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2
아카데미 던전이 개방되기 무섭게 안으로 뛰어든 아서는 던전 내부의 분위기를 살폈다.
일단 던전의 테마는 타 지역에 있는 일반적인 던전과 비슷하군.
그 어떤 때보다도 어려울 것이란 소문과는 다르게 평범해.
이런 생각은 그와 함께 안에 들어온 이들도 비슷한 듯 모두들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카데미 역사상 최악의 던전일거라더니. 저희가 작년에 봤던 거랑 크게 차이가 없네요.”
“단정 짓지 마라. 조이. 그러다 넘어질 거다.”
“방심 안 해요. 저희 상대는 이 던전이 아니라 알른 영애니까.”
얼마 전 루시 알른의 도발에 넘어가 내기를 수락해버린 일행은 그 뒤로 루시와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상했다.
방심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었다. 루시와 동행하며 그녀가 벌이는 기행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해야했던 것이 이들인데 어찌 방심을 하겠는가.
수적인 우위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고. 루시 알른에게 일방적인 제약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 차이는 루시 알른의 능력 앞에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를 알았기에 네 사람은 쉼없이 위를 향해 발을 움직였다.
일행이 던전을 올라가는 속도는 작년에 네 사람이 함께 던전을 공략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작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넷이서 아카데미 던전 백 층을 가기만 해도 기적이라는 생각을 품을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돌입하고서 채 세 시간이 지나기 전에 20층을 돌파한 것이다.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역시 아서의 지휘가 달라졌다는 점이리라.
작년의 아서는 던전을 공략하는 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전문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왕족이면서도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론 외에 다른 걸 배우기 어려웠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루시 알른이 건네주었던 던전 공략집을 읽고 또 읽어 몇 페이지 몇 번째 줄에 어떤 글자가 있었는지까지 대답할 수 있는 지경이 된 그는 노련한 용병과 비교를 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뛰어난 공략 실력을 자랑했다.
여기에 추진력을 더하는 것이 그의 옆에 있는 조이였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루시가 건네 준 저서를 완벽히 암기한 그녀는 아서와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저서에 담긴 내용을 던전 공략에 적용시켰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과 던전의 공략법을 연결시킨 것이다.
덕분에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던전의 길을 찾아낼 수 있으며 던전에 존재하는 여러 함정을 발견하고 해체할 수 있게 된 그녀는 진심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건 함께하고 싶어 할 능력자가 되었으니.
아서와 조이의 능력이 합쳐진 순간 던전을 진행하는 일은 무척이나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일행이 알른 기사단의 훈련을 겪으며 강행군에 익숙해진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에는 어느 정도 진행한 후 휴식을 취하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 일행은 세 시간 내내 달리듯 움직이고서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알른 기사단에서 받았던 훈련이 비교군이 되는 이상 이 정도는 강행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개개인의 기량이 훨씬 더 뛰어나졌다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10층과 20층에서 모습을 드러낸 보스가 채 1분을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나는데 그들의 기량에 어찌 토를 달겠는가.
이렇듯 쾌진격을 이어나가던 일행이 처음으로 발을 멈춘 것은 다섯 시간이 지나고 40층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가뿐히 40층의 보스를 물리치고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을 연 순간 31층의 정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무슨.”
그 광경을 본 아서가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자칼 버로우가 그에게 전해주었던 이야기였다.
‘3왕자님. 이번 던전은 알른 영애가 만들었던 던전에 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분명 단순히 무력만으로 돌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의 말이 옳았군. 아서는 헛웃음을 흘리며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이.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한 것 없나?”
“…다시 한 번 올라가면서 분석을 해봐야겠네요.”
“성녀님께선?”
“죄송합니다. 저도 알아차린 것이 없습니다.”
“으음. 곤란하게 됐네요.”
30층에서 40층 사이에 무언가 단서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허나 그 아래에 단서가 있다면 일이 귀찮아져.
쯧. 가만 서서 고민을 해봐야 답이 나오지는 않으니 일단은 움직여 볼까.
“왕자님. 나는? 안 물어봐?”
아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 때에 옆에서 프레이가 툭하고 튀어 나왔다. 아서는 괜시리 귀찮게 구는 그녀를 보고서 팩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볼 필요가 있나? 검을 휘두르느라 아무것도 신경 안 썼을 텐데.”
“치. 알겠어. 그럼 아무 말도 안 할래.”
“…무언가 발견한 거냐?”
“물어 볼 필요 없다며?”
“하아. 젠장. 미안하다. 약간 날이 서 있어서 거칠게 말을 했다. 부디 네가 찾아낸 걸 이야기해주겠나.”
빠르게 자존심을 접은 아서가 고개를 숙이자 프레이는 뭐라도 된 것 마냥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못 찾아냈어.”
“…프으레이 켄트으으으!”
“3왕자님. 조금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집중하고 있는데 소란스럽게 구시면 곤란해요.”
“이게 내 잘못이더냐! 프레이 켄트 이 녀석이 먼저 시비를!”
“아. 다시 살펴보니까 여기 이상한 게 하나 있네요. 어서 가죠.”
