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전, 세희 연구소 깊숙한 곳.
나는 내 격리실 침대에 누워서, 꾸물꾸물 침대 위로 기어오르는 황금 사신들을 집어 던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몇 황금 사신들은 내 손가락을 꼭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지만, 손을 몇 번 털어주면 그 아이들도 침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으앙!’
나는 황금 사신의 작은 비명을 들으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심심하네….’
요즘 예린이가 땡땡이를 치러 놀러 오지 않아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일을 빼먹지 못한 만큼 퇴근 후엔 나에게 달라붙었지만, 그만큼 일하는 동안은 더욱 심심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예린이가 갑자기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하다니….
물론 성녀 인형을 이용해서 땡땡이를 치려고 하는 짓이겠지만, 이렇게나 꾸준히 할 줄이야.
성녀 인형이 한글과 영어 그리고 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려면 정말 오래 걸릴 텐데, 그때까지 계속 이렇게 열심히 할 생각인 걸까?
나라면 귀찮아서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나는 평소처럼 지내다가 성녀 훈련이 끝난 바로 다음 날 정도만 열심히 하고, 그 이후부터는 출근하지 않고 성녀 인형으로 슬쩍 바꿔치기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갑자기 예린이의 아파트로 놀러 가볼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TV에서 재미있는 뉴스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
순간이동으로 예린이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늦은 오전의 햇살이 창가에 늘어선 화분들을 비추고 있었다.
‘엄마다!’
‘엄마!’
그런 햇살 아래, 미니 사신들이 행복한 얼굴로 나에게 뛰어오는 것과 동시에 의외의 광경과 마주쳤다.
격리실에 있어야 할 납 인형이 거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탈출한 걸까. 그전에 어떻게 탈출한 거지?’
자연스럽게 성녀 인형의 옆자리를 차지한 납 인형을 보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납 인형은 격리실에서 탈출할 만한 특별한 능력이 없을 텐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가 가끔 납 인형을 꺼내서 노는 것처럼, 미니 사신들이 꺼내준 걸지도 모르겠네….’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납 인형 주변에 미니 사신들이 우글우글 몰려있었던 걸 생각하면, 꽤 합리적인 추리였다.
미니 사신들은 납 인형을 ‘엄마 인형’쯤으로 생각하는 건지 묘하게 인기가 많았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보라 사신의 능력이라면 아주 손쉽게 꺼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뭐, 세희 연구소에 있든 예린이의 아파트에 있든 보안 수준은 비슷할 테니 별 상관없겠지.
미니 사신들이 잔뜩 있으니 별 의미는 없지만, 경비원이 더 자주 돌아다니는 예린이의 아파트 쪽이 오히려 보안 수준이 높다고 볼 수도 있었다.
납 인형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하얀 아귀와 미니 사신을 번갈아 가며 쓰다듬어 주고 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납 인형에서 성녀 인형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과 같이 평범하게 공부하는 성녀 인형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확연히 다른 점이 보였다.
‘저거 설마 오브젝트 관련 원서야?’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용 한글 익힘책 같은 걸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영어로 된 원서를 읽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어느새 한글과 영어를 마스터하고 이런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서적들을 보기 시작한 걸까?
나는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할 책을 술술 읽어 내려가는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예린이가 똑똑해서 그런 걸까? 예린이를 본뜬 인형도 엄청 유능하네.’
그에 비해… 내 인형은….
[?]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납 인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성녀 인형이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척척 읽어내는 동안, 납 인형은 그저 멍하니 하얀 아귀나 쓰다듬고 있다니….
‘역시 내 인형이라 그런 건가….’
성녀 인형이랑 비교해 보면 확실히 멍청한 느낌이었다.
힝.
성녀 인형과 납 인형 듀오에서 눈을 떼고, 예린이의 방으로 들어가서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예린이 느낌이 나는 침대 속에서 멍하니 누워있었더니, 굉장히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평소에는 텅텅 비어있는, 그림쟁이 황금 사신을 위해서 마련된 탁자들 위로 황금 사신들이 잔뜩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자리에 앉은 황금 사신들은 황금 사신에게서 보기 힘든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책의 재질이 물방울인 것을 보면, 책은 푸른 사신이 만들어 준 것 같은데….
그 모습이 굉장히 신기해서, 나는 탁자에 앉은 황금 사신 하나를 손바닥 위로 들어 올렸다.
‘갑자기 책을 왜 읽는 거야?’
그러자 황금 사신은 언제나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엄마가 똑똑한 미니 사신 좋다고 했어!’
설마 보라 사신을 칭찬할 때, 똑똑하다고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있을법한 일이기는 했지만….
