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사신은 기쁨에 찬 발걸음으로 애착 인간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마침내 찾았다는 안도감과 설렘이 작은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장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뀨르르.
정원을 관리하던 아귀들이 물밀듯이 몰려와 황금 사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마치 벽을 이루듯 빽빽하게 들어선 아귀들의 모습에 황금 사신은 잠시 움찔했다.
작은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며 주변을 살폈다.
‘많아….’
물리 면역을 가진 황금 사신에게 색 아귀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몇몇 강력한 하얀 아귀가 가진 물리 면역을 뚫는 ‘오브젝트를 태우는 불꽃’이 문제였다.
황금 사신이 보기에 저 하얀 아귀들은 ‘격’이 약해서 오브젝트를 태우는 불꽃을 쓰지 못할 확률이 높아 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불확실한 확률을 믿고 달려들 수는 없었다.
애착 인간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방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니 사신 발할라에서 부활하더라도, 이 정원에 다시 도달할 수 없다면 황금 사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렇게 어렵게 찾은 애착 인간을 다시 만나려면 또 얼마나 많은 밤을 서울숲에서 헤매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모든 황금 사신은 애착 인간과 만나서 행복해진다는 운명을 믿고 있더라도,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황금 사신의 행복한 운명은 최선을 다한 착한 황금 사신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이 아귀들에게서는 해로운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한, 애착 인간의 성실한 하수인들 같았다.
황금 사신은 망설였고, 형형색색의 아귀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맑은 목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잠깐.”
그리고 보라 소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보랏빛으로 빛났다.
뀨!
하얀 아귀들이 걱정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발걸음을 막으려 했지만, 소녀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소녀는 황금 사신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마도서네.”
소녀는 마치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황금 사신을 바라보았다.
“저택의 책에서도 본 적이 없어. 세계가 망한 뒤에 탄생한 마도서인 걸까?”
그리고 보라 소녀는 처음 보는 야생 토끼를 만난 것처럼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을 뻗어, 황금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랑한 감촉과 따스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해.”
황금 사신은 애착 인간이 놀라지 않도록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보라 소녀를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마침내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자, 황금 사신도 조심스럽게 작은 손을 움직여 소녀의 손가락을 쥐고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황금 사신다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미소였다.
보라 소녀는 황금 사신을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의자로 돌아갔다.
불안해하는 아귀들이 여전히 그들의 뒤를 따랐지만, 이제는 조금 덜 경계하는 눈치였다.
의자에 앉은 소녀는 장난스럽게 황금 사신의 통통한 뺨을 콕콕 찔렀다.
“검은 바다를 뚫고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니?”
‘몰라!’
황금 사신은 신나서 양팔을 휘저었지만, 소녀는 그 의지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황금 사신은 마침내 애착 인간을 만났다는 기쁨에 가슴이 부풀었고, 보라 소녀는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친구’를 얻은 것 같아 행복했다.
***
마시멜로 평원에 핫초코의 달콤한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나는 지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겨우 빠져나왔네….’
공부를 시작한 황금 사신들과 시작한 푸딩 파티는 무려 한 시간이나 이어져 버렸다.
끝없는 에너지와 활기를 가진 황금 사신들과 한 시간이나 어울린 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 마시멜로 평원을 뚜방뚜방 걸어 다니고 있었다.
높은 하늘 위로 흐릿하게 보이는 캐노피.
끝없이 펼쳐진 하얀 마시멜로의 대지.
그리고 기분 전환을 돕는, 익숙한 소리.
그것은 소각로 골렘이 걸으며 땅을 진동시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들리는 하얀 아귀의 비명은 마치 교향곡처럼 귀에 달콤하게 울려 퍼졌다.
붉은 사신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평소보다는 조용했지만, 그래도 이 소리만큼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없었다.
히히.
그러나 그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순간도 잠시, 멀리서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숫자의 황금 사신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투표 패배에 지친 황금 사신들이 자신들만의 회의라도 따로 만든 건가 싶어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정말로 새로운 회의라면, 그 위로 검은 사신들을 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가간 끝에 직시하게 된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이게 무슨….’
황금 사신들이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것도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가!
더 놀라운 사실은 평원을 뛰어놀던 다른 황금 사신들마저 공부하는 황금 사신 무리와 조우하는 족족 그 무리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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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공부 열풍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모든 황금 사신이 갑자기 공부에 재미라도 붙인 걸까?