“조이 파트란! 네 녀석까지 날 무시하는 거냐아아!”
*
하루가 지나 아카데미 던전의 입구에 도착한 나는 다른 학생들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확인하면서 의문을 품었다.
내 친구들 왜 아직도 80층 즈음에서 멈춰 있는 거야? 아카데미 2학년 던전이라고 해봐야 쟤네들한테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텐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2왕자 파티 쪽도 60층 가량에서 멈춰있고 자칼 쪽도 50층을 못 넘고 있는 데다가 내가 아는 다른 유망주들도 중심부 즈음에 멈춰 있었다.
…진짜 아카데미 던전이 나 하나 때문에 달라진 건가. 내가 만들어낸 던전이 던전학 교수들에게 자극을 줘서 새로운 던전을 만들게 한 거야?
아카데미 내부에서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에린을 통해 소문을 전해 들었던 나는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웃음을 흘렸다.
만약 교수들이 게임과는 전혀 다른 던전을 만들어낸 거라면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여러 지식은 쓸모없는 게 되겠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스피드런을 할 순 없을 거야.
근데 그게 뭐가 문제지?
새로운 던전이 생겨난 거잖아.
내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던전이.
아카데미 교수들이 기를 쓰고 만들어낸 던전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거라고!
빠르게 던전의 공략을 끝마치고 다른 일을 하러 갈 생각이었던 나는 새로운 컨텐츠에 환희를 느끼며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나서 마주하게 된 것은 생각한 것과는 달리 평범한 던전의 풍경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을 듯한 장소 말이다.
던전 안에서 나오는 몬스터도 마찬가지였다.
1층에서 당연히 나올 법한 허접 몬스터를 마주하게 된 나는 메이스에 타격당한 녀석이 즉시 예의 발라 지는 걸 확인하고 고갤 갸웃했다.
이상하다. 내가 만든 던전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것치고는 너무 뭐가 없는데?
<루시야. 생각을 해보거라. 이 곳에 들어올 이들 중에선 신입생들도 있을 텐데 처음부터 어려우면 어쩌잔 거냐.>
‘…그것도 그렇네요.’
그렇다는 건 초반부에는 별 게 없다는 거려나.
빠른 속도로 던전을 진행하던 나는 할아버지의 말이 옳았음을 이해하게 됐다.
30층을 돌파할 때까지 재미난 무언가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아카데미 던전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규칙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던전은 내게 실망감밖에 안겨주지 못했다.
허나 31층으로 넘어와 그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조금씩 신이 나는 게 느껴졌다.
31층 내부에 일반적인 던전이라면 필요치 않을 것들이 너무도 많았거든.
아카데미의 던전은 교수들의 손에 의해 설계 되어 대학원생들을 갈아 넣음으로써 완성되는 물건이다.
당연하게도 이를 만들 때에 효율을 신경 쓸 수밖에 없지.
당장 내가 던전을 만들 때만 해도 그랬는 걸.
근데 이번 층계에는 굳이 의도하고 넣는 게 아니라면 불필요한 요소들이 너무 많이 보여.
그것도 의식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도록 슬며시 집어넣은 것들이 말야.
흐으응. 이 단서들을 기반으로 생각해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길이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콧노래를 부르며 단서를 따라 나아가니 가로 막힌 벽이 등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벽을 보고서 길을 잘못 찾았다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여길 잘 때리면 부서진다고 표시까지 되어 있는데 내가 왜 이를 놓치겠는가.
콰앙!
메이스로 가볍게 후려치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벽을 본 나는 동굴에 가까웠던 앞전의 던전과 전혀 다른 신전의 모습을 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이야. 이번에 신경 진짜 많이 쓰긴 했네.
내가 예전에 던전 만들 때 이런 식으로 가면 저희 죽는다고 대학원생들이 엉엉 울었었는데 말야.
안 그래도 아카데미가 인사 관련해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런 걸 만들려면 얼마나 굴러야 했을까.
이러니 자기들 사이에 악신의 추종자가 끼어들었는데 눈치를 못 채지.
불쌍한 놈들.
그나마 목숨은 안 잃고 어디에 감금되어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해보니까 걔네들 감금된 상태에서 무서워했을까 쉴 수 있어서 행복해했을까.
이건 좀 궁금하다.
나중에 던전 공략 끝나면 한 번 찾아가서 물어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층을 향해 걸음을 옮긴 나는 아카데미 교수들이 여기저기에 공을 들인 것을 보며 이번 한 주 동안은 계속해서 이 던전을 돌아다
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뒀을 줄이야.
이 정도면 공략하는 맛이 있겠다.
나중에 한 번 최적화를 해보자. 친구들이랑 같이 구르면 분명 굉장한 기록을 세울 수 있을 거야.
<루시야.>
통통 튀는 걸음으로 던전 안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할아버지가 헛웃음과 함께 나를 불렀다.
‘왜요?’
<너 이번 던전 공략이 내기라는 것을 잊고 있지 않으냐?>
‘…아. 맞다.’
생각해보니까 나중이 아니라 지금 스피드런을 해야했지 참.
새 던전에 너무 신나서 잠시 잊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