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연기에 가려진 시야.
그것은 언제나 램프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램프가 보는 과거도, 꿈도 그러했다.
램프는 짙은 연기 속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어딘가 멍청해 보이는 남자였다.
뛰어난 탐정이 되고 싶다고 ‘램프의 남자’에게 소원을 빌어버린 바보 같은 인간.
“이제부터 나를 홈즈라고 불러.”
램프를 얻은 남자는 자신을 홈즈라고 부르라고 했다.
램프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절대 이 남자와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겠지.
그리고 남자는 램프를 왓슨이라고 불렀다.
그것만 봐도 정말 멍청한 남자였다.
오브젝트에 고유명사로 만들어진 이름을 붙이다니, ‘이름없음’이 나타나서 당장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멍청한 만큼이나 운이 좋았던 건지….
혹은 ‘램프의 남자’가 말했던 것처럼 세계의 끝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이름없음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램프의 이름은 왓슨이 되었다.
[….]
하지만 램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널브러져 죽어버린 남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이름을 지어준 남자는 금세 죽어버렸다.
뛰어난 탐정이 되지 못했으니까.
그가 가진 것은 추리력이나 지성 같은 것이 아니라, 끝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램프를 ‘왓슨’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들고 다닐 수 있는 유쾌함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램프의 시련에 잡아먹혀 버렸다.
램프는 멍청한 남자가 썩 마음에 들었지만, 램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그런 ‘계약’이었다.
램프는 그 후로도 수많은 ‘홈즈’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었고, 똑똑한 사람도 있었고 멍청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램프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 전부 뛰어난 탐정이기를 원했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모두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그리고 램프는 그 모두를 좋아했다.
그중 가장 특별했던 건, 마지막에서 두 번째 홈즈였다.
그는 램프와 엮인 정체불명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다가, 램프에 도달한 첫 번째 인간이었다.
그는 몇 번의 사용 만에 램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램프의 도움을 받고 인도를 따르면, 언제나 사용자의 죽음이나 주변의 막대한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채 버렸다.
마지막 홈즈가 중앙 연구소에서 탈출하면서 중앙 연구소 격리 실패와 송파구 붕괴를 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전대 홈즈는 ‘램프의 남자’가 숨겨둔 함정을 발견해 버렸다.
그것을 깨닫기 무섭게, 그는 램프의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원했던 후계자의 자질은 지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세계가 돕는 것 같은 막대한 운과, 자신의 추리를 뛰어넘는 동물적인 직감뿐이었다.
그는 지성과 추리만으로는 ‘램프의 남자’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가혹해지는 램프의 시련 속에서, 전대 홈즈는 후계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 홈즈.
그는 첫 번째 홈즈만큼이나 멍청해 보였지만, 인간을 초월해 초능력의 영역에 닿은 직감을 가진 남자였다.
램프는 그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 남자가 자신을 파괴할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마지막 홈즈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램프는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웠다.
[잘 있어, 마지막 홈즈.]
먼지가 되어 사라지며, 램프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나는 몸 여기저기가 뻐근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예린이 인형의 곤히 잠든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내 품 안에는 아귀 사신이 안겨 있었다.
마치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귀 사신은 나를 보면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이런 편안한 표정은 처음 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표정은 처음 보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귀 사신의 말랑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
그러자 아귀 사신은 작게 ‘뀨’하고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지만,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귀 사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며 주변을 둘러보니, 미니 사신들이 나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 잠들어 있었다.
마치 작은 병아리들이 어미 닭 주위에 모여 있는 모습 같았다.
그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태양이 서서히 지평선을 향해 기울어 가고 있었다.
태양 빛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서 그런지, 포격으로 망가진 폐허는 점점 황량한 분위기가 차오르고 있었지만, 폐허 너머로 보이는 숲은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는 초록빛을 뽐내고 있었다.
“으으….”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움직이자, 온몸이 뻐근했다.
차가운 바닥에서 잔 탓인지, 아니면 어색한 자세 때문인지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원래의 회색 사신의 육신이었다면 이런 고통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딱딱한 바닥은 물론,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진 가시밭 위에서 자도 멀쩡했을 것이다.
