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
도움이 필요하냐고?
지금 네가 보기엔 내가 안 다급해 보이냐?!
워낙에 높은 곳에 계시다 보니까 미물의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 거야?!
숨이 막힌다.
의식이 점점 더 희미해진다.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이미 한계가 가깝다.
[이대로는 이야길 나누기 어렵겠네.]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시야가 암전됨과 동시에 목에서 느껴지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시금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나는 갑작스레 바뀌어버린 주변의 풍경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공간.
난 그 한 가운데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사후세계인가?
연금술사한테 목을 졸려서 죽어버린 거야?
[걱정 마. 넌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알림음과 함께 허접 주신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럼 여긴 어딥니까?”
내 입으로 말을 한 후에 스스로 놀라버렸다.
말도 안 돼.
내 입에서 멀쩡한 말이 튀어나오다니.
평소 같았으면 무능한 쓰레기라거나 악신보다도 못한 떨거지 주신 같은 말이 나와야 하는데.
[그 자리에선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것 같아서 네 정신만 불러냈어.]
당신의 권능으로 대화의 장을 만들어 냈다는 건가.
정신만 불러냈으니 스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걸 테고.
이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나를 불러내서 대화의 장을 열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죽음의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됐을 거 아냐.
좆 같은 마조 무능 신. 메스가키의 매도를 그렇게 듣고 싶었어?!
[다시 물을게. 도음이 필요해?]
“예. 당연히 필요하죠. 전 아직 죽고 싶지 않거든요.”
지난 몇 개월 동안 내가 필사적으로 훈련을 거듭했던 이유는 오롯이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난 죽고 싶지 않다.
메스가키의 몸에 빙의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순 없다.
[네가 바란다면 난 널 살려줄 수 있어.]
“그럼.”
[하지만 알아둬. 이 세상에 대가 없는 기적은 존재하지 않아.]
뒤를 잇듯이 떠오른 메시지를 본 순간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하. 못 도와준 게 아니라 안 도와준 거였구나?
소울 아카데미 속의 신들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
거기에 더해 무조건 적으로 선한 것도 아니다.
인간에 비하여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을 뿐인 저들은 신보다는 초월자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다.
저들은 지극히 인간다운 존재니까.
지금 같은 경우도 그렇다.
아르마디 이 음흉한 허접 주신이 단순한 선신이었다면 이 개판이 나기 전에 나를 도와주었겠지.
하지만 이 놈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주는 도움의 가치가 가장 높아지는 순간을 기다려서 등장했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내게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얼 바라십니까?”
[너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야. 내 사도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어째서입니까?”
허접 주신의 조건을 들은 순간 절로 반문이 새어 나왔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신의 사도라는 것이 단순히 독실함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란 건 안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나는. 루시는 어떤 인간인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신을 믿는 신도들을 모욕하고 다닌 사람이다.
신앙이라는 단어와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불신자다.
그런 인간을 왜 사도로 삼으려 하는 거지?
지금의 나보다 나은 사람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을 텐데?
아르마디. 너는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냐.
[신이 사도를 정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거지?
하. 내가 이래서 소울 아카데미의 신들을 싫어한다니까.
선민의식에 가득 차서는 아아. 그런가. 모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너는 아직 알 필요가 없다. 같은 소리나 지껄여 대거든.
마음 같아선 뻔뻔스러운 아르마디에게 엿이나 먹으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죠. 사도라는 거.”
내게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 허접 주신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도달하는 결말은 개죽음이다.
지금 아르마디가 제안하는 거래가 나를 지옥으로 끌어들이려는 악마의 제안일지라도 나는 수락해야만 했다.
[계약은 성립됐어.]
그 메시지를 읽음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는 눈을 뜬 나는 돌바닥 위에 뉘여져 있었다.
나를 실험체로 삼으려던 연금술사도.
우리의 주변을 메워싸던 아르고스들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방 안을 밝히는 발광석들과 방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거대한 구멍뿐이었다.
여기는… ‘연금술사가 머무르던 곳’의 보스룸이지?
내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잠을 자고 있는 조이와 제이콥의 모습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방금 전에 겪었던 재앙을 잊은 것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접 신이라도 이 정도 배려는 해주는 건가.
하. 인심 썼다. 이제부터 앞에 무능 정도는 빼줄게 허접 아르마디.
<여아야. 방금 전에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이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네가 죽음에 위기에 빠졌다 생각한 순간 우리의 주변을 빛이 감싸더니 이 곳으로 전이 되었다. 꼭 신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처럼.>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기에 방금 전 겪었던 일을 할배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내가 했던 여러 불경한 생각은 빼고.
아르마디를 믿는 성기사인 할배한테 내가 속으로 했던 생각들을 말해주면 경기를 일으킬 걸.
<아르마디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 게로구나.>
‘던전이 나타난 것도. 연금술사한테 쫓긴 것도. 전부 다 아르마디님 때문이지만요.’
