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 연구소 정문 앞, 황금 사신 위병소.
나는 그곳에서 사라진 황금 사신과 붉은 사신의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위병소에 남아있는 황금 사신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려줘.’
내 질문에 댖지가 되어버린 황금 사신은 물론이고 나머지 황금 사신들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황금 사신들의 눈에는 비밀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 괘씸한 황금 사신들을 모두 댖지로 만들어 버린 뒤, 아이들의 말랑한 뱃살을 두들기며 즉흥적인 드럼 연주를 시작했다.
통통통. 통. 통통.
말랑하고 리듬감 있는 소리가 연구소 앞마당에 울려 퍼지자, 그 소리에 맞춰서 황금 사신들의 의지가 흘러나왔다.
‘앙대!’
‘엄마가 괴롭혀!’
하지만 황금 사신들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비밀’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들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짜 신기하네.’
나는 감탄한 의지를 흘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황금 사신들이 이토록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불안한 기분은 들지 않으니까, 별문제는 아니겠지.’
그렇게 단순한 단체 가출 정도로 결론 내리며, 마지막으로 황금 사신들의 뱃살을 몇 번 더 두들겼다.
황금 사신의 뱃살에서 나는 말랑뚜방한 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흐릿한 검은 행성 너머로 하늘 끝에 걸린 달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형형색색의 달들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었다.
‘인간이었을 시절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하늘의 풍경이네.’
하늘을 가득 채운 칠색의 아기자기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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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회색빛의 달.
하늘을 흐릿하게 가리는 커다란 검은 행성.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빛의 고리들.
‘?’
빛의 고리가 조금 많아 보이는데?
그런 의문이 들자, 하늘로 손가락을 뻗어 빛의 고리를 하나씩 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세어보니, 총 여섯 개의 빛의 고리가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시간의 헤일로가… 있었네?’
나비가 가지고 있던 시간의 헤일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손을 뻗어 시간의 헤일로를 하늘에서 불러들였다.
그것이 내 손바닥 위에 안착하자, 나는 신기한 듯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헤일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이 내 얼굴을 비췄다.
***
미니 사신 정원, 우유 빙수 설원.
나는 시간의 헤일로를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포기!’
내가 인간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지, 시간의 헤일로는 활용 방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학생 시절에 양자역학을 수박 겉핥기로만 배웠을 때랑 비슷한 느낌.
시간의 헤일로를 써도, 쓰기 전처럼 시간 가속 말고 다른 활용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힝.
미니 사신들은 다를 것 같아서, 시간의 헤일로와 가장 잘 맞을 것으로 보이는 미니 꽃 사신을 불렀지만, 미니 꽃 사신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 녀석도 가출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죄다 가출해 버린 거지?
나는 시간의 헤일로는 다음에 테스트해 보기로 마음먹고, 다른 능력들도 테스트를 해보기 시작했다.
요즘 오브젝트들을 파괴해도 더 이상 유의미한 변화를 느끼지 못한 지 오래되어, 능력 체크에 소홀해진 게 사실이었으니까.
아마도 내가 너무 강해져서 그런 것이리라.
대부분의 오브젝트 능력은 이미 가진 능력이나 미니 사신, 혹은 헤일로로 재현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열심히 확인해 봐도 대부분은 변함이 없었다.
최근에 잡은 외신 나비에게서 얻은 것은 캐러멜 협곡뿐이었고, 그의 하수인들에게서 얻은 것은 협곡의 나비들뿐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부분에서 달라진 능력이 있었다.
검은 거인 같은 외신 시체를 조종할 때 사용하는, 소속 오브젝트에 의식을 옮겨 조종하는 능력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아마도 빙의 오브젝트를 제압하면서 강화된 모양이었다.
‘그 녀석 엄청나게 약했는데, 능력이 생겼네….’
이번에 잡은 빙의 오브젝트는 황금 사신에 빙의할 정도면 특급 중의 특급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정작 본체는 너무나 약했다.
그런데도 능력을 흡수했다니,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성능적으로 달라진 점은 하나, 조종이 전보다 훨씬 쉽고 자유로워졌다.
나는 능력의 변화를 확실히 체감하기 위해 속이 빈 검은 사신 인형 옷과 황금 사신 인형 옷을 조종해 격투 장면을 연출해 보았다.
전에는 여러 개체를 동시에 조종하면 시야가 쪼개져 어지러웠는데, 이제는 마치 내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러 인형을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애매한 느낌에 불과했지만, 능력의 근본적인 부분이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 조종 능력이 리모트 컨트롤이라면, 지금 능력은 내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과 훨씬 가까워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무슨 차이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차이가 생겼다.
그렇게 두 인형을 싸우게 하며 투닥거리고 있었더니, 어느새 미니 사신 관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인형들이 엄마처럼 싸워!’
‘재밌어!’
‘히히.’
