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이 되어버린 계약의 마도서를 태워버리자, 갑자기 온몸으로 피로가 밀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온몸을 덮치는 것처럼, 푸른 소녀의 육체는 순식간에 극도의 피로감에 빠졌다.
배도 무지 고프고, 눈꺼풀이 서로 달라붙은 것처럼 졸리고, 죽을 것 같은 기분.
“으으….”
내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전신에 근육통이 퍼졌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어지러웠다.
마치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여, 당장이라도 토할 것 기분이었다.
‘토할 것 같아….’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미니 사신들이 있었던 장소를 향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푸른 소녀의 몸에 뭔가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내가 검사해 본 바로는 육체에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잠깐 다뤄본 느낌으로는 오히려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튼튼한 편이었다.
‘….’
당장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푸른 소녀의 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쉽게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벗을 때는 벗더라도 원인을 알아둬야 했다.
램프의 남자 때처럼 ‘푸른 소녀’가 필요할 수도 있는 데다가, 연금술이 필요한 순간이 올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아쉽게도 회색 사신의 몸으로는 연금술을 쓸 수 없었다.
회색 사신이 된 뒤, 머리 대신 몸을 쓰기 시작한 내 지능으로 기억하기에 연금술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으니까.
반면에 푸른 소녀의 몸을 사용하면, 나도 연금술이 가능했다.
희미하게 역류하는 푸른 소녀의 기억도 도움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푸른 소녀의 육신이 가진 고유한 특성도 한몫했다.
그야, 푸른 소녀는 탄생 기원 자체가 ‘연금술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오브젝트였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나는 푸른 소녀인 채로는 연금술을 숨을 쉬는 것처럼 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중간중간 나무를 손으로 짚어가며, 램프의 남자를 따라 걸어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램프의 남자를 따라갈 때는 못 느꼈었지만, 지금 와서 살펴보니 어지러운 것을 조금 억눌러줄 정도로 오솔길의 풍경은 꽤 괜찮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이 나뭇잎에 산산이 부서져서 구불구불한 숲길을 수놓고 있었다.
어두운 흙길 위로 손바닥만 한 빛의 조각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쏟아지는 빛처럼 어딘가 신성한 느낌을 자아냈다.
‘풍경은 나쁘지 않네.’
고통에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만족스러운 풍경 덕분인 걸까?
부스럭거리는 나뭇잎을 밟으며 걸어가다 보니, 고통이 줄어들고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왜 이렇게 아픈 건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빙의 능력이 너무 향상된 탓이었다.
예전에 쓰던 조종 능력은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는 것처럼 리모트 컨트롤을 하는 느낌이 살짝 남아 있었지만, 향상된 능력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보다 훨씬 강화된, 육체와 일체화된 기분.
게다가 ‘회색 사신’과 ‘푸른 소녀’ 육신 사이의 괴리가 상당히 컸다.
배고픔과 포만감을 모르고, 그저 맛있는 것만 먹어도 되었던 몸이 아니었다.
수면 부족의 고통을 모르면서 달콤한 졸음과 깊은 잠의 편안함만을 누리던 몸도 아니었다.
‘회색 사신이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까지 되어버리다니….’
인간 시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짧은 시간 동안 회색 사신으로 지내면서 평범한 피로감과 배고픔조차 견디기 힘들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주기적으로 푸른 소녀의 몸에 빙의해서, 피로감에 적응하는 편이 좋겠지?’
물론 새해에 운동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금세 그만둘 것 같은 다짐이었지만.
그리고 숲속 길을 빠져나와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는 공터에 도착하자, 미니 사신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엄마!’
‘엄마다.’
‘엄마아아!’
해맑은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미니 사신들이 보였다.
도대체 내가 발할라에 가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힘들어 보이는 걸까?
‘가자, 얘들아.’
그렇게 의지를 전하고 공터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앗!’
‘엄마, 같이 가!’
미니 사신들은 나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다가도 쓰러지거나.
걷기를 포기하고, 바닥을 꾸물꾸물 기어 오고 있었다.
마치 늦게 도착하면 엄마가 버리고 간다는 듯이.
‘아이들 모두 엄청 피곤해 보이네.’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나도 미니 사신들처럼 바닥에 쓰러져서 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쉬어야지.’
