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9
공허의 권능이 깃든 던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판별하는 일이다.
이 곳에서는 무엇이라도 진실이 될 수 있고 거짓이 될 수 있으니. 이를 구분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거짓을 간파하기만 하면 이만큼 쉬운 던전이 없다는 이야기고.
물론 말이 쉽지. 공허의 권능 아래에서 이 모든 걸 구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진짜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거짓을 모두 찾아낸다는 건 사실상 입으로 하는 개소리고 보통은 여러 마도구나 신의 기적이 담긴 물건을 이용해 이를 극복하기 마련이지.
내가 뉴비를 대상으로 적은 공략에서도 그렇게 적어놨었고.
근데 말야.
모든 걸 구별하는 게 힘들단 건 어디까지나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지 아예 불가능하진 않아.
나 같은 썩은물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지금 우리에게로 달려드는 몬스터만 해도 그렇다.
트럭 정도의 크기를 지닌 사슴은 눈을 붉게 물들인 채 자신의 뿔로 우리를 위협하려 하고 있다.
저를 본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대처를 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어대지만 난 방패조차 치켜들지 않은 채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영애?!”
“영애님!”
“루시 알른! 무얼 하는!”
“보고 있어. 허접들.”
미친 듯 돌진하던 사슴의 뿔이 내 앞까지 다가왔지만 난 여전히 여유로웠다.
<루시!>
그리고 나와 사슴이 충돌했지만. 내게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환상이었을 뿐인 사슴은 나를 지나쳐 달려가 다시금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뭐죠?”
그 광경이 얼떨떨했던 듯 날 지키기 위해 옆으로 달려왔던 변태사도는 멍하니 사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목소리를 냈다.
“뭐긴 뭐야. 가짜지. 까마귀마냥 허접한 너는 저런 것도 구분 못 하는 거야?”
“가짜.”
“진짜 가소롭네. 변태짓거리 하는 것말고 잘하는 게 뭔지.”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매도를 하곤 있지만 변태 사도의 당혹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한창 스피드런을 할 당시 도구를 구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그냥 저걸 모두 구별하는 법을 외웠던 나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저기에서 이상함을 찾아내기란 어려웠으니까.
뿔의 모양이 이상하다거나. 털의 배색이 잘못되었다거나. 굽이 잘못되었다거나 하는 걸 구분하는 게 어디 쉽겠어?
<…설령 그 모든 걸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맨 몸으로 다가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으냐.>
‘저런 환영은 잘못 건드리면 문제를 일으키니까요. 환영인 걸 안다면 이렇게 대처하는 게 제일 낫죠.’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할아버지가 잠시 숨을 삼켰다가 느릿하게 목소리를 냈다.
<두렵지 않더냐?>
‘뭐. 아예 안 무서운 건 아닌데요.’
눈앞에서 트럭만한 크기의 사슴이 돌진하는 데 아무런 걱정도 없으면 그게 사람인가.
당연히 무섭지. 롤러코스터의 제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고.
그렇지만.
‘제가 안하면 누가 해요?’
내가 가짜라고 판단을 내렸다면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것 또한 나여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지 않나.
‘그리고 저 정도 충격은 저라면 금방 회복되니까요.’
지금 내 몸이 튼튼한 것도 튼튼한 건데 내 옆에는 변태 사도도 있고 페이비도 있으니까. 뭔가 잘못 되더라도 크게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단 말이지.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라고요.’
<그…렇구나.>
할아버지는 뭔가 마땅찮은 듯 했지만 그렇다고 내 행동을 가로 막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금 친구들 쪽으로 고갤 돌렸다.
“내가 시키는 대로나 움직여. 허접들. 같잖은 너희들이 움직여봐야 귀찮아 질뿐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가볍게 넘긴 나는 다시금 선두에 서서 어두운 숲을 나아갔다.
처음의 환영은 깔끔하게 간파하는 데 성공한 나는 그 후에도 몇 개의 환영을 더 넘어섰지만 중간에 한 번 실패를 하고 말았다.
나를 향해 날아드는 나무뿌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내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판별을 하는 데 실패한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방패를 치켜들었다.
투웅!
방패 위에 내 허리보다도 두꺼운 나무뿌리가 후려처짐에 따라 팔을 타고 충격이 전해진다.
진짜였구나.
“변태 사도!”
“처리하겠습니다.”
이 녀석의 어디가 진짜랑 다른 거지?
아. 젠장. 흙 근처 부분이 살짝 다르구나.
너무 어두워서 저걸 알아차리지 못했어.
빠르게 판단하지 못해 충격을 감당해야만 했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무뿌리의 공격이 준 충격 때문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움직이는 바람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아내긴 했지만 이건 내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짜증이 난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벗어난 후로 일 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나간 건 사실이야.