미니 사신들의 즐거운 의지가 설원에 울려 퍼졌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검은 사신들이 하나같이 햄스터를 품에 안고, 설탕이 코팅된 과일을 야금야금 먹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저게 다 햄스터라고?
분명 햄스터는 자판기에 갇힌 한 마리뿐이었는데….
***
검은 행성에 위치한, 진화액에 잠긴 도시.
그 도시의 거울 분지 입구에 서 있는 후배 2호의 눈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흉악한 분위기로 등장했던 거대 꼬챙이 오브젝트가 뒷걸음치며 도망가는 순간, 미니 사신들의 맹렬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와….”
후배 2호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보라 사신들의 촘촘한 경호 속에서,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전투 현장을 지켜보았다.
처음 이 행성에 도착할 때만 해도 위험천만한 미지의 행성을 조심스레 탐험하는 모험가가 될 줄 알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안전한 관광 투어를 즐기는 관광객 같았다.
‘미니 사신들이 예상보다 훨씬 강해.’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우리 황금 뿔 사신이는 약한 편이었던 걸까?’
생긴 것은 꼬챙이 오브젝트가 100배는 강해 보이는데, 이 말랑한 아이들이 이렇게나 강했다니….
황금 사신들과 붉은 사신들이 앞장서서 꼬챙이 오브젝트들을 공격했다.
‘술래잡기!’
‘잡기!’
미니 사신들의 즐거운 의지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마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즐겁게 웃으며 오브젝트들을 제압해 나갔다.
물론 꼬챙이 오브젝트들도 미니 사신들에 맞서 필사적으로 반격을 시작했지만….
보라색으로 빛나는 흉험한 낫이 미니 사신들을 향해 휘둘러졌지만, 황금 사신의 말랑한 볼살조차 잘라내지 못했다.
꼬챙이에서 흘러나오는 진화액은 붉은 사신들의 혁명의 불꽃에 닿자마자 증발해 버렸다.
그렇게 전투가 한창일 때, 후배 2호에게도 위험이 닥쳤다.
거울에서 갑자기 나타난 오브젝트가 그녀의 목을 향해 낫을 휘두른 것이다.
‘!!!’
후배 2호가 그 공격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 칼날이 그녀의 목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 민첩한 습격에 후배 2호는 몸이 굳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림자는 이미 그녀의 목을 감싸 공격을 차단한 뒤였다.
황금 뿔 사신의 반대편 어깨에 앉아, 경호를 전담하는 보라 사신이었다.
보라 사신은 언제나처럼 멋진 포즈를 취한 채, 그림자로 오브젝트를 절단해 버렸다.
“하아, 하아. 고… 고마워….”
후배 2호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은 기분에, 목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 순간 보라 사신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조그마한 손바닥으로 후배 2호의 목을 문질러주었다.
보라 사신의 간호 덕분인지, 후배 2호의 호흡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고마워…. 보라 사신은 정말 대단하구나.”
후배 2호는 그렇게 말하며 보라 사신을, 감사를 담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보라 사신은 망토로 입가를 가리고 뿌듯한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전투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미니 사신들은 모든 꼬챙이 오브젝트를 제압했고, 아름답게 광장을 꾸미던 거울들은 모두 깨져 녹아내렸다.
한때 찬란했던 도시를 보여주던 흔적 하나가, 그렇게 폐허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남은 곳은 하나.
성녀가 구해오라고 한 옥판이 숨겨진 건물뿐이었다.
“자, 이제 옥판을 찾으러 가자!”
그녀는 긴장으로 아직도 심장이 마구마구 뛰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
뚜벅뚜벅.
후배 2호는 어깨 위에 애착 사신을 얹은 채, 중국 교단의 복도를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 분지를 지나서 나온 건물에서 옥판을 찾아, 미니 사신들의 도움으로 지구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때는 정말,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었지?”
후배 2호는 어깨 위의 황금 뿔 사신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옥판이 있던 건물의 분위기는 어둡고 침침해서 뭔가가 나올 것 같았지만, 결국 그 건물은 인간도, 오브젝트도 없는 텅 빈 건물이었다.
그렇게 후배 2호는 그 건물 한복판에 누군가 잘 보이는 곳에 던져놓은 것만 같은 옥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 도착한 아무도 없는 방.
그곳에서 성녀는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성물은 찾으셨나요?]
후배 2호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성녀에게 찾아온 성물을 내밀었다.
[이게…. 교단의 성물….]
교단의 성녀는 옥판을 빤히 내려다보며, 염파를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후배 2호는 그 시선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시선은 조금 신기한 것을 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성물을 보는 성녀의 시선 같지는 않았으니까.
[만족스럽네요. 첫 번째 소원은 완수되었습니다. 대리인, 혜진 씨.]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성녀의 표정은 오히려 찾아왔다는 사실이 꽤 아쉬워 보였다.
그리고 성녀는 옥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그것을 등 뒤로 휙 던져버렸다.
“!”
후배 2호에게는 그 모습이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두 번째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성녀는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