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2호는 램프의 남자와 맺은 계약에 따라 중국으로 향했다.
그녀는 낯선 땅에 발을 디디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국적인 향기와 소음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교단’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은 후배 2호는 창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풍경에 눈을 빼앗겼다.
논밭을 가로지르는 강, 그 위로 아련히 떠오르는 안개,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맥까지.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다.
“그나저나 중국에도 황금 사신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그녀는 혼잣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즘 황금 사신들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다.
중국의 자유 도시 연합이 미니 사신 특구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밖의 지역에도 이렇게나 미니 사신들이 많을 줄은 몰랐다.
원체 중국 내부의 이야기는 잘 흘러나오지 않는 데다가, 오브젝트 관리에 소홀한 연구자를 사형시킬 정도로 엄격해서 미니 사신에게 적대적일 줄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미니 사신들에게 적대적이긴커녕 친화적인 편으로 보였다.
열차의 통로와 좌석 사이사이에서 황금 사신들과 즐겁게 노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열차의 벽면에는 미니 사신들이 돌아다닐 수 있는 통로까지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런 건 세희 연구소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미니 사신 전용 통로를 뚜방뚜방 돌아다니던 황금 사신과 눈이 마주치자, 황금 사신은 후배 2호에게 히히 웃으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안녕?”
후배 2호도 살짝 미소 지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후배 2호의 애착 사신인 황금 뿔 사신도 폴짝폴짝 뛰며 통로 위의 황금 사신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그러자 황금 사신이 통로 위에서 뛰어내리더니, 황금 뿔 사신과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뿔 신기해!’
황금 사신은 뿔이 신기한지, 말랑말랑한 뿔을 콕콕 찔러보는 중이었다.
잠시 황금 사신들을 바라보던 후배 2호는 가방에서 양피지로 된 계약서를 꺼내 펼쳤다.
오브젝트의 힘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오직 그녀만이 볼 수 있는 신비로운 계약서.
그녀는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교단’에 가서 성녀의 두 가지 소원을 ‘만족스럽게’ 들어줄 것.>
‘만족스럽게’라는 모호한 단어가 그녀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소원을 들어줬어도 ‘만족’하지 못했다고 하면 계약 이행으로 취급되지 않는 난감한 조건.
게다가 계약서의 다른 조항들도 ‘회색 사신’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는 둥, 까다로운 조건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배를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선배가 남긴 쪽지도 받아들이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선배….”
후배 2호는 탐정 선배가 준 봉투를 꺼내 들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봉투 속에서 쪽지를 꺼내 펼치자, 그 안에는 몇 가지 조언이 적혀 있었다.
<계약을 제시하면 처음에는 램프를 건네줄 가능성이 높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소원을 이뤄주는 램프를 받지 말 것.>
<절대로, 절대로 받지 말 것. 계약은 이길 확률이 낮은 도박이지만, 램프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일방적인 계약.>
<….>
그 밖에도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조언들이 적혀 있었지만, 쪽지 하단에 커다란 글씨로 쓴 충고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나아갈 것.>
“하아….”
후배 2호는 다시 한숨을 쉬며 쪽지를 접어 봉투 속에 넣었다.
가장 중요해 보이는 충고가 오히려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하라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
램프의 남자가 조항을 추가할 때마다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는데, 때렸어야 했던 걸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드넓은 평야와 그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는 새들, 그리고 점점 태양을 집어삼키는 산맥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말 이 계약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
그녀의 어깨 위로 황금 뿔 사신이 살며시 올라와 머리를 비볐다.
말랑한 황금 뿔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감촉에 후배 2호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후배 2호는 애착 사신에게 속삭였다.
황금 뿔 사신은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히히 웃었다.
열차는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붉게 물든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녀는 황금 뿔 사신과 함께,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황금 뿔 사신과 함께라면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세희 연구소 깊숙한 곳, 회색 사신 격리실.
나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기대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미니 사신들의 눈부신 활약상이 연이어 비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특급 오브젝트’들을 처리하는 미니 사신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하늘을 갈라버리는 황금 사신 제1 검.
그림자 속에서 상대를 난도질하는 보라 사신.
그리고 황금빛 혜성처럼 적을 꿰뚫는 황금 망토 사신까지.