인간의 육신이란 건, 도무지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볼이 뭔가에 눌린 것처럼 꽤 아팠다.
볼을 만져보니 예린이 인형의 옷에 새겨진 문양 모양대로 자국이 남아있었다.
회색 사신일 때도 눌린 자국은 날 수 있었지만, 일정 이상 변형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프진 않았는데….
“아, 진짜 아프네….”
나는 볼을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 작은 움직임에 미니 사신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일어났어?’
머리카락이 엉킨 채로, 부스스 일어난 미니 사신들.
아이들은 비몽사몽인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자, 히히 웃었다.
아직 잠에 취해 눈을 비비는 미니 사신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준 뒤, 일어나려고 하자 뭔가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내 몸통에 찰싹 달라붙어 놓아주질 않는 아귀 사신이었다.
나는 아귀 사신의 볼을 콕콕 찔러 깨우며, 아이들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얘들아, 이제 돌아가자.’
내 말에 미니 사신들이 하나둘 일어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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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던 예린이 인형도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리고 우리들이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이제 작별이라는 것처럼 눈빛에는 작별의 외로움이 서린 채,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설마 이 폐허 속에서 계속 지낼 생각인 건가?
하지만 나는 예린이 인형을 이 폐허에 남겨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감히 예린이의 얼굴을 하고, 어딜 도망가?
나는 예린이 인형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러자 예린이 인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예린이 모양의 모든 존재는 내 거야.
히히.
태양이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 가는 가운데,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내가 순간 이동을 사용하는 순간, 황량한 공터 위의 그림자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
마시멜로 평원은 익숙한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미니 사신들이 하나둘 귀환하면서 정원은 점점 북적이기 시작했다.
뚜방뚜방한 걸음으로 돌아오는 미니 사신들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풍에서 돌아오는 것 같았다.
‘히히.’
미니 사신다운 웃음이 실린 의지가 정원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여전히 붉은 사신과 하얀 아귀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마시멜로 정원은 꽤 북적이기 시작했다.
그런 마시멜로 평원 구석에서 미니 사신들의 의지가 울려 퍼졌다.
‘새로운 동생!’
‘동생!’
‘신기한 동생!’
‘껍데기가 있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미니 사신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램프가 놓여 있었다.
그 고풍스러운 램프는 정원에 생겨난 장식품이 아니라, 새로운 동생, 램프 사신이었다.
램프 사신의 모습은 다른 미니 사신들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소라게가 자기 껍데기를 지니고 다니듯, 램프 사신은 고풍스러운 램프를 자기 집이자 껍데기로 삼고 있었다.
램프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펼쳐진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램프의 껍데기 속에는 드넓은 창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계약에 묶여 자유롭지 못했던 램프가 언제나 꿈꾸었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 드넓은 하늘 한가운데, 황금색으로 은은하게 타오르는 작은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램프의 불꽃 대신 빛을 내는 램프 사신의 본체였다.
미니 사신들은 그 낯선 모습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동생들을 반기는 데 앞장섰던 황금 사신들이 먼저 나섰다.
‘동생!’
그렇게 의지를 외치며 황금 사신들은 주저 없이 램프 속으로 뛰어들었다.
램프 속으로 들어온 황금 사신이 가장 먼저 밟은 것은 폭신폭신한 구름이었다.
‘넓어!’
‘엄청 넓어.’
황금 사신들은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의지를 내뿜었다.
그러다 이내 램프 사신을 발견하고는 곧장 달려들었다.
‘동생!’
‘램프 동생!’
‘새로운 동생!’
그리고 램프 사신을 꼭 껴안더니, 말랑한 볼과 볼을 서로 꾹 눌러 문질렀다.
미니 사신 특유의 말랑말랑한 볼을 서로 맞대는 미니 사신 정원의 보편적인 인사였다.
히히.
황금 사신이 해맑은 표정으로 웃자, 다른 미니 사신들도 하나둘 용기를 내어 램프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시멜로 평원의 한구석, 고풍스러운 램프 안에서는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작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나타나서 램프로 쥐불놀이를 할때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