 사람.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 따스했을 것이 분명한 이.
그랬기에 아서는 루시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녀가 발리안에게 달려드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자신을 위해 앞에 나선 여자아이가 사고를 치는 것을 방관했다.
‘3왕자님. 옆에 있으면서 안 말리고 뭐 하신 거에요!’
조이의 투덜거림에 아서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 루시가 저질러 버리고 만 일은 모두 다 그의 잘못이었으니까.
‘미안하군.’
‘…그런 식으로 사과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는데요.’
‘별 말 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번 일은 분명히 내 잘못이니까. 그러니 내가 해결을 하지.’
아카데미 내부의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그건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카데미의 처벌 또한 신경 쓸 필요 없다.
루시 알른이라는 인물이 아카데미에 공헌한 것이 얼마인데 아카데미에서 그녀를 강하게 처벌하겠는가.
심지어 이번 일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수도 없이 존재하는데다가 피해자인 발리안은 권력과 거리가 멀어진 퇴물이니 루시 알른에게 가해질 처벌은 기껏 해봐야 며칠간의 근신 정도겠지.
클록 가문과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알른 가문에게 시비를 걸 리 없으니까.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되래 클록 가문에서 사죄의 서신을 보내면서 발리안을 잘라내려 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베네딕 알른이라는 재앙의 분노를 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훤하니.
결국 현 상황에서 신경 써야 하는 건 한 세력뿐이다.
명목상으로나마 발리안을 품고 있었던 2왕비 세력 말이다.
“동생아. 네가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2왕자. 세실 솔라딘은 아서의 방문을 환영해 주었다.
지난 2학기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그는 이번 겨울 방학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과거의 폭력적인 성미 대부분을 덜어내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아서를 향해 진심으로 웃어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아서는 순순히 세실의 환영을 받아주었다.
“평소에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됐다. 과거에 내가 저질렀던 일이 있는데 그러는 게 당연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한 말은 됐고 일단 앉아라. 네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으니까.”
“그…렇습니까?”
“루시 알른이 이번에 저지른 일 때문에 찾아온 것 아니냐.”
세실이 피식 웃으며 내뱉은 말에 아서는 숨을 들이켰다가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세실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뻔하긴 했군. 이 시점에서 내가 형님을 찾아온다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아서가 스스로의 멍청함을 한탄하는 동안 세실은 다과를 준비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먼저 대답을 해주자면 괜히 찾아왔다고 해야겠구나. 우리 쪽은 루시 알른에게 무어라 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예? 허나.”
“우선 우리는 발리안 그 인간을 귀찮은 것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다음으로 루시 알른은 어머님께 수많은 빚을 쌓아 두었지. 이 상황에 우리가 루시 알른을 건드릴 성 싶으냐?”
…루시 알른이 2왕비에게 빚을 쌓아 두었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에 아서의 얼굴에 살짝 놀람이 비치자 세실이 가볍게 웃으며 반대편에 앉았다.
“그러니 차를 다 마시고 그냥 돌아가거라. 나중에 루시 알른에게 우리 쪽 사람이 사죄를 보낼 거란 말 좀 전해주고. 아. 참. 발리안을 더 이상 볼 일은 없을 테니 그런 줄 알아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냥 이야기를 끝마친 세실은 자신이 탄 차를 한 모금 마셔보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젠장. 또 실패했나. 이래서야 어머님께 칭찬 들을 일은 평생 없겠어.”
투덜거림을 입에 담는 그의 모습에서는 과거의 걱정도 격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아서는 너무도 놀라웠다. 그가 아는 세실이란 사람은 2왕비와 관계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목소리를 떨던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자기도 모르게 질문을 내뱉은 아서는 순간 실수했단 생각을 했지만 세실의 표정은 평온했다.
“자세한 건 말하기 어렵다만 나 또한 루시 알른에게 빚을 졌다고 설명해야겠구나. 그녀 덕분에 처음으로 어머님께 미안하단 소리를 들어봤거든.”
멍하니 찻잔을 바라보던 세실은 이내 대답을 많이 해줬으니 자기도 몇 개 물어봐야겠다며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동생아. 최근에 루시 알른과 관련해서 허무맹랑한 소문이 도는 것 아느냐.”
“그 녀석과 관계된 소문이 한 두 개가 아니라서 무슨 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글쎄. 테르샤 제국의 투기장에서 강자사냥의 라샤와 맞붙어서 승리했다지 않으냐!”
무언가 심각한 일인 줄 알았던 아서는 테르샤 제국의 이름이 나온 순간 눈동자를 끔뻑였다.
“대부분의 호사가들은 이를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여긴다. 베네딕 알른이 물리친 것이 와전되었다거나, 라샤가 봐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
“…어. 그게 정상이겠지요.”
“그래. 그게 정상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허나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루시 알른이 지닌 빛나는 재능이라면 혹시 모르는 일이다!”
눈을 반짝이는 세실의 모습에 아서는 지난 방학 때 알른 가문에 머무를 때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겨보았다.
…그 때 어느 미친 년 때문에 죽을 뻔 했다던 이야기가 설마.
“들어본 적 있느냐!? 있는 것이냐!?”
“단순히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고 1분 가량 버텼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하다! 하하! 소문이 사실이었군! 대체 요 방학 동안 루시 알른이란 괴물이 또 얼마나 강해진 것이냐!”
이러다 건드려볼 수도 없게 되겠단 세실의 호탕한 목소리를 듣던 아서는 그가 타 준 차를 마시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잎을 쓰신 겁니까.”
“프몬 영지에서 딴 것이다.”
“그거 찻 잎 중에서 최고로 치는 물건 아닙니까?”
“그렇다만?”
“근데 이런 맛이 난다고요?!”
아서의 경악에 세실이 눈동자를 피했다.
“…그냥 제가 다시 타오겠습니다.”
“음. 그래다오.”
아서가 다시 탄 차의 맛과 향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
놀랍게도 내가 교수를 후려팬 일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못했다.
아카데미의 처벌도 없고.
2왕비 쪽에선 정말 죄송하다고. 발리안을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며 되래 나한테 보상을 줬고.
심지어 평판 같은 경우에도 날 원래 싫어하던 애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고, 날 괜찮게 보던 이들은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겠거니 하고 넘겨버리니.
이번 일이 내게 남긴 것은 교수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조심스러워졌다는 결과 뿐이었다.
…아니. 한 가지 더 있긴 하네.
얼빵이의 잔소리.
“영애. 친구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얼빵아. 그 이야기 지금 수십 번도 넘게 들었거든? 취한 것도 아니면서 왜 한 말을 또 하는 거야.”
“제발 경각심을 가지란 거에요! 경! 각! 심!”
자신이 소문을 통제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조이의 외침에 난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렇다고 패드립을 치는 데 내버려 둘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난 개자식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렸을 뿐이라고.
“조이. 잠시만요.”
페이비의 온화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드디어 조이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단 희망을 품었다.
“설교에 감정을 담아선 안 됩니다. 설교란 질책이 아닌 올바름을 알려주는 일이니까요.”
허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페이비는 조이마저 기겁을 할 정도로 끔찍하게 긴 잔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조이와 페이비 두 사람에게서 몇 시간 동안 붙잡혀서 잔소리를 듣고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는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고서 그 시기가 다가 왔음을 눈치 챘다.
아카데미의 던전이 열리는 시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