<허어. 불경하다. 이 놈아.>
좀 불경하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 허접 주신께서는 이런 걸 대충 알고도 날 사도로 만들었는데요. 뭐.
– 실험체여! 어디로 가는 것이냐!
할배와 투닥거리고 있던 중 저 아래에서 역겨운 울림이 담긴 목소리가 내 등골을 타고서 올라왔다.
그내가 서 있는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하며 한 가운데에 있는 구멍을 따라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아야! 움직여야 한다!>
‘알아요!’
연금술사 그 새끼는 생긴 것만큼이나 성격도 징그럽네.
던전의 보스면 자기 던전에나 쳐박혀 있을 것이지 어디까지 쫓아오려는 거야 이 스토커 새끼야!
나는 다급히 양 어깨에 조이와 제이콥을 들어서 맸다.
도망쳐야 한다.
저 놈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대한 멀리.
던전의 지도는 머릿속에 있으니 숨겨진 통로를 타면서 도주하면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을 하던 때에 보스룸의 바닥에 난 구멍을 타고서 촉수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하. 씨발.
이미 늦었나.
나는 어깨에 맸던 두 사람을 바닥에 떨어트린 후 방패와 메이스를 치켜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적대기를 입은 연금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붉은 안광을 본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등골을 타고서 올라온 싸늘한 공포가 내 몸을 잠식한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도망을 치려면 멀리로 쳤어야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좆같은 아르마디.
방금 전에 한 말은 취소다.
아르마디 너는 무능하고 허접한 신이야.
그것도 그냥 신이 아니라 병신.
새꺄! 기왕에 구해줄 거면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보내줘야 할 거 아냐! 이 병신아!
[내가 이걸 예상 못했을 것 같아?]
속으로 잔뜩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으려니 그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내 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고.
“아가씨! 고개를 숙이십시오!”
그와 동시에 칼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숙인 내 머리 위로 검기라 불러야 할 것이 스쳐 지나간다.
검기는 나에게로 다가오던 촉수들을 너무도 가볍게 베어내고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흠!”
자신의 스태프로 검기를 받아낸 연금술사에게서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위기를 느낀 듯 연금술사는 즉시 자신의 불길한 마력을 움직여 마법진을 짜내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칼이 그의 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칼이 검을 휘두르자 연금술사의 몸을 지탱하던 촉수들이 베어나갔고.
자신을 지탱할 것을 잃어버린 연금술사는 다시 자신이 머무르던 던전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아가씨. 괜찮.”
‘전 괜찮으니까…’
“난 괜찮으니까 가서 저 징그러운 병신을 조져버려!”
더럽게 늦게 나타나서는 무슨 구원자 행세를 하고 있는 거야!
이야기를 할 틈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러서 저 놈을 끝장내라고!
내가 그리 소리를 치자 칼은 웃음을 흘리며 알겠다 답을 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던전 아래로 몸을 던졌다.
*
– 같은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이로써 이번 사태는 너무도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소울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변수조차 대비하지 못하다니요.
이번 사고는 파트란 영애의 뛰어난 리더쉽 덕분에 아무런 문제없이 해결이 되었지만 자칫 잘못했다면 입학시험을 치르던 귀족 세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희 베를 아카데미는 이 사태에 관하여…
다른 아카데미에서 보낸 편지를 읽던 소울 아카데미의 교장 주드 알버는 오늘로 백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서 사고가 난 후로 주드는 계속해서 이러한 종류의 편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편지를 보낸 이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소울 아카데미의 학부모들.
다른 아카데미들.
왕궁. 교회. 학회.
소울 아카데미와 관련된 곳이라면 모두들 이 사건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드는 이런 편지를 읽을 때마다 속으로 이런 변명을 내뱉었다.
악신 아그라가 아카데미의 시험에 개입하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일인데 이에 대해 어찌 대비를 해야 하느냐고.
허나 주드는 그 생각을 마음 바깥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무리 잘 해결이 되었다 한들 소울 아카데미의 준비 부족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을 뻔 했던 것은 분명한 일이고.
그는 소울 아카데미의 교장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으니까.
– 소울 아카데미의 교장. 주드 알버입니다. 이번 일은 저희로서도 실로…
깃펜을 움직여 답장을 써내려 가던 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도록.”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어제 하루 종일 일을 하느라 다크서클을 길게 늘어트린 그의 비서였다.
“무슨 일인가?”
“교장님. 알른 영애께서 교장님을 뵙고 싶다 하십니다.”
알른 영애라면 어제 던전에서 일어난 사고에 휘말린 사람 중 하나인가.
“들어오시라고 하게. 아니. 아니지. 내가 직접 나가야겠군.”
알른 영애는 이번 일의 피해자다.
그러니 이번 일에 총 책임자인 주드 알버는 응당 그녀에게 예의를 보여야 했다.
깃펜을 내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비서를 지나쳐 방의 바깥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늙다리 교장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 알른은 주드를 보자마자 정중한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이 허접한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항의를 하러 왔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