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3
연금술사는 자신이 펼치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였다.
그가 흩뿌리는 여러 약물이 신성의 앞에 흩어지고 마법사가 펼치는 마법에 의해 불태워진다.
그가 불러내는 수많은 창조물들이 여러 무기 앞에 흩날린다.
그가 뻗는 촉수들이 둔기의 앞에 터져나간다.
연금술사는 작금의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2년도 지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를 놓친 이후로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시간이 흘렀단 말이다.
근데 겨우 그 시간 동안 이렇게나 강해질 수가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건 단순히 재능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 무기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던 멍청한 꼬맹이가 이렇게 되는 건 결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무리 속에서 연금술사는 루시의 곁을 지키는 신성을 보았다.
태양보다도 따스한 빛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 날 내가 저 꼬맹이를 포획하지 못한 것은 신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기적이 펼쳐졌기에 난 저 녀석을 놓아준 채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런가. 신이 선택한 자인가. 악신의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저 꼬맹이를 택한 것인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간택이었다는 말이냐.
빌어먹을.
그래. 그 때 눈치 챘어야 했다.
자신의 힘 중 대부분을 잃어버린 자가 악신의 앞에 개입했을 때부터 눈치를.
아.
안 돼.
안 돼.
악신이시여. 저를 버리지 말아주소서.
제발. 이 무지하고 몽매한 저를 내버려 둔 채 떠나가지 마십시오.
당신께 제 생을 바쳤습니다. 당신께 저의 모든 걸 바쳤단 말입니다.
나의 인생을 바쳤단 말이다! 아그라!
나의 헌신에 대한 대가를 내놓아라!
나의 생이. 나의 연구가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라!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연금술사는 저 너머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악신이시여.
– 머저리 같은 것.
…뭐라?
– 자신의 쓸모가 다했음을 아직도 모르는가.
쓸모가 다했다니. 아직 내가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내가 만들어낼 것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데.
어찌.
어찌.
어찌!
– 사라져라. 쓸모없는 것.
어둠 속의 시선이 사라져버린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금술사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
저주하겠다.
“하하하.”
지옥에 떨어져서도 네 놈을 저주하겠다.
“하하하하하!”
네 놈이 다시금 깊고도 깊은 심연에 떨어지기를 기다리겠다.
반드시. 반드시!
“으엑♡ 왜 웃는 거야?♡ 설마 맞을 게 기대 되서 그러는 거야?♡ 역겨워서 진짜 건드리기 싫네♡”
퍼뜩 고개를 내린 연금술사는 자신을 비웃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눈동자에 힘을 더했다.
“…네 년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고 가리라!”
“푸하핳♡ 화났다♡ 화났다♡ 나이도 처먹을 만큼 처먹고서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좆이 썩기 전에 조루였지?♡ 3초가 걸리기나 했을까 몰라♡”
*
할 수 있는 모든 발악을 하다가 무너져내린 연금술사의 육신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기지개를 켰다.
아.
이 좆밥한테 화풀이 잔뜩 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풀리네. 역시 짜증이 올랐을 때는 샌드백을 때리면서 짜증을 푸는 게 최고라니까.
<…싸우는 도중의 어휘는 도저히 귀족 영애가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만.>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축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풀이를 하니까 속 시원하단 이야기는 본인이 잘못 들은 것인가?>
‘…어쨌든 잘 먹혔으니까 됐잖아요!’
내 도발에 당한 적들은 나밖에 노리질 못했잖아!
난 어디까지나 탱커의 소양을 수행했을 뿐이야! 결코 이상한 행동을 한 게 아니라고!
<정말 이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은 걸까.>
진심어린 걱정이 묻어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나는 고갤 돌려 바닥에 널부러진 숲의 주인 둘을 살폈다.
“허접 성녀.”
“이 두 분을 치유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물어보시려는 거죠? 충분히 가능합니다. 방금 전 일전에서 악신의 기운이 대부분 거두어졌으니까요. 별 어려운 일도 아니죠.”
주신의 신성을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의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며 미소를 지은 페이비는 우선 나무쪽으로 향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싸우는 도중 거인의 나무에게 내뱉었던 여러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냄새나는 동정♡’
‘그러니까 평생 혼자인 거 아냐♡’
‘차라리 썩어 문드러지는 게 낫지 않을까?♡’
기억… 못 하겠지?
그렇겠지?
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잖아.
내가 했던 여러 말들을 기억 할 리가 없어.
그래. 괜히 언급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아무 문제 없어.
응.
“알른 영애.”
“힉?!”
골몰하던 도중 뒤 편에서 들려온 살벌한 목소리에 폴짝 뛰어올랐던 나는 어깨를 움츠린 채 조심스레 고갤 돌렸다.
그 곳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조이가 있었다.
평소 조이가 부채로 얼굴을 가릴 때는 보통 자신의 허술해진 얼굴을 감출 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여느 때와 달랐다.
부채 너머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가에는 그늘이 져있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게 됐다.
“몇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흐응? 뭔데. 얼빵아?”
귀족적인 조이의 어투 앞에서 메스가키 스킬을 이용해 애써 당당한 체를 한 나였지만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뭐지? 왜 조이가 화가 나 있는 거지?
나 뭔 짓 했나.
