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6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하려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모니터 너머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도트데미지를 이용해 모두를 한 번에 죽이겠다니.
너무 고이고 고여 분탕조차 사라지고 만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일을 한다고 하면 미친 년, 아니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걸.
근데 난 언제나 미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어왔거든.
기행 한 두 개가 추가된다 한들 별 달라질 건 없어.
네 보스를 단번에 죽여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지금 내 공격의 데미지를 측정하는 일이었다.
내가 휘두르는 메이스가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입히는 지 확인해야 보스의 HP가 얼마나 되는 지 추측할 수 있으니까.
여기에 도움을 준 것은 아카데미 던전에 있는 여러 마물들이었다.
던전의 모습이 달라졌어도 그 안에 존재하는 몬스터까지 다 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난 그들을 후려치면서 내 공격력을 계산했지.
그런 후에 보스를 상대하며 그들의 HP를 역산하고. 뒷골목으로 향해서 독과 폭탄을 구해온 다음. 이론을 통해 계획을 세우고. 그를 실전으로 옮겼다.
게임 속과는 달리 수치를 눈으로 볼 수 없는 탓에 여러 시행착오가 존재했지만 이제는 아닐 것이다.
이젠 오차를 완벽하게 수정했으니 더 이상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보통 이렇게 자신만만할 때 크게 넘어지지 않으냐?>
‘제가 얼빵이인 줄 아세요? 저는 조이랑 다르거든요?’
할아버지에게 일갈을 날린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신성을 통해 육신을 강화했다.
여태까지 시간 낭비한 걸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이미 100층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높겠지.
내가 이 곳에 틀어박혀 있는 것 자체가 단서가 되어 주었을 테니 그 녀석들이 여기에서 가로막혔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그렇지만 아직 내가 패배한 건 아냐.
시간을 아무리 낭비한다한들 100층을 내가 먼저 클리어하기만 한다면 내가 승리하는 거잖아.
난 자신 있어.
지난 서른 번의 트라이 동안 루트의 최적화는 끝내두었다.
이론적으로 네 보스를 모두 제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삼십분.
삼십분 안에 다음 방으로 넘어가서 원트로 보스를 끝장내서 승리를 거두겠어!
날 억까한 교수들에게 엿을 먹이고 내 친구들에게 지난 날의 치욕을 되갚아 주겠다고!
준비를 끝마친 나는 즉시 첫 번째 길목을 향해서 걸음을 내딛었다.
인간의 육신을 아득히 뛰어넘은 나의 달리기는 허공을 날아간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빨랐다.
그렇기에 첫 번째 던전에 존재하는 마물들은 내 옷깃을 붙잡는 일조차 하지 못했지.
단 5분만에 첫 보스룸에 도착한 난 여덟 개의 팔을 지닌 거구의 움직임을 가만 살폈다.
그리고 놈이 맨 위의 두 팔을 치켜 든 순간 웃음과 함께 앞으로 내달렸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난 이미 널 지겹도록 상대해봤어.
네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훤하다는 거야.
그리고 지금 네가 선택한 첫 수는 내가 널 박살내기에 가장 편한 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두 팔을 회피.
그 후 앞으로 파고들어 이어지는 연격을 피하고 메이스로 정성스레 몸통을 두들겨준다.
감정을 담아선 안 된다. 냉정하게. 기계처럼. 정해진 위력으로만 상대를 후려패야만 한다.
돈까스를 만들기 직전 고기마냥 오목해진 보스를 확인한 나는 녀석의 입을 강제로 벌려 독약을 먹인 후 두 번째 보스에게로 향했다.
두 번째 보스를 제압하는 건 첫 보스를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웠다.
어차피 이 녀석은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이 없으니까.
골렘의 팔다리를 분쇄해버린 나는 그 녀석의 머리에 친절하게 폭탄을 설치해 주고서 다음 보스에게로 향했다.
세 번째 던전에 존재하는 사령은 전략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주신의 신성을 때려 박아 주면 즉시 빈사상태가 되는 것을 확인했거든.
신성에 타들어가며 비명을 지르는 사령 위에 신성영역을 설치한 난 즉시 다음 보스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완벽해.
여태까지 저질렀던 실수 중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아.
이제 필요한 건 마지막 보스를 죽이는 시간을 맞추는 일 뿐.
‘할아버지! 지금 몇 분 지났어요?!’
<첫 보스에게 독을 먹이고 십 분가량이 흘렀다. 네가 폭탄을 설치한 후로는 5분이 지났고.>
네 번째 보스를 향해 달려가며 물음을 던지자 할아버지가 즉시 대답을 해주었다.
‘시간 되면 말씀해 주세요!’
마지막 보스를 가지고 노는 일은 별 어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성기사니까 말야.
하고자 한다면 상대를 억지로 살려놓는 것도 가능하거든.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녀석의 머리를 깨부수는 것으로 보스를 빈사상태로 만든 나는 약하게 치유마법을 사용하며 보스의 명줄을 강제로 붙여뒀다.
<지금이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신호를 하자마자 녀석의 숨통을 끊었다.
방을 지키던 자가 사라지며 적막해진 곳 안에서 나는 주변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던전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문이 생겨나지 않았어.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하지만 아직 기뻐할 때는 아냐. 오차라는 건 언제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니까.
