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빛무리가 공간을 감싸는 꿈속.
나는 마치 허공을 떠도는 영혼처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나름대로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소였다.
푸른 소녀의 마지막 숨결이 머물렀던 공방이자, 그녀의 온전한 시신이 발견되었던 곳.
꿈속에서 마주한 공방은 내가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혹은 누군가가 이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한 것처럼 모든 것이 똑같은 곳에 놓여 있었다.
임종을 앞둔 이가 마지막으로 정리해 둔 방처럼 깔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이 공기 속에 스며있었다.
침대 위에서 푸른 소녀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 곁에는 한 마리의 하얀 아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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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몸집으로 힘겹게 그녀를 침대로 옮긴 하얀 아귀는 지금 당황과 절망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얀 아귀는 치유의 힘이 담긴 포션을 끊임없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려 넣고 있었다.
기적에 맞닿아 있다고 할 만큼 강력한 연금술의 산물이었지만, 그것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푸른 소녀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상처나 질병 같은 것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흐릿하게나마 영혼을 볼 수 있게 된 내 눈에는, 푸른 소녀의 영혼이 마치 안개처럼 흩어져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내가 봤던 방식의 죽음이었다.
특급 오브젝트조차 피해가 갈 수 없는 ‘계약’에 의해서 죽어가는 방식이었다.
램프의 남자가 미니 사신 정원에 합류하지 못하고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처럼,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소멸.
‘!!!’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푸른 소녀의 죽음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단순한 육신의 죽음이 아닌, 영혼의 완전한 소멸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저러면 푸른 소녀는 환생하지도 못할 텐데?’
‘푸른 소녀의 영혼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어째서 램프의 남자와의 계약 조건이 성립될 수 있었던 걸까?’
‘내가 푸른 소녀의 환생이라서 성립된 조건이 아니었다고?’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에도, 푸른 소녀의 생명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얀 아귀는 절박한 마음에 공방의 모든 포션을 들이부을 기세였지만, 푸른 소녀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하자 눈물이 맺힌 채 그녀 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푸른 소녀는 이미 시력이 사라진 것처럼 초점 없는 눈초리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더 살 수 있었으면…. 만날 수 있었다면….”
푸른 소녀의 희미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렸다.
“계약의 마도서다운… 결말이기도 하네. 겨우 몇 년 차이로 만날 수 없다니….”
“만날 수 있었다면, 멀리서 슬쩍 바라볼 수만이라도 있었다면. 추억을 되짚을 수라도 있었을….”
그녀의 말은 점점 더 약해져 갔다.
아쉬운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너무나 희미해져 있었다.
푸른 소녀는 마지막 힘을 모아 자신을 침대로 옮겨준 하얀 아귀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흘리듯 내뱉었다.
“미안해….”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려 했던 말, 격려의 말은 끝내 소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잘 부탁해. 잘할 거라고 믿고 있어.’
그 마지막 메시지는 하얀 아귀에게 전해지지 않은 채, 푸른 소녀는 전지가 떨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
꿈에서 깨어나자, 나는 푸른 소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푸른 소녀 근처에서 잠들어서 그런가, 또 머리 아픈 꿈을 꿔버렸네. 내가 푸른 소녀의 환생이 아니면 도대체 뭐지?’
그렇게 10초 정도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그대로 푸른 소녀의 꿈을 기억의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모르는 것을 아무리 앉아서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던 일을 다시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꿈속 정원에서 나와서, 새로운 능력 테스트를 하고 있었지….’
꿈속 정원에서 테스트한 미니 꽃 사신의 헤일로 테스트는 대성공이었다.
내 예상대로 미니 꽃 사신은 시간의 헤일로를 나보다 훨씬 잘 사용했다.
헤일로를 쓴 미니 꽃 사신은 시간 역행을 새싹 사신보다 더욱 강력하게 실현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파편화된 미래의 가능성을 잔뜩 보여줘서, 미약한 미래 예지 능력까지!
미니 사신들은 나보다 멍청한데, 이런 건 잘한단 말이지….
하지만 하필이면 시간 역행으로 복원해 낸 물건이 타서 사라져 버린 트램펄린이라서, 다시 댖지로 만들어버렸다.
트램펄린을 복원하면 댖지가 되는 미래는 보지 못한 걸까?
히히.
지금 내가 하는 것은 계약의 마도서를 처리하고 생겨난 새로운 능력을 테스트하는 중이었다.
