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4
페이비가 두 숲의 주인에게서 악신의 기운을 떨치는 동안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무능한 허접 주신이 제~발 좀 도와달라고 빌어서 여기에 왔는데 딱 봐도 허접한 너네들한테는 무리일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한테 밟히고 싶어서 안달인 변태들을 불렀지.”
주신께서 직접 계시를 내려주셨기에 이 곳에 왔다고.
일이 위험해질 듯 하여 자세한 사정은 숨겼다고.
그렇다 하여 마냥 위험 속에 몸을 내던진 건 아니고 도움을 줄 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번역 되어 새 나가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설득력이 떨어진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권위를 지닌 신을 무능한 허접 주신이라며 모욕하는 사람이 주신의 계시를 받았을 리가 없잖은가.
나 같아도 미친년이 헛소리한다고 생각하겠다!
“계시인가.”
“미리 말씀해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근데 내 친구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내가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에 한 치 의문을 품지 않았다.
선선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갤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조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영애께서는 페이비도 인정한 성기사잖아요. 계시를 받는 게 뭐가 이상하죠?”
그것도 그런가? 아니 그치만.
“주신께서 너를 사도로 택한 것도 아니잖은가. 계시정도야 충분히 가능하지.”
“그쵸. 주신께선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니까요.”
…어. 음. 내가 페도 변태 주신의 사도가 맞긴 한데.
에라. 모르겠다.
설득할 필요가 없으면 내 입장에선 잘 된 일이잖아.
신경 쓰지 말자.
“영애.”
“…응? 뭔데 얼빵아.”
“두렵지 않으셨나요?”
“푸하핳. 내가 이런 허접 쓰레기들을 상대로 쫄 것 같아? 얘네들 정도면 완전 좆밥이라고.”
“계시가 이번 한 번이 아닌 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심지어 이보다 더 위험한 일도 많았다는 거군요.”
“치사해. 나도 위험한 거 좋아하는데.”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걱정과 짠함과 옅은 화가 뒤섞인 그들의 표정은 내 마음 속을 근질근질하게 만들었다.
“여러분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변태사도가 튀어나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른 영애께서는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분이시니까요.”
“예전에도 함께 해보셨나요. 프레테님?”
변태사도의 말에 조이가 공손한 어투로 물음을 던진다. 그러자 변태사도가 미소와 함께 고갤 끄덕였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알른 영애께서 절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전 여기 서 있지 못했겠죠.”
대외적으로 명성이 높은 변태사도가 진심어린 감사를 표시하자 친구들의 눈빛에 감탄이라는 감정이 뒤섞인다.
그 가운데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나는 페이비를 도와야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시선에서 도망쳤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영애님. 거의 다 끝나가거든요.”
페이비가 치료를 시작하고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두 숲의 주인은 거의 제 형상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모니터 너머에서 보여준 모습이랑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은데.
진정한 성녀가 된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걸까?
그리 생각을 하며 감탄하고 있으려니 페이비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이 두 분을 치료하기 쉬웠던 것은 영애님 덕분이기도 합니다. 영애님께서 전투 중에 펼친 신성이 악신의 힘을 상당히 약화시킨 상태였거든요.”
…음.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 아닌가? 내가 저 둘을 치료하기 위해 이런저런 걸 했다면 둘의 형상이 저렇게 멀쩡할 수 없었을 걸?
<형상이 남아 있을까를 걱정해야하지 않을까.>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요?! 주신의 사도라는 지위가 헛으로 보여요?!’
내가 페이비에 비해 신성의 조작이 서투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성직자는 찍어 누를 수 있는 수준이거든요!
장난을 치는 할아버지에게 짜증을 내고 있으려니 페이비가 끝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네 친구의 말이 옳다. 이제 좀 쉬면 깨어날 것이야.>
할아버지의 확언을 들은 나는 곰의 다리를 붙잡아 끌었다.
곰의 거체는 상당한 무게를 자랑했지만 그렇다 하여 아예 못 움직일 지경은 아니었다.
알른 기사단에서 훈련하면서 했던 여러 고행들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야 뭐.
다른 이들에게 나무를 데리고 와달라 이야기하고서 던전 바깥으로 나오자 진득한 혈향이 콧가를 스쳤다.
“돌아오셨습니까. 아가씨. 명령하신 일을 끝마쳐 두었습니다.”
– 기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더 이상 이 곳에 흑마법을 펼치는 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칼이 자랑스레 이야기하기 무섭게 뒤 편에 있던 아드리가 그의 말을 증빙했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주변으로 고갤 돌리자 연초를 피워대는 얼빠여우와 초조한 듯 팔뚝을 두드리고 있는 뮤러. 그리고 얼굴을 창백히 물들인 비시가 보였다.
당장에라도 속을 게워낼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비시의 모습은 숲에서 일어난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증빙했다.
“…세상에! 헬링! 괜찮은가!?”