쉴 때 쉬더라도 세희 연구소에서 쉬는 것이 좋았지만, 유혹에 약한 나는 그대로 불편한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언제나 예린이 품속에 누워서 잠들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예린이 인형의 품속에 누웠다.
그러자 예린이 인형은 내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몸을 굳혔다.
내가 강력한 오브젝트인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은 반응이었다.
[!!!]
예린이와 반응은 조금 달랐지만, 따스한 온기만큼은 닮아 있었다.
마치 황금 사신처럼, 장작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그 포근함에 몸을 맡기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예린이의 품과 비슷한 이 따뜻한 온기 속에서,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고, 어느새 깊은 잠 속에 있었다.
***
그렇게 푸른 소녀를 입은 회색 사신이 잠들자, 미니 사신들이 조용히 다가와 주변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미니 사신들이 엄마를 찾아 모여들자, 긴장으로 몸을 굳혔던 성녀 인형도 긴장을 풀고 천천히 푸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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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얼굴.
성녀 인형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푸른 소녀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리라는 것처럼 아귀 사신이 푸른 소녀의 품속에 폭 안겼다.
안도감과 행복감.
그곳에는 마치 오랜 여정 끝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숲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따스한 햇살, 그리고 검은 사신들의 잔잔한 삐-소리.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자장가가 되어 푸른 소녀를 감쌌다.
***
송파구 외곽에 우뚝 솟은 제임스 타워.
그 최상층에 위치한 제임스의 집무실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어둠이 감돌고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전경과 따스한 태양 빛이 내리쬐는 거대한 창문과는 대조적으로, 실내는 축 처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전부 황금 사신이 없어져서 생긴 일이었다.
제임스는 그 묘하게 어두운 집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전 세계에 퍼진 제임스 연구소의 보고서들이 줄지어 있었다.
집무실 한쪽 구석에 놓인 TV에서 작은 소리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은 행성에서 발생한 이변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붉은 고리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전문가들은 이 현상에 대해….]
제임스는 TV의 소리를 반쯤 무시한 채 모니터 화면의 보고서들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붉은 사신의 실종과 붉은 고리 발생 시기의 연관성.>
<검은 행성의 예상 크기로 보는 붉은 고리의 규모.>
<붉은 고리가 에너지 방출로 인한 광학 현상일 가능성 추정.>
<세계 각국에서 촬영한 붉은 고리 사진.>
끝없이 이어지는 보고서들을 읽어 내려가던 제임스는 잠시 한숨을 돌리며 옆에 놓인 핫초코 잔을 들어 올렸다.
뀨!
그러자 작은 소리와 함께 접시 위에 놓인 황금색 하얀 아귀가 작게 울었다.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
제임스는 하얀 아귀를 볼 때마다 조금씩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황금 사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게 하얀 아귀의 잘못은 아닐 테니까.
물론 SNS 같은 곳을 보면 하얀 아귀가 황금 사신을 잡아먹었다는 음해도 꽤 있었지만, 제임스는 하얀 아귀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핫초코를 마신 후, 제임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뜬 하얀 구름 한 점이 태양을 가리며 집무실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순간 실내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렇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집무실에서, 제임스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가 변했다.
집무실을 뒤덮던 어둠이 순식간에 걷히며, 따스한 빛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집무실에 드리운 구름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은은하게 태양의 향기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인간!’
제임스가 고개를 돌리자, 그토록 그리워하던 황금 사신이 책상 끝에 매달려서 히히 웃고 있었다.
‘돌아왔어!’
제임스는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단지 제임스의 집무실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제임스 타워 전체, 아니 황금 사신들이 있었던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때문인지, 창밖에서 작게 환호성이 들려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금 사신은 제임스의 손길을 즐기며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제임스가 그리운 만큼 황금 사신도 그리웠는지, 황금 사신은 제임스의 손등 위에 올라가서 자기 얼굴을 비볐다.
히히.
제임스는 어쩐지 집무실이 확연히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대부분의 미니 사신은 정원 밖을 돌아다니는 데다가, 하얀 아귀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텅 빈 마시멜로 평원.
그곳에서 불쑥, 고풍스러운 램프가 솟아올랐다.
그 램프에서는 왠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