섣불리 기뻐하다가 좌절을 해 보았던 나는 무언가 변화가 생길 때까지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채 몇 초가 지났을 무렵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소리가 말이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즉시 던전에서 빠져 나와 네갈래 길목이 있던 장소로 향했다.
거기에는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다섯 번째 길목이 생겨나 있었다.
‘해냈다아아아아!’
얼핏 보기에 불가능한 일을 성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희열을 선사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 들려주더라도 말도 안 된다 이야기할 법한 일을 성공시킨 나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대며 기쁨을 표출했다.
이 맛에 도전을 하는 거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머리를 박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일수록 성공했을 때의 기쁨이 더 크니까!
‘봐요! 할아버지! 할 수 있다고 그랬잖아요!’
<허.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이게 바로 썩…주신의 사도가 지닌 위엄이에요! 아시겠어요?!’
한참 동안이나 팔다리를 마구마구 휘젓던 나는 흥분이 가라앉은 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수많은 트라이 끝에 성공을 했단 사실이 너무 기뻐서 바보 같은 일을 저질러버렸어.
할아버지는 네 나이 대의 어린 아이다워서 귀여웠다고 그랬지만 그게 문제야!
귀엽다는 말은 그 자체로 나한테 치욕이라고!
<허허. 네 속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리 강한 체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할아버지는 내가 부끄러워한단 사실이 재밌는 듯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다.
‘주책 좀 그만 부리시면 안 돼요?!’
<귀여운 걸 귀엽다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지?>
‘할아버지도 얼빠여우랑 똑같이 될까봐 무섭단 말이에요!’
<…아무리 나라도 그런 모욕은 참을 수 없구나! 정도라는 게 있지!>
할아버지와 티격태격 하는 것으로 화제를 돌린 나는 다시금 심호흡을 하고서 100층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이번 던전의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는 건 뭘까.
아랫 층부터 시작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뒀으면 맨 마지막에 있는 것도 결코 가벼운 상대는 아닐 텐데 말야.
아카데미 던전의 보스 중에서 제일 그럴 듯한 게 뭐였는지 고민하던 나는 100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대를 마주하고 나서 아카데미가 진정 진심을 다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100층에서 날 기다리던 것은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를 지녔으며. 비단결 같은 붉은 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었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녔으며. 얄미운 웃음이 얼굴에 박혀 있는 듯한 인형 같은 꼬마 아이.
루시 알른.
100층에서 날 기다리던 것은 나였다. 정확하게는 날 흉내 내고 있는 골렘.
와아. 소울 아카데미의 모든 스토리를 클리어하고 나서 아카데미 던전에서 마주할 수 있는 히든 보스 중 하나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내가 만들어 낸 던전이 아카데미 교수들의 의욕을 제대로 끌어올리긴 한 모양이네.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던 나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아카데미의 특제 도플갱어는 분명 까다로운 상대다.
유저가 지닌 스펙을 그대로 흉내낸다는 것은 유저가 쌓아온 노력이 자신을 짓누른다는 이야기니까.
허나 여기에는 분명한 맹점이 존재한다.
타 게임의 도플갱어와는 다르게 아카데미 던전의 도플갱어에겐 한계가 존재하거든.
예를 들어서.
아카데미의 도플갱어는 사도의 권능을 완벽히 따라하지 못한다.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열화판에 불과하지.
또한 아카데미의 도플갱어는 던전의 출력을 넘어서는 강자 또한 따라하지 못한다.
과부화가 걸려서 흉내내지 않는 것만도 못한 상태가 되고 마니까.
이외에도 아카데미 도플갱어에겐 여러 약점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아카데미의 히든 보스는 첫 발견 이후로 계속해서 평판이 낮아지기만 했었다.
아카데미 도플갱어에게 ‘그 녀석은 히든 보스 중 최약체!’라는 별명을 만들어주는 데 일조했던 나는 나 자신을 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아니. 난이도 적인 부분말고 다른 부분에서 부담이 느껴지긴 하네.
양심에 찔려.
키득거리는 꼬맹이를 보고 있자니 예전의 루시가 떠오른단 말야.
저 귀여운 여자애를 내 메이스로 공격하라니!
이건 썩은물 이전에 인간으로써의 도리와 관계된 문제잖아!
우와아. 지금까지 날 공격했던 놈들은 대체 얼마나 쓰레기였던 거야?
아무리 내가 좀 깐족거렸다고는 하지만 이런 여자애를 한 치 망설임없이 해하려 들다니!
진짜 인간이 덜 됐.
“와아. 안녕. 귀여운 언니!”
응?
“엄~청 귀엽게 생겼는데 들고 있는 건 왜 그렇게 투박한 거야? 언니는 자기 자신의 예쁨을 모르는 바보멍청이인 걸까?”
…
“관리 안 하면 한순간에 폭삭 늙어버릴 걸? 쭈굴쭈굴 할머니가 될 거라구!”
어. 음.
“안 그래도 작은데 허리까지 꾸부정해지면 아기랑 비슷하겠는걸? 쿠후훟. 못나고 쭈굴쭈굴한 아기라니. 그런 게 살 가치가 있는 걸까아?”
키득거리는 꼬맹이를 보던 나는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지금이라면 아무 망설임 없이 건방진 꼬맹이를 교육해줄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