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한 오후,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거실을 부드럽게 감쌌다.
예린이가 떠나간 집 안에서, 나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그 온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눈을 감고 미동도 안 하고 누워있어서 그런 걸까, 눈치를 보던 미니 사신들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몰래몰래.
마침내 내 곁에 도착한 미니 사신들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 몸에 달라붙었다.
엄마가 일어날까 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이들은 내 위로 기어올라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말랑말랑해.’
‘따뜻해….’
‘히히, 댖지 엄마.’
미니 사신들이 소곤소곤 흘리는 의지가 들려왔다.
나는 엄마를 댖지라고 음해한 황금 사신을 댖지로 만들어 버렸다.
‘앙대!’
‘댖지….’
자는척하는 엄마 함정에 걸려든 황금 사신은 무려 다섯이나 되었다.
히히.
그렇게 댖지가 되어버린 황금 사신들로 오층탑을 쌓은 뒤, 다시 햇빛 아래 누워 시선만 거실 탁자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성녀 인형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 권의 책이 펼쳐져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히히.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책을 보는 성녀 인형의 모습은 예린이의 대리 출근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해 버린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중국 쪽에서 살아서 그런지, 성녀 인형은 한글은커녕 한국어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한국어도 모르는 성녀 인형을 생긴 게 똑같다고 대리 출근시킨다?
아마 순식간에 발각되어 버리겠지.
그래서 그런지, 예린이는 어디선가 한국어 교재를 구해와 던져두고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먹기 직전의 별사탕을 빼앗긴 황금 사신처럼,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흠.
사실 예린이의 계획에는 한글 말고도 문제가 잔뜩 있었다.
안과용 안대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쓰고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고, 성녀 인형이 음성으로 말하지 못하고 오직 염파로만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점도 큰 걸림돌이었다.
도대체 예린이는 이 염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연구원이 될 정도의 엘리트니까, 뭔가 방법이 있겠지?
[저기….]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성녀 인형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야말로 신을 마주하고 말을 거는 듯한 분위기였다.
[신님? 회색 사신님?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
나는 그 염파를 듣자마자, ‘내가 왜 너희들 신임?’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가 마구 돋아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은 사건들을 떠올려 보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수많은 일들과 꿈들을 생각해 보면, ‘검은 거인’이라고 불리는 신과 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명확한 증거는 없어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불러.’
그렇게 의지를 보낸 뒤, ‘내가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비밀이야.’라고 덧붙였다.
[네….]
그러자 성녀 인형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탁자에서 일어나, 진지한 목소리의 염파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교단원들은….]
‘?’
[교단원들은 약속받은 낙원에 갈 수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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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말하기 힘든 걸 말하는 것처럼 천천히 전달되어 오는 염파.
마치 대답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브젝트면 몰라도, 인간의 영혼은 모르겠네.’
[!]
내 대답에 성녀 인형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표정.
그녀의 표정은 ‘신’이라면 당연히 인간의 영혼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설마 교리 같은 곳에 그런 내용이 쓰여 있는 건가?
아니지, 검은 거인은 실존하던 신이니까….
그런 일을 벌였다는 목격담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뭐, 언젠가는 가능해질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몰라.’
[그런가요….]
성녀 인형은 꽤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쭈그러들었다.
그 표정에는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순식간에 지워낸 성녀 인형은 정갈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익숙한 동작으로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원래 이런 자세가 원래 모습인 것처럼 정말로 자연스럽고 그럴듯해 보였다.
[죄 많은 교단원들에게도 안배된 낙원이 있기를….]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살 아래, 기도를 올리는 성녀 인형의 모습은 놀랍도록 신성해 보였다.
마치 성스러운 빛 아래에서 기도하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이 평범한 아파트가 마치 엄숙한 성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꽤 어울리네.
예린이랑 똑같이 생겼지만, 예린이가 하면 하나도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다.
이 광경을 본 미니 사신들도 하나둘 그녀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도 발할라가 있기를.’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비록 행동은 성녀 인형을 모방한 것이었지만, 미니 사신들의 염원은 진실하고 순수했다.