내가 조이를 도와줬음 도와줬지 조이한테 뭔갈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우선은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물론이고 왕자님이나 켄트 영애. 페이비까지도 위험해졌겠지요.”
감사의 인사와 함께 허리를 숙이는 조이를 보고 있자니 의문이 한층 더 커졌다.
내 착각인가? 오해를 한 건가?
어쩌면 조이가 부끄러운 걸 참느라 얼굴을 굳히고 있는 걸지도.
“허나 이 감사함과는 별개로 반드시 여쭤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애.”
“뭔데? 말해봐. 너마냥 얼빵한 질문만 아니라면 기꺼이 대답해줄게.”
“왜 아무 말씀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영애께서 하려는 일에 대해 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그제서야 조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눈치 챘다.
“알 필요가 있나? 허접한 너희들이 안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려던 나였지만 메스가키 스킬은 그를 허용하지 않았다.
조이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일순간의 기적일 뿐이었다는 듯 메스가키 스킬은 여느 때처럼 내 진심을 왜곡해버렸다.
조이의 눈썹이 살짝 들리는 걸 본 나는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오해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조이가 상처 받지 않는 방향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허접 주신!
지금 보고 있지! 방금 전에 했던 것처럼 나 좀 도와줘!
이번에 네가 내 준 퀘스트 깼으니까 그 보상으로 지금 날 살려달라고!
“…그렇죠. 영애의 시선으로 보기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층 더 무거워진 조이의 목소리 앞에서 나는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방금 전 거인의 나무가 내지르던 주먹보다 지금 조이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더 무거웠다.
그래서 난 입을 다물어버렸다.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문 채 조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침묵과 침묵 속에서 시선을 교환하던 중 먼저 입을 연 건 조이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부채를 내리더니 살짝 허리를 숙여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영애. 제가 당신의 짐이 된다면 부디 아니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당신의 도움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 아는 친구라는 건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
“당신이 가장 힘들어하는 그 순간에 제가 당신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이의 입가에 지어진 느슨한 웃음을 보던 나는 또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도 내 진심이 방금 전처럼 뒤틀려버릴 것 같아서 어찌하는 게 불가능했다.
입을 열었다 닫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으려니 조이가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걱정 마십시오. 영애. 당신께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뭐?”
“이 녀석 말이 맞다. 네 어투가 왜곡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이의 말이 너무나도 당혹스러워서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아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했다.
“맞아. 맞아. 루시. 우리 바보 아냐.”
“아니. 넌 바보가 맞다. 프레이 켄트.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려 하지 마라.”
“…치사해.”
알고 있었다고? 내 말이 왜곡되고 있다는 걸? 도대체 언제부터?
“예전의 영애라면 몰라도 지금의 영애는 사려 깊은 분이니까요. 그런 분이 방금처럼 험악한 말을 할 리가 없죠.”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귀족 가문에서 살아 온 여자아이가 좆밥이니. 동정이니. 조루니 하는 말을 할 리가 없잖은가.”
“왕자님! 말 좀 골라서 하세요! 영애 앞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이 녀석이 한 말을 똑같이 되돌려 줄 뿐이다!”
“왕자님. 변태.”
“그러니까 난!…”
어.
저 말은 내가 분위기를 타서 한 소리가 맞는데.
그래야 도발이 되니까 나름 심사숙고해서 고른 말인데.
…이 이야기는 평생 비밀로 하자.
응. 이건 다 메스가키 스킬 때문이야.
나한테는 아무런 잘못 없어.
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이 아냐.
“하여튼. 영애께서 무어라 말씀을 하시더라도 저희가 알아서 들을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을 해주세요.”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조이를 본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아서를 본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손을 꼼지락거리는 프레이를 본다.
나무를 치료하면서도 이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페이비를 본다.
그러고 있자니 마음 속에 쌓여가던 걱정이 녹아내리는 게 느껴져서 자연스레 웃음이 새 나왔다.
“얼빵한 조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군요. 영애. 영애께서 제 이름을.”
“방금 전에 한 말 있잖아♡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애처럼 풋풋하더라?♡ 좀♡ 푸훟♡ 귀여웠어♡”
“…네?”
“이게 다 내가 너~무 귀여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저는 그런 의미로 말을 한 게!”
“허어. 조이. 네 녀석. 고단수구나.”
“아니라고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에요. 왕자님!”
“조이. 위대하신 주신께서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페이비! 당신까지 저 놀리는 데 동참하지 마요! 치료에 집중하라고요!”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를 내지르는 조이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으려니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클리어!]
[숲에 도사린 음모를 해결했습니다!]
흐응. 드디어 보상이 주어지는 건가.
이번에는 뭘 주려나.
여러모로 고생했으니만큼 괜찮은 걸 주겠지?
허접주신이 보상을 짜게 주진 않으니까 말야.
기대감을 가진 채 푸른 창이 떠오르길 기다리던 나였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건 보상을 알리는 문구가 아니었다.
[추가적인 퀘스트가 지급됩니다.]
[숲에 남은 부정의 흔적을 없애십시오!]
[이를 수락할 시 보상이 추가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묻고 더블로 가자는 거야?
푸흐흫. 좋아. 알겠어.
기꺼이 해줄게.
대신 보상은 제대로 준비해두도록 해.
이상한 걸 내놓으면 네 신상을 얼빠여우의 침으로 범벅해 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