나는 황금 사신의 대답을 듣는 순간, 주황 사신의 거대한 지게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굉장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자동 사냥 적으로 생각해 보면 황금 사신이 똑똑한 편이 좋기는 했지만, 예전에 황금 사신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볼 때처럼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애써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공부하는 황금 사신들을 품 안에 그러모았다.
‘자, 책은 그만 보고 같이 푸딩 먹자!’
‘푸딩!’
‘엄마 상냥해!’
그리고 황금 사신들과 함께 작은 푸딩 파티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황금 사신들의 평균 지능이 조금씩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책을 보는 유행까지 생기면….
엄마 댖지 대신, 엄마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미래였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절대로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버리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길 테니 차마 그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힝.
***
늦은 밤, 서울숲을 감싸는 어둠이 깊어져 갈 무렵.
고요한 밤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검은 행성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검은 표면을 감싸는 붉은 고리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일렁거렸고, 그 빛은 도시의 네온사인보다도 더 선명했다.
그 하늘 아래, 한 황금 사신이 홀로 서 있었다.
후암.
소리 없는 작은 하품이 새어 나왔다.
황금 사신은 조그마한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간신히 눈을 떴다.
몇 번이고 고개가 앞으로 푹 숙였다가 벌떡 들어 올려지기를 반복했다.
황금 사신이 깨어있기에는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런데도 시선은 한순간도 검은 행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간….’
황금 사신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고개도 꾸벅꾸벅 꺾일 정도로 졸렸지만, 뭐라도 있는 것처럼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졸린 황금 사신의 귓가에는 희미한 의지가 밤공기를 타고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한숨 같기도, 흐느낌 같기도 했다.
그 의지는 비몽사몽인 황금 사신의 꿈결에서 섞여서 희미하게 들리는, 외로움으로 가득 찬 감정의 파편들이었다.
그 파편은 희미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처럼, 또는 바람에 실려 오는 한숨처럼.
검은 행성을 올려다볼 때면 그 의지는 더욱 선명해졌다가, 시선을 내리면 다시 희미해졌다.
‘인간이 외로워해…. 어디야 인간?’
황금 사신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슬픈 인간을 찾아내는 것은 황금 사신의 본능과도 같았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울고 있어도, 사람들이 가득한 길거리 구석에 쓰러진 인간이 있어도, 그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달려가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그 외로운 감정의 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외롭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작은 소녀의 희미한 감정.
황금 사신은 그 흔적을 쫓기 위해서 졸린 눈을 부릅뜨고 서울 숲을 헤매고 있었다.
밤이 깊어져 갈수록 검은 행성은 더욱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고, 붉은 고리의 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누군가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혹은 어딘가로 통하는 통로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황금 사신은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 있어? 어디야…?’
옛 설화에 나오는 늑대인간이 보름달을 향해 울부짖었듯, 황금 사신은 검은 행성을 향해 의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고, 외로운 의지는 계속해서 서울숲의 밤하늘을 떠돌아다녔다.
***
‘???’
그렇게 서울숲을 떠돌다가 깜빡 졸아버린 황금 사신이 다시 눈을 뜨자, 전혀 새로운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구의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비로운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었는데, 그 잎사귀는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퍼져 나왔고, 그 사이로 형형색색의 아귀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새로운 장소!’
황금 사신의 눈이 반짝였다.
조금 전까지 무겁게 내려앉았던 눈꺼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황금 사신은 정원을 돌보는 하얀 아귀들에게 시선이 멎었다.
‘새로운 간식 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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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아귀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지만, 황금 사신은 그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하얀 아귀들은 전부 처음 보는 하얀 아귀들이라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황금 사신은 가장 가까이 있는 하얀 아귀에게 달려들었다.
작은 이빨로 조심스레 깨물어 보았지만….
‘앗! 딱딱해!’
기대와 달리 하얀 아귀는 마치 돌을 깨무는 것처럼 딱딱했다.
평소 즐기던 달콤한 맛은커녕 쓴맛만 가득했다.
힝.
황금 사신은 실망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저 멀리에서 외로운 감정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이 계속 쫓아왔던, 그래서 서울 숲까지 갔었던 그 의지였다.
황금 사신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드디어 찾았어!’
황금 사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 감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복슬복슬한 무지갯빛 정원수들 사이를 지나 달리고 달려, 마침내 한 소녀를 발견했다.
탁자에 홀로 앉아 그림을 그리는 소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거렸다.
황금 사신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향해 달려 나갔다.
‘드디어 찾았어. 드디어 만났어!’
황금 사신은 애착 인간을 만났다는 생각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