아마도 수명이 한정적인 애착 인간들 때문에 황금 사신들도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해 생각이 미치고 있는 거겠지.
‘인간에게도 있기를….’
그렇게 사후 세계에 대한 염원이 또 한 번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
송파구 외곽, 서울의 밤하늘을 찌르는 제임스 타워의 최상층.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불빛은 마치 땅에 내려앉은 별들처럼 반짝였다.
그 찬란한 야경을 배경으로, 제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오브젝트 발생이 너무 늘었어….”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은 그의 말을 증명하듯 위협적으로 솟아있었다.
제임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핫초코가 담긴 그 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의 옆에서, 제임스의 애착 사신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작은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힐 정도로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울 것만 같았다.
‘인간…. 이러다 죽어버려….’
그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제임스는 살짝 웃으며 양팔을 들어 올려 건강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황금 사신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제임스는 그 귀여운 모습을 보고 손을 뻗어, 쭈글쭈글해진 황금 사신의 미간을 문질러주며 말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일은 늘어날 때도, 줄어들 때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말에도 황금 사신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귀엽게 찡그린 황금 사신은 그 모습과 달리, 제임스를 어딘가에 묶어둘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애착 인간이 싫어하니까, 차마 할 수 없어서 속만 태우며 전전긍긍할 뿐이었지만.
그런 황금 사신을 본 제임스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었다.
“그러면 조금만 쉴까?”
그의 목소리에 황금 사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제임스는 창가에 놓인 폭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황금 사신은 재빨리 그의 무릎으로 뛰어올랐다.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둘은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황금 사신과 과자를 나눠 먹었고, 황금 사신은 그의 체온을 느끼며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제임스는 그렇게 간식을 먹으며, 어느새 영어도 읽게 된 애착 사신과 함께 신문을 읽었다.
그렇게 신문을 읽던 중, 제임스는 익숙한 이름의 기자를 발견했다.
언젠가 <오브젝트 협회의 개입으로 반-황금 사신 단체 해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던 기자였다.
황금 사신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우려하며, 거리를 두고 중립적으로 봐야 한다는 칼럼을 자주 작성하던 사람이었는데….
<황금 사신의 등장과 마약성 진통제 사용의 급격한 감소의 연관성.>
이번에 쓴 칼럼은 나름대로 중립적으로 보이려 노력한 것 같았지만, 결국 황금 사신이 얼마나 미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황금 사신이 담긴 소포를 받아버렸나 보군….”
제임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 제임스의 눈에 새로운 보고서가 들어왔다.
<노란 탐정 사무소, 영업 재개 확인.>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역시 한 번쯤 만나서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겠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임스는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노란 탐정과의 미팅을 잡아주게.”
어느새 창밖으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새로운 하루가,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나는 예린이의 아파트에서 돌아와, 폭신한 마시멜로 위에 누워서 쉬고 있었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마시멜로 평원에는 램프 사신들이 둥실둥실 날아다니고 있었다.
램프 사신 때문에 달라진 것 같은 건가?
마치 ‘램프의 남자’나 ‘계약의 마도서’는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처럼.
마시멜로 평원에는 램프가 변한 램프 사신들만 가득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TV에서 검은 행성에 생긴 붉은 고리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나는 그 뉴스를 보자마자, 마시멜로 평원을 둘러보았다.
평원 어디에도 붉은 사신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붉은 아이들은 저기에 있는 것 같네….
왠지 마시멜로 평원이 비어있는 듯했는데, 그 의문이 저 뉴스로 풀려버렸다.
아주 잠깐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불안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하지만 붉은 사신의 출장을 깨달았어도, 위화감은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뭐지?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던 도중,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하얀 아귀가 너무 적어졌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야를 넓혀서 마시멜로 평원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명확해졌다.
하얀 아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감각을 넓게 펼쳐서 확인해 봐도 하얀 아귀의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한 양의 장작이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어디론가 숨어버린 건가?
도망간 하얀 아귀를 잡을 생각에, 내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