“멍멍아. 귀랑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녀? 이 곰탱이의 어디에 걱정할 구석이 있는 거야?”
“정말 고맙습니다! 알른 영애! 당신께서 던전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의심을 품었던 제가 원망스럽군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직 기뻐할 때 아니거든? 멍멍아?”
“…예?”
“뒤에 하나가 더 있거든.”
내가 웃으며 말을 하기 무섭게 던전의 문 너머에서 거인의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뮤러는 눈가를 붉게 물들이더니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비시는 실시간으로 숨이 막힌다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러니 알른 영애께선 영애께는 순순히 도움을 청하셨단거군요?”
“그. 그으. 도움이라기보단 일방적인 명령 쪽이었습니다.”
“루시 알른이 꼭 데려가고픈 능력을 지녔단 이야기인가. 부럽군.”
“제 능력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이상하다. 약해보이는데. 어디가 강한 거야? 한 번 붙어보면 알 수 있을까.”
“…살려주세요. 제발.”
방금 전 루시와 함께 던전 바깥으로 나온 루시의 친구들은 비시가 자신들을 제치고 루시의 선택을 받았단 사실에 살짝 날 선 어투를 드러냈다.
본성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만큼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장난 반 진담 반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비시에게 있어선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변두리의 이름 없는 귀족 가에 속한 그녀에게 있어 왕자와 공작 영애, 백작 영애의 장난은 개구리에게 던지는 돌처럼 느껴졌으니까.
차라리 숲에서 흑마법사들이랑 싸울 때가 나았어. 최소한 그 땐 속은 안 좋았지만 마음은 편했다고!
“여러분들. 비시 양이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페이비가 중간에 끼어들어 다른 이들을 만류했지만 페이비의 미소 앞에서 비시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흑마법사인 비시의 입장에서 페이비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신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사람이 한 마디 하는 순간 나는 물론이고 다른 가족들까지 함께 뎅강이잖아!
위장이. 위장이 아파.
배에 구멍이 난 것 같아아아아.
비시가 실시간으로 수명이 깎여나가는 동안 그녀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온 루시는 숲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숲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말이다.
“저 미련한 곰탱이가 음침한 녀석들한테 처발리는 바람에 이 숲 전체에 역겨운 기운이 퍼졌어. 이대로 내버려두면 나비는커녕 여기 있는 할망구 같은 거만 꼬일 걸?”
루시가 아드리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자 뮤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숲에 남아 있는 흑마법사들을 처리하며 숲이 얼마나 오염되었는 지 보았던 그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숲의 주인을 기반으로 숲이 되살아나긴커녕 숲의 주인이 제 권능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뮤러는 진중한 어투로 루시에게 물음을 던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적을 펼쳐보였던 그녀다.
뮤러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여러 가지를 숨쉬듯 해내보인 것이 루시란 말이다.
방금 전 두 숲의 주인을 구출해 온 것으로 신뢰가 극에 달한 뮤러는 루시가 무얼 말하건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뮤러의 진중한 눈빛을 마주한 루시는 키득 웃으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뮤러가 고갤 갸웃거리자 루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래서 질 낮은 들개는 곤란하다니까. 손을 내밀면 손을 척 올리는 게 상식이잖아?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늑대의 자존심을 버리고 복종하란 이야기에 뮤러의 눈동자가 떨렸지만 그는 이내 입술을 꾹 다물고는 벌벌 떨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지만 그의 손은 루시에게 닿지 못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은 순간 루시가 비웃음과 함께 자신의 손을 거둔 것이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너 같은 들개의 손을 허락할 리가 없잖아? 수준의 차이란 게 있는데 말야.”
“…어.”
“푸하핳. 걱정 마. 멍멍이의 하찮은 자존심을 보니까 즐거워졌거든. 특별히 도와줄게.”
얼굴이 벌게진 뮤러가 입술을 우물대는 동안 루시는 숲의 한 가운데에 섰다. 숲의 정경을 둘러보며 심호흡을 한 그녀는 두 손을 가슴켠에 정갈히 모았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해서 빛이 피어오른다.
“허접 주신. 보고 있지? 페도인 너라면 내 땀냄새를 맡고 싶어서 킁킁거리고 있을 것 같은데.”
불경하고도 불온한 어투. 경건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난스러운 웃음.
“네 변태짓을 조금 참아줄 테니까 신성을 내놔. 그 정도 양심은 있을 거 아냐? 그래도 꼴에 주신인데.”
기도보다는 모욕에 가까운 어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변에서 퍼져나오는 신성은 가면 갈수록 짙어질 뿐이었다.
“흐응. 진짜 변태새끼라니까.”
비웃음이 섞인 매도를 내뱉은 그녀가 눈을 감자 생기를 잃어버린 대지 위에 신성이 새겨진다.
주신이 내린 기적이 루시 알른이라는 여자아이를 기점으로 일어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