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매캐한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며, 그 자리를 달콤한 핫초코의 향기가 채워갔다.
폐허였던 공간이 마치 미니 사신 정원으로 변모하는 듯했다.
이리저리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바닥의 차가운 석재들은 어느새 말랑하고 폭신한 마시멜로로 뒤덮여 있었다.
주변 환경의 변화만 보자면, 회색 사신의 세계가 램프의 남자가 만든 세계를 완전히 밀어내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그런지, 후배 2호는 탐정 선배가 깨어나는 것도 잊은 채,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 속에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뒤섞여 있었다.
“이럴 수가….”
그녀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램프의 남자와의 전투 중,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회색 사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후배 2호가 아는 오브젝트 중, 가장 강력한 존재가 이렇게나 무력하게 파괴되다니?
“어… 어떡하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후배 2호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노란 탐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노란 탐정의 목소리는 조금 허스키했지만, 의외로 차분했다.
격변하는 전투 상황에 정신이 팔린 후배 2호는 그제서야 탐정 선배가 깨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품에 안긴 아귀가 마구 찌그러져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것도 못 듣고 있었다.
뀨힝힝.
노란 탐정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어지러움이 묻어났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회색 사신은 아직 괜찮아.”
그의 말에 후배 2호는 즉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미니 사신들의 모습이었다.
미니 사신들은 추위에 맞서 싸우는 펭귄들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서로 온기를 나누며 서 있었다.
후배 2호는 그 광경을 보자 마구 뛰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엄마….’
‘적, 강해….’
미니 사신들의 표정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큰 문제가 터졌을 때의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
회색 사신이 사라지자, 다시 점점 매캐한 연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기 사이로 공간의 왜곡이 느껴졌다.
램프의 남자가 성녀 인형을 데리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앗!’
‘해로운 오브젝트가 도망간다!’
그 순간, 미니 사신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램프의 남자가 시선을 던지자, 가스램프의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미니 사신들을 날려 보냈다.
‘앗!’
형형색색의 미니 사신들은 무력하게 튕겨 나가면서도, 이를 악물고 끊임없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미니 사신들의 힘은 이상하게 소용돌이치는 연기 앞에서 무력했다.
검은 사신들만이 소용돌이를 찢어발기며 나아갈 수 있었지만, 검은 사신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자, 그러면 이쪽으로 오시죠.]
램프의 남자가 손짓하자, 성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미니 사신들은 마치 닿을 수 없는 별사탕을 바라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램프의 남자와 성녀가 공간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번쩍.
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서 내리친 황금색 섬광이 공간의 균열을 부숴버렸다.
‘!!!’
미니 사신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다시 오로라가 물결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오로라 아래, 높이 솟은 한 쌍의 뿔과 하늘 위로 펄럭이는 망토, 그리고 황금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검을 든 황금 사신이 있었다.
‘허그!’
‘강도!’
그 뒤에는 허그 사신이 헤일로를 머리 위에 뒤집어쓴 채, 허그를 외쳤다.
허그 사신의 심장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강도가 꽂혀서, 강력한 황금 사신 3단 합체를 시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램프의 남자는 그것을 보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가스램프의 연기가 날카롭게 벼려져, 거대한 칼날로 변해 날아들었다.
마치 조금 전의 참격을 그대로 재연한 것처럼, 그 안에는 공간마저 잘라버리는 힘이 담겨 있었다.
‘막아!’
‘방패!’
‘장벽!’
하지만 강력한 참격은 검은 후드 사신을 선두로 한 검은 사신들의 파도가 몸을 던져 막아냈다.
물리 면역조차 잘라버리는 공간 절단은 튼튼한 검은 사신의 피부를 깊숙이 잘라냈지만, 두껍게 합쳐진 검은 사신 덩어리를 한 번에 양단해 버리지는 못했다.
수많은 검은 사신이 가슴팍에 날카로운 검상을 입고 ‘으앙!’을 외치며 널브러졌지만, 검은 사신의 숫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계속 부활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맹렬하게 회전하는 검은 바람개비가 무려 5개나 있었으니까.
보라 사신은 엄마의 강력한 공간 지배를 막아낸 램프의 남자를 공격하기보다는 미니 사신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검은 사신들은 한 덩어리의 파도가 되어 램프의 남자를 향해 밀어닥쳤고, 황금 사신 융합체는 검은 사신들 사이에서 기회를 노렸다.
목적은 하나.
엄마가 오기 전까지, 램프의 남자를 붙잡는다!
하지만 램프의 남자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가스램프의 연기가 딱딱하게 굳어 미니 사신들의 앞길을 막아버렸다.
그 장벽에 닿은 미니 사신들의 공격은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렸다.
물로 만든 바늘도.
장벽의 틈이 생길 확률을 만들려는 확률 지배도.
장벽이 생기기 전 시간으로 돌리려는 시간 역행도.
전부 다.
그나마 효과가 있는 것은 검은 사신들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방어력에 비해 공격력이 약한 평범한 검은 사신의 공격은 그 연기의 장벽을 부수기에는 너무 약했다.
공간을 찢어버리는 검은 후드 사신을 포함 베테랑 검은 사신들의 공격은 연기의 장벽을 차근차근 해체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황금 사신 융합체의 검격이 연기의 장벽 위로 마구 휘몰아쳤지만, 연기의 장벽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앙대….’