그 사이의 시간 동안 내 감각이 무뎌진 것도 맞아.
당연한 일이지. 매일매일 시간을 갈아 넣던 시절과 지금이 어떻게 같겠어.
그렇지만 말야.
썩은물의 자존심이라는 건 그런 핑계를 대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선 가벼워서도 안 되고 말야.
입술을 꾹 깨문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방패를 다잡았다.
*
안개로 가득한 던전 속에서 루시와 합류한 조이는 예술 교단의 사도를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이 곳이 그들이 공략하려던 던전과는 전혀 다른 장소라는 것.
지금 이 던전은 공허의 악신이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던전이라는 것.
그들이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사고라는 것.
그리고 루시의 본래 목적이 바로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었다는 것.
그 모든 걸 전해들은 조이는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을 떠올렸다.
어째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느냐는 말.
우리가 그렇게나 믿음직스럽지 못했냐는 말.
우리는 언제까지나 당신에게 지켜져야만 하는 아기들로 보이냐는 말.
왜 다른 사람을 걱정하면서 다른 사람이 당신을 걱정하는 건 생각하지 않냐는 말.
걱정스러운 듯 그들을 살피는 루시 알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조이는 자기도 모르게 이 모든 말을 내뱉을 뻔 했다가 억지로 꾹 눌렀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 던전에서 빠져나가는 것.
이를 물어보는 것은 던전 바깥에 나서 해도 늦지 않다.
그리 생각을 했기에 조이는 자신의 질문을 억누르고 가만 루시가 시키는 바를 따랐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이의 마음에 담긴 목소리는 점점 커져나가기만 했다.
판단이 조금만 잘못 되더라도 크게 다칠 것이 분명한데.
심지어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위험을 넘기며 여러 상처를 얻었는데.
여전히 맨 앞을 지키는 루시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알른 영애를 아예 못 믿는 건 아냐.
다른 때라면 몰라도 던전의 안에서는 전지하다 싶을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저 분이니까.
저런 위험을 반복하는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
다 알아. 안다고.
그렇지만 안다고 해서 마음으로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친구가 맨 몸으로 위험 앞에 걸어 들어가는 걸 마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납득하란 거야.
이래서야 내가 영애의 짐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잖아. 꼭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서 죽을 뻔 했던 그날에 그랬던 것처럼.
조이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던 도중. 갑작스레 숲을 가득 채우던 연기가 저 안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그 모습은 자연스러운 현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흐응. 같잖고 건방진 허접이지만 아예 멍청하진 않구나? 이걸론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바로 도망치는 것 봐. 정말 추하네. 악신 다워.”
루시는 피식 웃으며 그리 이야기를 하고는 안개가 빨려들어간 곳을 향해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다른 일행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숲의 가운데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역겨운 피의 냄새와 썩어들어가는 살갗의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냄새를 맡고 순간 헛구역질을 했던 조이는 기시감을 느끼고 자신의 과거 기억을 뒤졌다.
그리고 나서 깨달았다. 자신이 이 냄새를 어디에서 맡아보았는지를 말이다.
그녀에게 오랜 악몽으로 자리한 곳. 극복했다 생각하는 지금도 가끔 악몽 속에서 마주하는 곳. 조이에게 있어 자신의 무력함을 상징하는 곳.
연금술사가 머무르는 곳.
그를 눈치 챈 조이는 그대로 굳어 멍하니 입구를 바라봤다.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 곳에서 보았던 끔찍한 적들. 몇 번이나 넘겼던 죽음의 위기. 그리고 마주한.
“얼빵아.”
귓가에 스미는 선명한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조이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루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걱정이 잔뜩 담긴 그 눈을.
“오줌 지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네?”
“누. 누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고 그러세요! 음해에요!”
“푸흐흐. 뭐. 그래서 어떡할래. 여기 있을래? 주저 앉아서 벌벌 떨고 있으면 저 아래 허접을 처리하고 올게.”
조이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알른 영애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는 건 그럴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어쩌면 제가 방해라고 생각하시는 걸지도 모르고.
“…아뇨. 괜찮습니다. 복수할 기회가 생겼는데 뭐 하러 물러서겠어요.”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조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물러서 버리면 언제까지고 루시가 생각하는 자신은 방해물로 남을 것 같아서 이를 꽉 깨물었다.
그를 본 루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여느 때처럼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강한 체 하기는. 이러다 안에 들어가서 질질 짜기 시작하면 엄청 부끄럽지 않을까?”
“그럴 일 없거든요.”
“흐응? 그래? 알겠어.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울보얼빵아.”
“그럴 일 없다니까요.”
그 후로 루시는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고 그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여기서 물러서려는 이는 없었다.
그를 확인한 루시는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장 먼저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