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4
아카데미 던전의 99층. 그 입구로 되돌아 온 나는 짜증이 나서 메이스로 벽을 후려쳤다.
분노가 잔뜩 실린 내 메이스에도 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자그마한 흠이 생겼다가 바로 사라지는 벽을 보고 짜증이 난 나는 미친 년마냥 벽을 두들겨 대다가 기운이 빠져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할아버지. 지금 몇 시에요?’
<네가 들어온 것이 아침 무렵의 이야기이니. 지금쯤이면 7시나 8시 정도 되었을 듯 하다만.>
‘그 중에 여기에 있던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음. 한 네 시간 정도?>
‘네 시간이나 여기서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던전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던전 99층에 존재하는 기믹 자체는 이미 파악을 한 지 오래다.
99층의 입구에는 총 네 갈래 길이 존재하고 모든 길의 끝에는 또 다른 던전이 존재하지.
그리고 100층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해선 네 던전에 존재하는 보스를 거의 한 번에 쓰러트려야 한다.
거의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어느 정도 오차 범위까지는 허용을 해주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노가다를 뛰면서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대략 1분 정도의 오차는 허락해 주는 것 같더라.
한 보스를 쓰러트리고 나서 1분이 지난 후 입구로 되돌아오는 걸 보면 그럴 거야.
이런 기믹은 레이드가 존재하는 RPG쪽 게임이라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종류다.
바꾸어 말하자면 싱글 게임에는 집어넣을 수 없는 기믹이지.
플레이어가 하나인데 멀찍이 떨어진 두 보스를 어떻게 한 번에 잡아.
실제로 소울 아카데미에는 이런 기믹이 존재하지 않았다.
파티원으로 쓸 수 있는 NPC가 있다 한들 그들이 알아서 던전의 보스를 사냥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게임의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이런 기믹이 나오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파티원 간의 협력만 잘 된다면 얼마든 공략이 가능하니까.
파티원 간의 협력이 불가능한 나는 공략할 수 없단 이야기고.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서 공략할 거라고 제약 걸지 말 거어어얼.’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팩 한숨을 내쉬고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래 전에 99층의 기믹을 파악한 나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온갖 시도를 거듭해 보았다.
아카데미 던전에 존재하는 이념은 누구라도 이 곳을 공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만큼 친구 없는 찐따에게도 무언가 방법을 제시했을 거라고 믿었지.
그렇지만 내 발버둥은 무의미했다.
가짓수를 하나하나 줄여갈 때마다 네 사람이 아니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뿐이었으니까.
아니. 진짜 이 던전을 만든 교수들이 독한 게 온갖 변수를 다 막아 뒀더라.
얼마 전에 던전의 보스를 도발해서 바깥으로 빼오려고 시도를 했거든?
근데 던전의 입구를 넘어오자마자 던전 보스가 죽어버리더라?
그 때는 진짜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왔어.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좆 같은 던전 공략 안 하고 만다고 투덜거리면서 때려치지 않았을까?
아. 물론 난 아냐.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소울 아카데미 같은 게임을 몇 년 동안 붙잡고 있을 리 없잖아.
수많은 실패 끝에 오기가 생겨버린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라도 이를 공략하고 말겠노라 결심했다.
– 알른 영애. 5 분 뒤 던전의 문이 닫힐 시간입니다.
아카데미 측의 알림 음성을 들은 나는 인벤토리에서 노트를 꺼내 방금 전에 알아온 정보를 끄적였다.
네 번째 길목의 보스가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입고 쓰러졌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여태까지 시도한 것을 기반으로 추정한 보스의 HP에 대해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고?
간단해.
어찌 되었든 간에 네 갈래의 보스를 한 번에 쓰러트리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한 보스가 서서히 죽어가건 일격에 뒤지건 아무런 상관이 없단 소리 아니냐고.
<루시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듯 하다만.>
‘그렇겠죠.’
나도 이게 정상적인 공략법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아래에서부터 다시금 단서를 끌어 모으면서 올라오면 혼자서 공략할 방법이 또 다시 생겨날지도 모르지.
근데 이젠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어.
오기가 붙어버린 이상 나는 어떻게든 나만의 방식으로 던전을 돌파하고 말 거야!
노트에 정리를 끝마친 나는 아카데미 던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뒷골목으로 내달렸다.
지금 당장 구해야 할 물건들이 몇 가지 있었다.
*
아카데미 던전의 입구가 닫히는 시간까지 공략을 거듭한 아서 일행은 루시가 도착해 있던 99층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곳을 공략할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안에 있던 여러 요소를 눈에 담고 돌아오는 것까지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열기가 서려있었다.
