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3
불온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숲은 무척이나 잔잔했다.
새의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으며. 짐승의 걸음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고. 바람을 따라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소리조차도 힘이 없었지.
허나 그 고요함에서 불길함을 찾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숲의 공기 사이에 뒤섞여 가라앉아 있는 기운들은 고요의 뒤에서 자신을 감추고 있었으니까.
당장 나조차도 숲을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그저 어두운 숲이구나 하고 넘어갈 것 같다 생각할 게 분명한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영애님.”
나는 슬며시 옆으로 다가 온 페이비를 보고서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다른 친구들에게 이에 대해 알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저들이 던전의 안에 있는 동안 이 숲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온함은 사라질 테니까.
괜히 걱정을 시키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끝이 나는 편이 낫지.
“…알겠습니다.”
페이비는 무언가 떨떠름한 듯 했지만 그렇다 하여 내게 따지고 들진 않았다.
그렇게 페이비가 물러서기 무섭게 비시의 옆을 지키던 아드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저거 때문에 데리고 온 거죠?
이 할망구. 왜 갑자기 공손하게 구는 거야? 답잖다는 생각에 고갤 갸웃거리던 나는 근처의 비시를 발견하곤 연기 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도 가면을 안 벗은 거야? 할망구가 대단한 건지. 비시가 눈치가 없는 건지.
순간 가면을 벗기고 싶단 욕망이 치솟았지만 난 그를 억지로 눌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으음. 나 혼자 목소리를 내면 이상하겠지?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아드리가 허공에서 팔짱을 꼈다.
– 질이 나쁜 사람들이네요. 저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을 줄은.
악질이라고? 아드리의 목소리가 다소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질문을 할 뻔 했지만 난 억지로 그를 꾹 눌렀다.
그런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가볍게 웃음을 흘린 아드리는 나중에 제대로 설명을 해주겠다 말하고는 돌아갔다.
아. 뭔가 짜증나네. 바로 설명해주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궁금증만 증폭시키는 저 화법이 너무 싫어.
아악. 사령술사인 아드리가 악질이라고 말할 정도면 저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지금 상황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심각했던 건가?
…
일단 숲 쪽으로 안 다가가는 편이 낫겠네. 우회하자. 숲 안에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생겨날지 모르잖아.
친구들과 함께 있는데 굳이 위험한 방식을 택할 필요 없다 여긴 나는 일부러 빙 돌아서 던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런 곳에 진짜로 던전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도착한 곳을 숲을 지나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산의 중턱이었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찾아오지 않을 듯 한 그 척박한 장소에는 떡하니 던전의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곳은 일종의 히든 같은 장소다. 정상적인 경로로는 찾아내기 어렵지만 뒤지고 뒤지다 보면 어떻게든 찾아내는 건 가능한 그런 곳.
이런 종류의 던전이 흔히 그렇듯 이 지역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던전보다 조금 더 어렵고 그만큼 특별한 보상을 선사하지.
내 기억에 이 던전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보상은 마력과 관련된 패시브였을 테니 분명 모두의 도움이 되리라.
“지금 바로 들어갈 건가?”
“던전 문을 보니까 겁이 나시나 봐요. 쫄보왕자님?”
“그런 소리가 아니잖으냐.”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전 이번에 안 들어갈 거니까 왕자님이 하고 싶은 만큼 게으름 부리셔도 돼요.”
“…안 들어간다고?”
“같이 안 가요?”
“루시. 안 가?”
내가 안 들어갈 거라고 이야기를 하자 페이비를 제외한 친구들이 당혹을 표시했다.
하여간. 얘네들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던전 공략 같이 안 하는 걸 가지고 이렇게 놀랄.
“이봐. 너. 루시 알른 맞나?”
…응?
“알른 영애. 혹시 어디 아프세요? 머리에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으으응?
“이거 루시 아냐. 루시는 던전 공략 거부 안 해.”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나는 입술을 곱씹었다.
아. 그러니까 던전에 미친 내가 던전을 공략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거야?
다른 건 몰라도 던전 하나에는 진심인 내가 던전을 공략하지 않을 리 없다?
그래. 부정하진 않을게.
나는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을 참 좋아했고 그 안에 있는 던전들도 무척이나 재밌게 즐겼어.
단순히 재밌게 즐겼다는 정도가 아니지.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의 루트를 암기할 정도로 미쳐 살았으니까 말야.
이런 나이니만큼 던전의 실물을 볼 기회를 어지간하면 포기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치만. 그렇지만. 던전 하나 때문에 일의 경중을 달리할 정도로 미친 년은 아니라고!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면 진짜 심한 말이 될 것 같아서 목소리를 꾹 누르고 있었더니 친구들의 걱정이 한층 더 커졌다.
“하긴 이 녀석이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여태 멀쩡한 게 더 이상하긴 했다. 우리보다도 더 힘든 고행을 거듭하는 녀석이니.”
“그럼 여태까지도 강한 척 하고 계셨던 거군요.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 루시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까?”
“프레이 켄트. 그건 아니다.”
“켄트 영애.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역시 그런가?”
더 열이 받는 것은 친구들이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적당히 웃어넘겼을텐데 조이와 아서의 얼굴에 서린 걱정은 너무도 진실 됐던 것이다.