‘사람들이 미니 사신의 활약을 좋아해서 그런지, 자주 나오네.’
나는 요즘 TV에 자주 비치는 미니 사신들을 바라보며, 의지를 흘렸다.
뉴스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정말 자동 사냥이 코앞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히히.
텔레비전에서는 미니 사신들을 ‘대한민국 출신의 오브젝트’라고 소개하며, 마치 한국인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앵커는 미니 사신의 활약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새콤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고개를 돌리자, 황금 사신 하나가 커다란 딸기를 내밀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엄마도 먹어!’
내가 황금 사신이 내민 딸기를 한입에 삼키자, 황금 사신은 행복한 것처럼 히히 웃었다.
이 딸기들은 예린이가 사서 격리실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것이었다.
“미니 사신들도 건강해지려면 과일을 좀 먹어야지!”
예린이는 그런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하며 이 딸기들을 잔뜩 들여놓았다.
과자에 비하면 그렇게 달지는 않을 텐데, 미니 사신들은 딸기를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다른 곳에 있던 미니 사신들까지 딸기를 먹으러 격리실로 몰려와, 방은 커다란 딸기를 안고 냠냠 먹는 미니 사신들로 가득 차버렸다.
미니 사신들은 자기 머리통만 한 딸기를 안고, 야금야금 베어 물었다.
옴뇸뇸.
사방에서 딸기를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야말로 딸기 축제였다.
아이들이 즐겁게 딸기를 먹는 가운데, 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딸기를 가져와서는 과육은 놔두고 꼭지만 뜯어먹는 황금 사신이었다.
‘그건 먹는 게 아니야.’
나는 그가 입에 물고 있는 풀 부분을 살짝 잡아당겨 봤지만.
‘앙대!’
황금 사신은 뺏기지 않겠다는 듯이 말랑한 이빨로 힘껏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들어 올리는 대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도 전혀 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미니 사신이 풀 좀 먹는다고 탈이 나지는 않을 테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렇게 풀을 오물오물 먹는 녀석을 바라보니, 오래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금 사신 소환이 가능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던 것 같은데….
‘맛있어?’
그때, 한 황금 사신이 풀 먹는 황금 사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 말을 믿고 따른 황금 사신들도 한 입 베어 물었지만,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맛없어!’
하지만 풀을 먹는 사신이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런지, 맛없는 걸 알면서도 속는 미니 사신들이 계속 나타났다.
‘으앙.’
‘맛없어!’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리고 ‘맛없는 걸 맛있는 척하면서 먹으면, 황금 사신들은 속는다.’라는 중요한 정보를 기억해 두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새로운 뉴스가 흘러나왔다.
[중국에서 유명한 테러리스트 단체가 소탕되었습니다.]
화면에는 온몸을 검은 천으로 칭칭 감싼 자들의 모습이 비쳤다.
격리 중인 오브젝트를 노리는 그들은 방해하는 자들을 전부 살해하기 때문에, 밝혀진 민간인 피해도 상당히 컸다.
신출귀몰한 테러리스트였지만, 끝내 본거지 추적에 성공한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섬멸했다는 소식이었다.
‘저거 설마 계양산 닌자 이야기인가?’
나는 뉴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SDVIMVFoanVzY1YwSVhjamMzUkt1U3pnY1pRaU5OZVlrWGsxQUxDREd6d1lUVGplaFNXdXo1eUVpM1NvdnFTWA
***
열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간 끝에, 후배 2호는 램프의 남자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였다.
‘이게… 뭐지?’
후배 2호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서진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괴물이 한입에 베어 문 듯,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어딘가에서 불에 탄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고,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여기서…. 저 건물에 사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그녀는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약서를 확인해 보면 램프의 남자가 알려준 장소는 분명 이곳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았다.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완전히 붕괴한 건물들, 뼈대만 남은 채 검게 그을린 잔해들.
그야말로 황폐한 풍경이었다.
황금 뿔 사신도 그녀의 어깨 위에서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어떡하지?’
후배 2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민에 빠졌다.
계약의 첫걸음부터 난관에 부딪혀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어떻게 성녀를 찾고,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생존자가 있기는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