왜냐하면 루시 알른이 여전히 99층을 맴돌고 있었으니까.
여러 제약을 통해 앞서 나갔다가 루시 알른의 능력에 의해 추월당했다가 다시금 동점으로 돌아오게 된 지금.
아서 일행은 내일 아침 던전의 문이 열리자마자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단서는 루시 알른이 그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단 것이다.”
아서의 말에 조이와 페이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루시라는 사람은 던전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알고 있는 사람.
그런 그녀가 아카데미 던전의 기믹을 몰라서 그 곳에 붙잡혀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당장 혼자서 던전 안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99층에 도달한 것이 루시이지 않은가.
분명 루시가 99층에 붙잡히게 된 이유는 그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터.
“일단 가장 큰 가능성은 마법적 지식이 필요한 무언가가 있을 경우겠네요.”
“흠? 루시 알른은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 아니었나?”
아서가 의문을 표하자 조이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니더라고요.”
얼마 전 루시와 함께 마법학 수업을 들으러갔던 조이는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표정이 느슨하게 드러나게 된 루시의 얼굴에는 분명한 당혹이 서려있었으니까.
그녀는 마법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있지만 정작 마법에 대한 것은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화를 이야기해주었음에도 아서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한가요?”
“그치만 말이다. 루시 알른 그 녀석 1학년 때 마법 관련 시험에서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만.”
자신이 루시 알른의 바로 아래였기에 기억한다는 아서의 말에 조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데 어떻게 시험은 잘 치를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나중에 알른 영애님께 직접 여쭤보죠. 지금 저희가 이야기를 해도 의미가 없을 테니.”
두 사람의 의문을 일축한 페이비는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 이야기하고 나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혼자서는 공략할 수 없는 구조일 경우겠죠.”
“성녀님의 이견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 억지스러운 게 아니라면 그 녀석이 막힐 것 같지 않거든요.”
당장 아서가 보았던 던전 안의 구조도 페이비의 의견에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네 갈래로 갈라진 길과 그 끝에 존재하는 지하.
혼자서도 공략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지하를 지나치면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장치.
그 장치를 움직일 때마다 바뀌는 길.
아직은 몇 가지 시험을 해보지 않아서 쉬이 답을 내리기 어렵지만 아서는 높은 확률로 페이비의 말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근데 그러면 아카데미 던전의 이념에 맞지가 않아서요.”
아카데미의 던전은 학생 누구라도 공략할 수 있어야한다는 걸 목적으로 한다.
강함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신성을 쓸 수 없다고. 저주를 해제할 수 없다고 공략하지 못하는 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이라해서 그게 달라질 리는 없을 텐데.”
“아.”
아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 때에 옆에서 조이가 탄성을 냈다.
“뭔가 알아냈나. 조이?”
“던전 공략에 관한 건 아니고요. 던전학 교수님들의 생각을 알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지?”
“3왕자님. 생각해봐요. 소울 아카데미 던전의 끝을 혼자서 보고자하는 사람이 알른 영애말고 있을까요?”
“없지. 누가 그런 미친 생각을 하나.”
소울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것이 왕국의 엘리트들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소울 아카데미의 던전이 지닌 난이도 또한 그 엘리트들에게 맞춰져 있으니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난 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당장 아서 본인만 하더라도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오를 수 있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내젓는 것이 현실이니 루시 알른이라는 예외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아서는 조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이해했다.
“99층을 혼자서 넘어설 수 없는 건 교수들이 의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요. 지난번에 알른 영애가 멋진 던전을 보여줬으니. 이번에는 아카데미의 교수님들이 알른 영애를 위해 재밌는 걸 준비한 거에요.”
99층까지 홀로 올라올만한 사람은 루시 알른 하나 뿐.
그러니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루시 알른을 위한 무언가를 준비했고 루시 알른은 그걸 아직까지 알아차리지 못해 99층을 헤매고 있다.
“…루시 알른이라는 예외에 맞춰진 무언가인가.”
아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추측이 맞다면 아카데미 99층은 인원이 필요한 종류라는 전제를 깔아도 되겠군.”
“네. 그걸 기반으로 경우의 수를 줄이죠.”
이야기가 지루했던 듯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 프레이를 제외 한 세 사람이 열띤 토론을 나누는 동안.
아카데미 거리 뒷골목을 찾은 루시 알른은 알새틴의 부하에게 지금 당장 구해줘야 할 것들을 이야기했다.
“…무슨 테러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알새틴의 부하는 그 목록을 보고서 질린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