이게 왜 열이 받냐고? 이 허접들이 진심으로 날 던전이라면 목숨도 내걸 미친 년이라고 생각하고 있단 소리잖아!
비슷한 짓을 저지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날 정신 나간 년이라고 믿고 있단 사실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야♡ 허접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메이스를 작게 만들어 주머니에 넣은 후 두 손을 꾹 쥐었다.
“…영애? 메이스는 왜 집어넣으신 건가요?”
“내 몸 상태가 좋은지 안 좋은지 직접 알려주려고♡ 허~접한 너희들은 말보다 이런 걸 좋아하잖아?♡ 그치?♡”
“잠. 루시 알른. 진정. 진정해라. 우리가 그런 의도를.”
“어라아~♡ 불쌍왕자님의 목소리가 너무 찌질해서 잘 안들리네요~♡ 잘 모르겠지만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갈게요♡”
“말로 하란 말이다! 말로!”
세 사람에게 주제를 알려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서와 조이 두 사람이야 근접 박투에서 날 이기는 게 불가능한 이들이니까 당연하고 프레이는 아예 자기만 상대를 안 해주니까 자기 혼자 기가 죽어서 쭈그러들었지.
그렇게 모두를 조용하게 만든 나는 조용해진 세 사람의 앞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
“너희 허접들은 내가 옆에 있으면 나한테만 의존하잖아? 내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렇지 옆에서 마망~하고 달라붙기만 하면 부담스럽단 말야. 이젠 자립할 줄도 알아야지.”
내가 옆에 있으면 알게 모르게 나한테 의존하게 되니 너희들끼리 움직여봐야한단 이야기에 세 사람은 다들 어느 정도 납득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와 함께 던전을 공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들이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야.
“저어. 알른 영애. 저희끼리 던전에 들어가야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 그 동안 영애는 무얼 하시나요? 따로 데려오신 저 분과 할 일이 있는 건가요?”
“내가 뭘 할지가 그렇게 궁금해. 얼빵아?”
“네.”
“흐응. 날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말야.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건 좀 징그러워서 싫거든? 자제해줄래?”
“제. 제가 언제 집착을 했다고 그러세요!”
친구들이 어느 정도 납득했다 생각한 나는 하루 안에 던전 공략을 끝마치면 벌칙의 강도를 줄여주겠다는 당근을 풀어 저들이 던전 공략에 최선을 다하도록 만든 후 페이비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허접 성녀라도 성녀는 성녀니까 아이돌보기 정도는 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영애님.”
믿고 맡긴다는 식으로 페이비까지 납득시킨 나는 친구들이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칼의 옆에 찰싹 달라 붙어 있던 비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비시의 근처에서 머물던 아드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 다음 번에는 저 혼자 올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항상 비시와 함께 다니면 얼마 안가서 비시가 제 동료가 될 것 같으니까요.
“이 들러리를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 제가 그렇게 자비롭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당연한 걸 왜 물어봐? 외톨이 할망구만큼 치졸한 존재도 흔치 않을 것 같은데.”
– …두고 봐요.
“저. 아가씨.”
목에 핏줄을 세우는 아드리를 보고서 키득대고 있으려니 칼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왜. 허접견?”
“누구와 대화하고 계시는 겁니까?”
두려움이 절로 묻어나는 칼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난 히죽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다? 보통 개들은 이상한 걸 잘 본다던데 허접견은 아닌가봐?”
“농…담하시는 거죠?”
“야. 허접견. 지금 넌 내가 미쳐서 혼자 중얼거린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예?!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게.”
– 저 여기 있어요.
당황해서 손을 내젓던 칼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잠시 굳었다가 관절인형마냥 뚝뚝 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기다리던 아드리가 손을 흔들어주는 걸 보자마자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다.
이야.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유령은 안 되는 가보네.
쫄보 녀석 같으니.
“아드리?! 방금 전에 뭐 한 거야?”
– 아무것도 안 했어요. 비시. 보면 알잖아요.
“그럼 왜 칼 교수님께서.”
“겁많은 허접견이라 그래. 저 녀석 할망구마냥 음침한 유령은 무서워하거든.”
“…진짜요?”
“아니면 왜 저런 꼴이 됐겠어?”
유령이 무서워서 기절했단 이야기에 비시의 눈빛이 순간 짜게 식었다.
저 정도로 벌써 그러면 곤란한데. 아직 칼이 보여줄 수 있는 추함은 한참 남았다고.
나중을 기대하며 키득키득 웃던 난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아드리에게 시선을 보냈다.
내 시선을 받은 아드리는 헛기침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 처음 숲을 봤을 때 했던 이야기를 이어가달란 거죠?
“확실히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눈치가 좋네. 외톨이 답지 않아.”
– ㅇ… 아니. 음. 지금 숲에 흑마법의 흔적이 있는 건 알고 계시죠?
“할망구. 넌…”
–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명을 할게요. 지금 숲에 도사리는 흑마법사들은 숲 자체를 집어 삼키려고 하고 있어요. 숲을 던전으로 만들려고 한다 설명하면 편하겠네요.
“…야. 할망구. 다시 말해봐.”
– 숲을 집어삼키고.
“그거 말고. 그 뒤.”
– 숲을 던전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단 거요?
“그래. 그거.”
지금 여기에 새로운 던전이 생겨나려 하고 있다고?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