‘어…, 어째서 이런 일이?’
이런 참담한 일이 왜 발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유령화 상태로 천천히 다가가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러자 새로 온 황금 사신과 공부하던 황금 사신이 소근소근 의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려왔다.
‘책 재미있어?’
‘재미없어!’
그 대답에 새로 온 황금 사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미없는데 왜 하는 거냐는 의문이 얼굴에 가득했다.
공부하던 황금 사신은 그 표정을 보고 히히 웃더니, 굉장한 비밀 정보를 알려주는 표정으로 조그마한 의지를 속삭였다.
‘공부하면…, 엄마가 푸딩 파티를 열어준대!’
‘!!!!’
그 순간, 새로 온 황금 사신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마치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그렇게 황금 사신들 간의 대화를 들은 나는 아주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아버렸다.
‘내가 공부에 보상을 줘버렸구나!’
황금 사신들의 공부에 푸딩 파티라는 달콤한 보상을 줘버린 것이다.
내가 그걸 깨닫는 순간, 황금 사신들에게 댖지의 재앙이 떨어져 내렸다.
‘앙대!’
‘앙대!!’
열심히 공부하던 모든 황금 사신이 하나둘 댖지로 변해갔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했는데도 댖지가 되어버린 황금 사신들의 황금빛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어 가는 가운데, 황금 사신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저 ‘앙대!’를 외칠 뿐이었다.
***
무지갯빛 나무들이 반짝이는 정원.
한 소녀와 황금 사신이 미소를 머금은 채 소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보라 소녀는 황금 사신의 의지를 듣지 못했지만, 폴짝폴짝 뛰며 손과 발을 흔드는 황금 사신의 행동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보라 소녀는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처럼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소녀의 입가에 생긴 미소가 가라앉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녀 곁에는 형형색색의 수호자들이 많았지만, 소녀는 도무지 수호자들을 친구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데다가, 임무를 제외하면 수호자들은 기본적으로 소녀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소녀가 수호자를 만든 창조주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소녀는 수호자를 만들 수가 없었다.
이 저택에는 정말 다양한 책이 있었지만, 연금술 서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탁자 위에 앉아서 놀던 보라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내가 저택을 안내해 줄게!”
보라 소녀는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황금 사신을 들어 올려 어깨 위에 올려둔 뒤,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황금 사신은 애착 인간의 어깨 위에서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저택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저택 내부는 수없이 많은 아귀의 숫자만큼이나 깨끗했다.
바닥은 황금 사신의 조그마한 얼굴이 비칠 정도였고, 천장 위에 매달린 불 꺼진 샹들리에도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소녀가 차례차례 안내하는 곳에는 언제나 아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요리하는 아귀.
청소하는 아귀.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아귀.
수백 마리의 아귀들이 저택을 돌아다녔다.
‘이상해….’
하지만 황금 사신은 아귀를 만날 때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 아귀들은 보통 아귀들보다 생동감이 부족했으니까.
보라 소녀는 처음 생긴 친구인 황금 사신에게 1층의 다양한 시설과 방들을 전부 소개해 주고, 저택 중앙의 큰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쨘! 여기가 내 방이야!”
그리고 저택 2층의 가장 큰 방에 도착하자, 소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방을 소개했다.
애착 인간의 방은 소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잔뜩 걸려있어서, 그림 전시장처럼 보일 정도였다.
‘인간….’
황금 사신은 탁자 위에 서서 살짝 슬픈 표정으로 그림들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림들에는 그저 그림을 계속해서 그릴 수밖에 없었던, 애착 인간의 외로움이 담겨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걸로 저택 소개는 끝이야.”
넓은 저택을 쉬지 않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약간 가쁜 숨을 쉬는 소녀는 황금 사신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
하지만 황금 사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분명 2층 끝에 방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보라 소녀는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하고, 황금 사신을 정수리 위에 올려두었다.
“그럼 배고프니까, 밥 먹으러 가자!”
돌아다녀서 배가 고픈 보라 소녀는 신나는 걸음걸이로 1층 식당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그런 소녀의 머리 위에서 황금 사신이 뒤돌아보자, 보라 소녀가 안내해 주지 않은 복도가 보였다.
먼지가 가득하고, 어둠에 잠긴.
어딘가 이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도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