‘엄마! 다했어!’
아직도 조금 몽롱한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볼을 셀프 때찌때찌를 하고 있었더니, 황금 사신 하나가 해맑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황금 사신은 한쪽 손에는 하얀 아귀를 꿰뚫은 창을, 한쪽 손에는 석판 모양 과자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들고 있었다.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체크 표시가 되어있었다.
<하얀 아귀 사냥 (1/1)>
<보상 : 엄마의 칭찬과 별사탕>
‘잘했어.’
나는 그렇게 의지를 전하며 쓰다듬어 주고 별사탕 하나를 주자, 황금 사신은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와 동시에 계약 종료로 계약서가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렸다.
옴뇸뇸.
그러자 황금 사신은 내 근처에 주저앉아, 별사탕을 야금야금 뜯어 먹었다.
‘이번 능력은 쓸모가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듯한 능력이네.’
계약의 마도서를 얻은 뒤, 권속과 계약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서는 꽤 쓸모 있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내 권속이 미니 사신들이라서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야, 미니 사신들은 그냥 시켜도 열심히 명령을 수행했으니까.
뭐, 말 잘 듣는 황금 사신 말고 ‘바쁨’ 거리는 주황 왕관 사신에게 시킬 때는 좋을 것 같긴 했다.
시선을 돌리자, 침대 위에 고요하게 누워있는 푸른 소녀가 보였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소녀.
‘흐음’
슬슬 푸른 소녀의 연금술 능력도 테스트해야 하는데 귀찮았다.
보라 달의 꿈에서 봤던 것과는 아예 다른 인물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연금술 능력이었지만….
들어가면 또 불편하고, 배고프고, 답답하고, 아플 테니, 선뜻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게다가 약간의 청개구리 심보 때문에 들어가기 싫었다.
뀨….
고개를 내려보니, 아귀 사신이 슬픈 표정으로 내 발밑에 매달려 있었다.
내가 꿈속 정원에서 돌아오자마자, 푸른 소녀에 빙의를 해달라고 이렇게 매달린 상태였다.
발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떼어내려고 해도, 아귀 사신이 나보다 힘이 세서 그런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귀찮아….’
그래서 ‘혼종으로 만들어 주면, 나에게 빙의를 조르는 것을 잊고 놀러 다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어서 그 끔찍한 생각을 몰아내 버렸다.
만약 혼종이 되어서도 나에게 달라붙는다면 더욱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회색 사신이 떠나간 푸른 소녀의 무덤.
그곳에는 세희 연구소에서 탈출한 납 인형과 성녀 인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녀 인형은 미니 사신들에게 둘러싸인 채, 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안. 녕. 하. 세. 요.]
연습장에 서툰 글씨로 한글을 써 내려가는 성녀 인형.
성녀 인형의 옆에는 납 인형들이 잔뜩 있었는데, 그중에 한 납 인형만이 손을 움직여서 미니 사신들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다른 납 인형들은 안 움직이는데, 이 인형만 움직이네요.’
성녀 인형은 처음 움직이는 납 인형을 봤을 때는 회색 사신인 줄 알고 깜짝 놀랐었다.
생긴 것도 완전히 똑같았지만, 왠지 신적인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존재감이 있어서 더욱.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진짜 회색 사신에 비하면 존재감이 너무 미약해서, 성녀 인형은 그저 움직이는 납 인형 정도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성녀 인형은 자기 옷 속에서 녹색 옥판을 꺼내 들었다.
후배 2호에게 소원으로 받아낸 교단의 잃어버린 성유물이었다.
‘교단 여러분들도 다들 잘 계시죠?’
성녀 인형은 약간 아련한 눈빛으로 옥판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교단원들이 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성유물을 통해서 그들에게 이 생각이 닿기를 바라면서.
교단원들이 그리울 때마다, 성녀 인형은 옥판을 향해 기도를 올리곤 했다.
콕콕.
갑자기 자기 어깨를 찌르는 감각에 고개를 돌려보자, 납 인형이 노랗게 빛나는 눈으로 성녀 인형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옥판….]
그리고 희미한 염파가 성녀 인형에게 들려왔다.
[이 옥판을 달라고요?]
납 인형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은 처음이라, 성녀 인형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그러자 납 인형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런 납 인형의 황금색 눈동자 속에는 조그마한 열망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