‘엄마, 빨리 와….’
방법이 없어 보여, 미니 사신들 사이로 시무룩한 감정이 퍼져나가는 순간.
강렬한 광채가 하늘을 밝혔다.
마치 태양이 떠오른 것 같은 거대한 황금빛.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지로 가득한 표정.
유령 사신이 만들어 준 ‘나이프’를 들고 있는 황금 사신 융합체였다.
적을 향해 뻗은 칼날이 장작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장작으로 만들어진 황금색 오로라를 모두 들이마실 기세로.
그것을 본 미니 사신들은 조그마한 양손을 기도하듯이 부여잡고, 장작에 염원을 담아 하늘로 올려보냈다.
그러자 황금색 오로라는 한층 더 밝게 빛나며 일렁였다.
‘마아아….’
그것은 탈색 사신을 포함해서, 램프의 남자에게 손이 닿지 않아 그저 응원만 하던 형형색색의 모든 미니 사신의 염원이었다.
그리고 모든 오로라가 제1 검의 손에 쥐어진 순간.
황금색 참격이 연기의 장벽을 향해 내리쳐졌다.
***
나는 미니 사신 발할라의 잔디밭에 누워, 갑자기 떠오른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상당히 중요해 보였지만, 어느새 기억의 저편에 밀려나 버린 꿈이었다.
그야 그런 진지한 이야기, 내 안에서는 푸딩 한 그릇보다 가치가 없었으니까.
‘꿈속의 푸른 소녀는 계약하고 있었지.’
아마 <‘계약의 마도서’와 ‘최후의 연금술사’의 계약서>라는 이름의 계약서였을 것이다.
<계약이 실현된 후, ‘최후의 연금술사’와 그 능력에서 태어난 존재는 모두 ‘계약의 마도서’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램프의 남자와 전투 끝에 쓰러진 뒤, 갑자기 떠오른 것은 저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조항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램프의 남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지금 상황과 계약의 조항이 정말 비슷해 보였다.
‘설마….’
나도 멍청이는 아니니까, 나와 푸른 소녀에게 모종의 연결이 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푸른 소녀’가 만들어 낸 오브젝트이거나.
혹은 내가 ‘푸른 소녀’ 본인이거나.
어딘가 이상한 점들이 있었지만, 현재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가설은 그랬다.
그리고 푸른 소녀의 공방에서 발견된 납 인형들을 보면, 적어도 ‘회색 사신’의 육신은 푸른 소녀가 만들어 준 것처럼 보였다.
물리적 증거를 가지고 추론하면 확실히 그랬다.
그렇게 이 상황이 계약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램프를 부수며 봤던 보고서 하나가 떠올랐다.
<‘램프의 남자는 계약에 묶인 존재다.’>
SDVIMVFoanVzY1YwSVhjamMzUkt1U3pnY1pRaU5OZVlrWGsxQUxDREd6emRvN1NwNWRuVnBHaU9YZ2dpZmxtSw
그러고 보니 왜 램프의 남자는 공격을 거의 하지 않지?
반격도 내가 했던 공격과 거의 유사해 보였어.
마치 내가 공격한 만큼만 반격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 이상하긴 했다.
외신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데다가, 램프라는 강력한 권속이 잔뜩 있으면서.
계약이라는 번잡스러운 방법으로 인간을 죽이다니.
그냥 램프들이 식칼을 들고 사람들을 습격하는 쪽이 훨씬 더 위협적일 것이다.
그 많은 램프가 일제히 인간들을 습격한다면, 황금 사신의 눈이 빨개지더니 갑자기 인간을 습격하는 것과 비슷한 피해를 줄 테니까.
‘계약에 묶인 존재….’
램프의 남자 정도 되는 격을 가진 오브젝트가, 저런 심각한 제약까지 안고 있다면.
보통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꿈속에서 봤던, 계약서의 한 조항을 떠올렸다.
<계약이 실현된 후, ‘최후의 연금술사’의 앞에 ‘계약의 마도서’가 나타날 경우, ‘계약의 마도서’는 계약의 중대한 위반으로 즉각적이고 영구적인 방법으로 소멸한다.>
내가 만약 ‘푸른 소녀’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푸른 소녀의 몸을 움직여서 램프의 남자를 만난다면.
램프의 남자는 확실히 파괴되겠지.
물론 내가 푸른 소녀라는 물질적인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심정적으로는 푸른 소녀가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심증은 많았다.
램프의 남자가 나에게 보이는 태도.
푸른 소녀의 시점으로 보이는 꿈.
하얀 아귀나 아귀 사신이 보이는 행동.
그리고 나를 아는 것처럼 보이던 오브젝트들.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나는 푸른 소녀의 시체 속으로 의식을 옮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푸른 소녀의 시체 근처에 잔뜩 모여 있던 하얀 아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나는 그렇게 푸른 소녀의 육신을 입고, 작게 목소리를 냈다.
“아, 아.”
내 원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서 그런지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히히.
그리고 나는 푸른 소녀가 마지막을 보낸 폭신한 침대에서 일어나, 황금 뿔 사신이 있는 전장을 향해 순간 이동했다.
그렇게 순간이동을 하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램프의 남자 파괴 조건을 확인한다면, 그 조건은 <계약.>이라고 쓰여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